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채집자 11화 : 선택

선택

by Rich and Growth

1.

일주일 후.

한서린은 첫 번째 사람을 찾아갔다. 박민지.

"또 오셨네요."

박민지가 놀란 표정이었다.

"이번엔 다른 걸 드리러 왔어요."

"다른 거요?"

서린은 바이알을 꺼냈다. 하지만 이번엔 비어 있지 않았다.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건... 제 시간이에요."

"당신 시간이요?"

"네. 제 미래의 시간, 이걸 당신한테 드릴게요. 훔쳐간 15분 대신."

"무슨 소리예요?"

서린은 설명했다. 준혁이 훔친 시간은 돌려줄 수 없다는 것. 대신 다른 보상을 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자신의 시간을 준다는 것.

"그게... 가능해요?"

"가능해요. 제가 해봤어요."

"근데 당신은... 손해 아니에요?"

"괜찮아요. 제 선택이에요."

서린이 미소 지었다.

"받아주세요. 제발."

박민지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병을 받았다.

순간, 따뜻함이 몸속으로 흘러들었다. 15분이 아니었다. 훨씬 더 많았다. 1년? 2년?

"이건... 너무 많은데요..."

"괜찮아요. 당신한테 필요한 만큼이에요."

서린은 돌아섰다.

"행복하세요."

박민지는 서린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뭔가 말하고 싶었지만, 서린은 이미 사라지고 있었다.


2.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서린은 12명을 하나씩 찾아갔다. 모두에게 자신의 시간을 나눠줬다.

각자에게 필요한 만큼. 1년, 2년, 때로는 3년.

민우가 이상함을 눈치챘다.

"서린 씨, 요즘 안색이..."

"괜찮아요."

"괜찮지 않아요. 얼굴이 창백해요."

"피곤해서 그래요."

하지만 민우는 알았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소미 씨한테 물어볼게요."

"안 돼요!"

서린이 급하게 말했다. 너무 급해서 민우가 놀랐다.

"왜요?"

"그냥... 괜찮아요. 조금만 더 하면 끝나요."

"서린 씨..."

"제발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아요."

민우는 서린의 눈을 봤다. 간절함이 있었다. 그리고... 두려움.

"...알았어요. 근데 무리하지는 마세요."

"네. 고마워요."

3.

다섯 번째 사람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서린은 비틀거렸다.

어지러웠다. 세상이 빙빙 돌았다.

'아직 7명 남았는데...'

벤치에 앉았다. 숨을 고르려 했다.

그때 누군가 나타났다. 준혁이었다.

"서린 씨!"

그는 낮인데도 나타났다. 처음이었다.

"준혁 씨? 낮에 어떻게..."

"뭔가 이상해요. 당신한테서 느껴져요."

준혁이 다가왔다. 그는 확실히 선명해졌다. 거의 90%쯤.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 하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거짓말. 당신 시간이... 줄어들고 있어요."

서린은 놀라 준혁을 봤다.

"어떻게...?"

"느껴져요. 시간 도둑이었잖아요. 시간의 흐름을 감지할 수 있어요."

준혁이 서린의 손을 잡았다. 이번엔 완전히 잡았고 따뜻했다.

"당신... 시간을 주고 있죠? 다른 사람들한테?"

"..."

"대답해요!"

준혁의 목소리가 떨렸다.

"12명한테... 당신 시간을 주고 있는 거죠?"

서린은 고개를 돌렸다.

"그래야 당신을 완전히 구할 수 있어요."

"미쳤어요!"

준혁이 소리쳤다.

"당신 죽을 수도 있어요!"

"안 죽어요."

"어떻게 알아요?"

"소미 언니가 계산했어요. 12명한테 다 주면... 10년 정도 줄어요."

"10년이요? 그게 적다고 생각해요?"

"10년이면... 괜찮아요."

서린이 준혁을 봤다.

"당신이 완전히 돌아오는 게 더 중요해요."


"아니에요!"

준혁이 서린을 안았다. 완전히. 처음으로.

"당신이 더 중요해요. 당신 목숨이."

서린은 준혁의 품에서 울었다.

"근데 나는... 당신 없이는 못 살아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당신 없이는."

준혁이 서린을 떼어놓고 똑바로 봤다.

"그만해요. 지금 당장."

"안 돼요. 이미 5명한테 줬어요. 7명 남았어요."

"상관없어요. 멈춰요."

"준혁 씨..."

"85%로 충분해요. 아니, 50%여도 괜찮아요. 당신만 있으면."

준혁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진짜 눈물. 투명하지 않은.

"제발... 당신을 잃고 싶지 않아요..."

4.

소미의 고물상에서의 긴급 회의.

서린, 준혁, 민우, 소미가 모였다.

"그래서 상황이 어떻게 된 거야?"

소미가 물었다.

"5명한테 줬어요. 7명 남았어요."

"계속할 거야?"

"네."

"안 돼요!"

준혁이 소리쳤다.

"저는 반대예요. 85%로도 충분해요."

"안 돼요. 완전해야 해요."

"왜요? 왜 꼭 완전해야 해요?"

서린은 대답하지 못했다.

민우가 조용히 말했다.

"서린 씨는... 무서운 거예요."

"뭐가요?"

"또 누군가를 불완전하게 남겨두는 게. 유진이처럼."

민우의 말에 모두가 침묵했다.

"그게 트라우마인 거죠. 그래서 준혁 씨를 완벽하게 구하려고 하는 거예요. 자기 목숨을 걸고서라도."

서린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나는... 또 후회하고 싶지 않아요..."

"서린 씨."

민우가 그녀 앞에 앉았다.

"유진이는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맞아요..."

"그리고 준혁 씨도 완벽하게 구하지 못한다 해도,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근데..."

"당신은 충분히 했어요. 300개나 돌려줬잖아요. 그것만으로도 기적이에요."

민우가 서린의 손을 잡았다.

"이제 그만 자신을 벌주세요. 완벽하지 못하다고."

서린은 한참을 울었다. 민우의 손을 잡고.

소미가 차를 내왔다.

"진정하고 생각해봐. 세 가지 선택이 있어."

"뭔데요?"

"첫 번째. 지금 멈춘다. 5명만 보상하고, 준혁은 85%로 산다."

"..."

"두 번째. 계속한다. 7명 더 보상하고, 준혁을 완전히 구한다. 대신 서린이 10년을 잃는다."

"..."

"세 번째."

소미가 준혁을 봤다.

"준혁이 포기한다. 실체화를 포기하고, 시간의 존재로 남는다. 그럼 서린이는 시간을 안 잃어도 돼."

준혁이 즉시 말했다.

"세 번째요."

"안 돼요!"

서린이 소리쳤다.

"당신이 포기하면 안 돼요!"

"왜 안 돼요?"

"당신은...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했잖아요. 밥 먹고, 영화 보고, 산책하고. 그러려면 완전한 몸이 필요해요."

"당신과 함께라면 85%로도 할 수 있어요."

"안 돼요... 나 때문에 포기하면 안 돼요..."

서린이 무너졌다.

"나는 또... 누군가의 꿈을 빼앗는 거예요..."

준혁이 서린을 안았다.

"아니에요. 당신은 제 꿈이에요. 당신과 함께하는 게."

5.

그날 밤. 서린은 혼자 집에 있었다.

결정을 해야 했다. 세 가지 중 하나.

'계속할까?'

'멈출까?'

'준혁에게 포기하게 할까?'

모두 싫었다. 모든 선택이 뭔가를 잃는 것 같았다.

창문 틈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유진이었다.

"서린아..."

"유진아."

"아직도... 괴로워하고 있구나..."

"응. 모르겠어. 어떻게 해야 할지."

"나는 알아..."

"뭔데?"


"셋 다 틀렸어..."

"네?"

"첫 번째도 틀리고, 두 번째도 틀리고, 세 번째도 틀렸어. 진짜 답은 따로 있어."

"뭔데? 말해줘."

"네 번째 선택. 함께 나누는 거."

"함께 나눈다?"

"준혁이가 85%야. 그럼 15%가 부족하잖아. 그 15%를 준혁이랑 같이 채우는 거야."

"무슨 뜻이야?"

"준혁의 불완전함을 당신이 채우고, 당신의 불완전함을 준혁이 채우는 거야. 서로의 빈틈을 메워주는 거지."

서린은 깨달았다.

"완벽하게 구하는 게 아니라..."


"함께 불완전하게 사는 거야. 그게 사랑이야."


유진의 목소리가 따뜻했다.

"나도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너랑 함께 불완전하게 살 수 있었으면."

"유진아..."

"이제 나는 정말 가야 해. 너를 믿으니까."

"고마워. 정말로."

"사랑해, 서린아."

빛이 사라졌다. 완전히. 이번엔 진짜 마지막.

서린은 창문에 손을 댔다.

"나도 사랑해, 유진아."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6.

다음 날 아침. 서린은 모두를 불렀다.

"결정했어요."

"뭐로요?"

준혁이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네 번째 선택이요."

"네 번째?"

"7명한테는 시간을 주지 않을 거예요. 대신..."

서린이 준혁을 봤다.

"당신과 함께 그들을 도울 거예요. 시간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무슨 뜻이에요?"

"시간을 돌려줄 수는 없어요.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 하지만 앞으로의 시간은 도와줄 수 있어요."

서린은 노트를 펼쳤다.

"박민지 씨는 프로젝트를 망쳤어요. 그럼 우리가 그 사람 다음 프로젝트를 도와주면 돼요."

"어떻게요?"

"민우 씨가 컨설턴트였잖아요. 같이 도와주면 되죠."

민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어요."


"두 번째 사람은 가족과 싸웠대요. 준혁 씨가 훔친 시간에 사과할 기회를 놓쳤대요. 그럼 우리가 중재를 도와주면 돼요."

"..."

"세 번째 사람은..."

서린은 7명 모두에 대한 계획을 설명했다. 시간을 돌려주는 게 아니라, 앞으로를 도와주는 것.

"이렇게 하면... 당신은 85%로 남겠지만, 우리가 함께 빚을 갚는 거예요."

준혁은 서린을 뚫어지게 봤다.

"당신... 정말..."

"나는 당신을 완벽하게 구하는 것보다, 함께 불완전하게 사는 게 더 좋아요."

서린이 미소 지었다.

"그게 진짜 사랑인 것 같아요."

준혁은 서린을 끌어안았다. 완전히.

"고마워요... 정말로..."

소미가 옆에서 피식 웃었다.

"드디어 정신 차렸네."

민우도 웃었다.

"좋은 선택이에요. 정말로."

7.

그날부터 그들은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서린, 준혁, 민우, 그리고 소미까지. 네 사람이 팀을 이뤘다.

7명을 하나씩 도왔다.

박민지의 프로젝트를 도왔다. 민우의 컨설팅으로.

두 번째 사람의 가족 중재를 도왔다. 소미의 지혜로.

세 번째 사람의 사업을 도왔다. 준혁의 경험으로.

하나씩. 천천히.

한 달. 두 달. 세 달.

7명 모두를 도왔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의미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준혁의 형체가 변하기 시작했다.

85%가 아니었다. 더 선명해졌다.

90%. 95%.

"어떻게 된 거예요?"

준혁이 놀라 자신의 손을 봤다. 거의 완전히 실체였다.

소미가 설명했다.


"너희가 7명을 도우면서... 새로운 시간을 만든 거야. 빚을 갚는 대신 선물을 준 거지."

"그게... 가능해요?"

"가능해. 시간은 제로섬이 아니야. 함께 나누면 늘어나."

소미가 웃었다.


"너희가 증명했어. 사랑으로."

준혁은 서린을 봤다. 그리고 웃었다.

"우리... 해냈어요."

"네. 함께."

그들은 안았다. 완전히, 진짜로.

8.

그날 밤. 한강 공원.

서린과 준혁은 벤치에 앉아 있었다. 이번엔 둘 다 앉을 수 있었다.

"준혁 씨."

"네?"

"약속 기억해요?"

"무슨 약속이요?"

서린이 수줍게 웃었다.

"만질 수 있게 되면, 제일 먼저 키스한다고."

준혁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 그 약속..."

"기억 안 나요?"

"아니요. 기억해요. 근데..."

준혁이 망설였다.

"첫 키스인데... 부끄러워요..."

서린이 웃었다.

"나도 첫 키스예요."

"정말요?"

"네. 그러니까..."

서린이 준혁에게 다가갔다.

"같이 서툴게 해요."

그들의 입술이 닿았다.

부드럽고 따뜻했다. 조금 서툴렀지만, 완벽했다.

오랜 키스 후, 그들은 떨어졌다. 얼굴이 빨개진 채로.

"와..."

준혁이 중얼거렸다.

"이게... 키스구나..."

"어땠어요?"

"최고였어요."

서린이 웃었다.

"나도요."

그들은 손을 잡고 강을 봤다. 달빛이 물에 반짝였다.

"서린 씨."

"네?"

"앞으로... 뭐 하고 싶어요?"

"평범한 거요. 준혁 씨가 원했던 것처럼."

"같이?"

"당연하죠. 같이."

서린이 준혁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밥 먹고, 영화 보고, 산책하고. 그런 거요."

"좋아요. 그렇게 해요."

"그리고..."

"그리고요?"

"가끔은 시간도 채집하고 싶어요. 예쁜 순간들."

"혼자?"

"아니요. 당신이랑 같이."

준혁이 미소 지었다.

"좋아요. 같이해요. 평생."

"평생이요?"

"네. 평생."

그들은 키스했다. 다시. 이번엔 더 길게.

밤은 깊었지만, 그들의 시간은 이제 시작이었다.

불완전하지만 함께하는 시간.

그게 가장 완벽한 시간이었다.

이전 10화시간 채집자 10화 : 세 개의 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