시간 채집자 12화(최종화) : 해방

해방

by Rich and Growth

1.

6개월 후.

한서린은 작은 서점 앞에 섰다. 간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느린 시간 서점'


문을 열고 들어갔다. 종이 울렸다. 차분한 소리.

"어서 오세요."

강민우가 카운터에서 인사했다. 그는 이제 서점 주인이 되었고, 3개월 전에 오픈했다.

"민우 씨. 바쁘세요?"

"아니요. 한가해요. 요즘 서점이 어디 잘되겠어요."

민우가 웃었다. 하지만 걱정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근데 괜찮아요. 천천히 하려고 오픈한 거니까."

서점 안은 따뜻했다. 책들이 빼곡했지만, 어지럽지 않았다. 한쪽에는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작은 공간도 있었다.

"수진 씨는요?"

"안쪽에 있어요. 전시 준비 중이에요."

서린은 안쪽으로 갔다. 작은 갤러리 공간, 벽에는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이수진이 그림을 걸고 있었다. 20년 만에 다시 만나서 그녀는 이제 민우와 함께 살았다.

"수진 씨!"

"서린 씨! 왔어요?"

수진이 밝게 웃었다.

"이번 전시 주제가 뭐예요?"


"'놓친 시간들'이에요."

수진이 그림을 가리켰다. 캔버스에는 빈 벤치가 그려져 있었다, 20년 전 그 벤치.

"더 이상 아프지 않아요. 이제는 추억이에요."

"다행이네요."

"서린 씨 덕분이에요. 그리고 민우 덕분에."

수진이 서린의 손을 잡았다.

"행복해요. 정말로."


2.

서점을 나와 걷다가, 서린은 작은 카페 앞에 섰다. 새로 생긴 카페였다.

'준혁의 시간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커피 향기가 가득했다.

"어서 오세요!"

이준혁이 카운터에서 환하게 웃었다. 그는 이제 바리스타였다.

"서린 씨! 왔어요?"

"응. 약속했잖아."

"앉아요. 커피 내려줄게요."

준혁은 능숙하게 커피를 내렸다.

"맛있어요."

서린이 커피를 마시며 말했다.

"저는 원래 바리스타였잖아요. 실력은 있어요."

준혁이 옆에 앉았다.

"요즘 어때요? 카페는?"

"좋아요. 손님도 조금씩 늘고 있고."

"피곤하지 않아요?"

"전혀요. 이게 제가 하고 싶었던 일이에요. 평범하게 일하는 거."

준혁이 창밖을 봤다.

"가끔은 신기해요. 제가 진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진짜 사람이에요."

"95%요."

준혁이 웃었다.

"나머지 5%는 당신이 채워주고 있죠."

"나도 완벽하지 않아요."

"알아요. 그래서 좋아요."

그들은 손을 잡았다. 따뜻한 손.

"서린 씨."

"응?"

"오늘 저녁에 같이 영화 볼래요?"

"무슨 영화?"

"모르겠어요. 그냥 둘이서 볼 수 있는 거요."

"좋아요."


3.

저녁. 영화관.

서린과 준혁은 뒷자리에 앉았다. 영화가 시작됐다.

하지만 서린은 영화에 집중하지 못했다. 준혁을 계속 쳐다봤다.

준혁도 서린을 봤다.

"영화 안 봐요?"

"당신 보는 게 더 재밌어요."

"저도요."

그들은 웃었다. 조용히.

영화 중간에 준혁이 서린의 손을 잡았다.

"서린 씨."

"응?"

"고마워요."

"뭐가요?"

"저를 여기까지 데려와줘서."

"나도 고마워요. 당신이 있어줘서."

준혁은 서린을 끌어당겼다. 키스했다. 부드럽게.

영화는 계속 흘러갔지만, 그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이 더 중요했다.


4.

영화가 끝나고 밖으로 나왔다. 밤공기가 시원했다.

"배고파요."

서린이 말했다.

"뭐 먹을래요?"

"떡볶이!"

"떡볶이요?"

준혁이 놀란 표정이었다.

"서린 씨가 떡볶이를 좋아했어요?"

"몰랐어요? 나 떡볶이 엄청 좋아해요."

"처음 알았어요. 우리 사귄 지 6개월 됐는데."

"아직 모르는 게 많죠. 앞으로 알아가면 돼요."

그들은 포장마차를 찾아갔다. 떡볶이를 시켰다.

"매운 거 괜찮아요?"

"괜찮아요. 매운 게 맛있잖아요."

준혁이 떡볶이를 먹다가 얼굴이 빨개졌다.

"으악! 매워요!"

"그러게요. 괜찮다고 했잖아요."

"괜찮은 줄 알았어요!"

서린이 웃으며 물을 건넸다.

"귀여워요."

"놀리지 마세요."

그들은 평범한 연인처럼 웃으며 떡볶이를 먹었다.


5.

집으로 돌아가는 길. 서린과 준혁은 손을 잡고 걸었다.

"준혁 씨."

"응?"

"행복해요?"

"네. 엄청."

"나도요."

그들은 서린의 집 앞에 도착했다. 준혁은 작은 원룸을 얻어서 다른 곳에 살았다.

"들어가요."

"응. 내일 봐요."

"내일도 카페 와요."

"당연하죠. 매일 갈 건데."

준혁이 서린을 안았다. 꽉.

"사랑해요."

"나도 사랑해요."

그들은 키스하고 헤어졌다.


서린은 집으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서자, 텅 빈 캐비닛이 보였다.

10년치를 다 풀어낸 후, 그녀는 채집을 멈췄었다.

하지만 최근 다시 시작했다. 조금씩.

예쁜 순간들만. 행복한 순간들만.

준혁과 함께 본 석양.

민우와 수진이 웃는 순간.

소미가 차를 내려주는 순간.

작은 것들. 소중한 것들.

서린은 오늘의 순간을 채집했다. 준혁과의 키스, 떡볶이, 손 잡고 걷던 길.

바이알에 담아서 조심스럽게 캐비닛에 넣었다.

"하나씩 채워가는 거야."

그녀가 중얼거렸다.

"10년은 아니어도 괜찮아. 천천히."


6.

일요일 아침.

서린, 준혁, 민우, 수진, 소미가 모였다. 소미의 고물상에서.

"오랜만에 다 모였네."

소미가 차를 내왔다.

"오늘 뭐 하기로 했죠?"

"소풍이요!"

수진이 환하게 웃었다.

"한강 공원에 가기로 했잖아요."

"맞아요. 준비됐어요?"

"네!"

그들은 큰 가방에 음식을 챙겼다. 김밥, 과일, 음료수.

한강으로 갔다. 날씨가 완벽했다.

돗자리를 펼치고 앉았다. 강을 보며.

"와, 여기 좋다."

민우가 감탄했다.

"자주 와야겠어요."

"그러게요."

그들은 김밥을 먹으며 수다를 떨었다. 별 의미 없는 이야기들. 하지만 행복한 이야기들.

"수진 씨, 전시는 언제예요?"

"다음 주 토요일이요. 다들 와야 해요."

"당연히 가죠!"

"민우 씨, 서점은 잘돼요?"

"그럭저럭요. 천천히 하려고요."

"준혁 씨, 카페는요?"

"좋아요. 서린 씨가 매일 와서 더 좋고요."

"에이, 부끄러워요."

그들은 웃었다. 함께.

소미가 그들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다들 잘 살고 있네."

"언니 덕분이에요."

서린이 말했다.

"제가 뭘 했다고."

"많이 했죠. 언니 없었으면 우리 여기 없었어요."

"맞아요."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소미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렸다.

"에이, 그만해요."


7.

오후. 그들은 강변을 따라 산책을 했다.

서린과 준혁은 손을 잡고 뒤에 천천히 걸었다.

"서린 씨."

"응?"

"이거... 꿈 같아요."

"뭐가요?"

"이렇게 평범하게 사는 게. 친구들이랑 소풍 오고, 김밥 먹고, 산책하고."

준혁이 하늘을 봤다.

"1년 전만 해도 상상도 못 했어요."

"나도요."

"그때 저는... 투명한 유령이었잖아요."

"이제는 아니에요."

"네. 당신 덕분에."

햇살 아래에서 준혁이 서린을 안았다.

"평생 이렇게 살면 좋겠어요."

"그럴 거예요."

"약속해요?"

"약속해요."

그들은 키스했다. 따뜻한 봄 햇살 아래에서.


8.

저녁, 해가 지고 있었다.

다섯 명은 돗자리에 앉아 석양을 봤다.

"예쁘다..."

수진이 중얼거렸다.

"이거 그려야겠어요."

"그림으로 담아요?"

"네, 이 순간을."

서린은 바이알을 꺼냈다.

"나는 이걸로 담을게요."

"아직도 채집해요?"

"가끔요. 예쁜 순간들만."

서린은 마개를 열었다. 석양의 빛이 병 안으로 들어갔다.

다섯 사람이 함께 본 석양.

우정, 사랑, 감사.

모든 것이 담겼다.

"잘 담았어요?"

준혁이 물었다.

"완벽하게요."

서린이 미소 지었다.

"이제 이 순간은 영원히 우리 거예요."


9.

밤. 서린은 집으로 돌아왔다.

캐비닛 앞에 섰다. 새로 채집한 병들이 서서히 쌓이고 있었다.

아직 많지 않았다. 20개? 30개?

10년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천천히 채워가면 됐다.


서린은 오늘의 병을 넣었다. 석양의 빛.

서린은 미소 지으며 서랍을 닫았다.

그리고 침대에 누웠다. 오늘 하루를 떠올리며.

준혁의 키스.

떡볶이 맛.

친구들의 웃음.

석양의 색깔.

모든 것이 소중했다.

"내일은 뭐 하지?"

그녀가 중얼거렸다.

"준혁 씨랑 데이트 해야겠다."

그녀는 웃으며 잠들었다.

내일을 기대하며.


10.

3년 후.

한서린은 작은 스튜디오 앞에 섰다. 간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시간 기록소'

문을 열었다. 안에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시간 채집 상담 받으러 왔어요."

젊은 여성이 말했다.

"네, 앉으세요."

서린은 이제 새로운 일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시간 채집을 가르치는 일이다.

"어떤 순간을 채집하고 싶으세요?"

"제 할머니랑 함께한 시간이요. 할머니가 이제 많이 아프셔서..."

"좋은 선택이에요. 가르쳐드릴게요."

서린은 바이알을 꺼냈다.

"시간을 채집하는 건 어렵지 않아요. 중요한 건 마음이에요."

"마음이요?"

"네. 그 순간을 진짜로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 그게 있으면 채집할 수 있어요."

한 시간 후, 여성은 환하게 웃으며 나갔다. 손에는 병 하나. 할머니와의 시간이 담긴.

"고마워요!"

"천천히 가세요."

서린은 미소 지었다.

다음 손님이 들어왔다. 또 다음 손님.

하루에 다섯 명 정도. 많지 않았지만, 의미 있었다.

문이 열렸다. 이준혁이었다.

"점심 먹으러 왔어요."

"벌써 시간이?"

"네. 12시예요."

준혁은 이제 서린의 남편이었다. 6개월 전에 결혼했다.

"뭐 먹을래요?"

"당신 먹고 싶은 거요."

"그럼 떡볶이!"

"또요?"

"맛있잖아요."

그들은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11.

떡볶이 가게. 그들은 마주 앉아 있었다.

"오늘 어땠어요?"

"좋았어요. 다섯 명 가르쳤어요."

"다들 잘 배워요?"

"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시간을 볼 수 있더라고요. 그냥 몰랐던 것뿐이에요."

"당신 덕분에 알게 됐네요."

"그렇죠."

서린이 자랑스럽게 웃었다.

"준혁 씨는요? 카페는?"

"바빠요. 요즘 손님이 많아졌어요."

"다행이다."

"근데 피곤해요."

"그럼 쉬어야죠."

"당신이랑 있으면 안 피곤해요."

"에이, 사탕발림."

그들은 웃으며 떡볶이를 먹었다.

"서린 씨."

"응?"

"우리... 잘 살고 있죠?"

"네. 정말 잘 살고 있어요."

"행복해요?"

"엄청요. 준혁 씨는요?"

"저도요. 매일매일 행복해요."

준혁이 서린의 손을 잡았다.

"평생 이렇게 살면 좋겠어요."

"그럴 거예요. 우리."


12.

저녁. 서린과 준혁은 집으로 돌아왔다. 작은 투룸 아파트. 그들의 신혼집.

"씻고 올게요."

"네."

준혁이 샤워하는 동안, 서린은 캐비닛 앞에 섰다.

3년간 채집한 시간들. 이제 200개쯤 됐다.

10년치에 비하면 아직 멀었지만, 괜찮았다.

천천히 채워가면 됐다.

평생 동안.

서린은 오늘의 순간을 채집했다. 준혁과의 점심. 떡볶이. 손 잡은 순간.

병에 담았다. 따뜻한 빛으로.

캐비닛에 넣었다.

"하나 더."

그녀가 중얼거렸다.

"내일도 하나 더."

준혁이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뭐 해요?"

"채집했어요. 오늘 우리."

"저도 볼 수 있어요?"

"당연하죠."

서린은 병을 보여줬다. 준혁은 들여다봤다.

"와... 예쁘다."

"우리가 예쁜 거예요."

"맞아요. 우리가 예쁘죠."

준혁이 서린을 안았다.

"사랑해요."

"나도 사랑해요."

그들은 키스했다. 길게.

침대로 갔다. 함께 누웠다.

"준혁 씨."

"응?"

"10년 후에는 뭐 하고 있을까요?"

"모르죠. 근데 함께 있겠죠."

"20년 후에는요?"

"그때도 함께 있을 거예요."

"30년 후에는요?"

"당연히 함께 있죠."

준혁이 서린을 더 꼭 안았다.

"평생 함께 있을 거예요. 약속이에요."

"좋아요. 약속."

서린은 준혁의 품에서 눈을 감았다.

행복했다.

지금 이 순간이.

그리고 내일도 행복할 것이었다.

모레도.

평생.


13.

10년 후.

42살의 한서린은 큰 강연장에 섰다. 청중은 300명.

"시간 채집이란 무엇일까요?"

그녀가 물었다.

"단순히 순간을 기록하는 게 아닙니다. 그 순간을 진짜로 사는 겁니다."

화면에 사진이 떴다. 서린과 준혁의 결혼 사진.


"저는 10년 전,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려고 했습니다. 완벽하게. 하지만 깨달았죠. 완벽하게 구하는 것보다, 함께 불완전하게 사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을."

청중이 조용히 들었다.


"시간은 제로섬이 아닙니다. 함께 나누면 늘어납니다. 사랑으로."

서린이 바이알을 들어 올렸다.

"이 안에는 제 10년이 들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한 10년. 완벽하지 않았지만, 행복했던 10년."

그녀가 미소 지었다.


"여러분도 채집하세요. 여러분의 시간을.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박수가 터져 나왔다.

강연이 끝나고, 서린은 무대에서 내려왔다.

준혁이 기다리고 있었다. 손에는 꽃다발.

"잘했어요."

"고마워요."

그들은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거리를 걸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갔다. 각자의 시간을 살며.

"준혁 씨."

"응?"

"행복해요?"

"네. 매일."

"나도요."

서린은 멈춰 섰다. 준혁을 봤다.

"고마워요. 여기까지 와줘서."

"당연한 걸요. 우리 함께잖아요."

"평생?"

"평생."

그들은 키스했다. 거리 한가운데에서.

주변 사람들이 쳐다봤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이 더 중요했다.

서린은 마음속으로 이 순간을 채집했다.

이제는 바이알 없이도 할 수 있었다.

진짜로 사는 것.

그게 진짜 채집이었다.

"어디 갈까요?"

준혁이 물었다.

"어디든요. 당신이랑 같이면."

"그럼 집 갈까요? 저녁 해먹어요."

"좋아요. 뭐 먹을래요?"

"당신 먹고 싶은 거요."

"그럼 떡볶이!"

"에이, 또요?"

그들은 웃으며 걸어갔다. 석양 속으로.

손을 잡고.

평생 함께할 두 사람.

불완전하지만 완벽한 사랑.


"어떤 1분은 1년보다 길다. 하지만 그 1분을 채집하는 것보다,그 1분 안에 있는 것이 더 중요하다.그리고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 그 1분은 영원이 된다."

한서린, '시간 채집자의 기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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