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채집자 10화 : 세 개의 빚

세 개의 빚

by Rich and Growth

1.

다섯 달째.

"300번째요!"

민우가 환호했다. 서린은 피곤했지만 미소 지었다.

"189개 남았어요."

"거의 다 왔네요."

그들은 이제 익숙한 루틴이 있었다. 아침에 만나서 대상을 찾고, 오후에 시간을 채집하고 돌려주고, 저녁에는 기록을 정리했다.

서린은 더 이상 무리하지 않았다. 하루에 세 개. 꾸준히.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요."

"벌써요? 하나 더 할 수 있잖아요."

"아니요. 오늘은 이만."

서린이 노트를 덮었다.

"저녁에 준혁 씨 만나기로 했어요."

민우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요즘 매일 만나시네요?"

"네. 문제 있어요?"

"없죠. 보기 좋아요."

민우가 가방을 챙기며 말했다.

"근데 서린 씨, 하나 궁금한 게 있어요."

"뭔데요?"

"준혁 씨랑... 앞으로 어떻게 할 거예요?"

"무슨 뜻이에요?"

"189개 다 돌려주고 나면... 준혁 씨가 거의 실체화될 거잖아요. 그럼?"

서린은 잠시 생각했다.

"모르겠어요. 아직 생각 안 해봤어요."

"생각해봐야죠. 같이 살 건지, 뭘 할 건지."

"..."

"준혁 씨는 뭐래요?"

"그 사람도... 잘 모르겠대요. 실체가 되는 게 처음이니까."

민우는 서린의 어깨를 두드렸다.

"행복하세요. 두 분 다."

"고마워요, 민우 씨."


2.

저녁. 한강 공원.

준혁이 서린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그는 거의 사람처럼 보였다. 70%가 아니라 85% 정도?

"서린 씨!"

"준혁 씨!"

서린이 달려갔다. 습관적으로 안으려다가 멈췄다.

"아, 또..."

"괜찮아요. 곧 되니까."

그들은 나란히 벤치에 앉았다. 아니, 서린만 앉고 준혁은 앉는 시늉을 했다.

"오늘 300개 됐어요."

"정말요? 축하해요!"

"189개만 더요."

서린이 준혁을 봤다.

"보여요? 많이 선명해졌어요."

"느껴져요. 몸이 무거워지고 있어요."

준혁이 손을 들어 올렸다. 투명했지만, 빛의 질감이 달랐다. 더 단단해 보였다.

"혹시... 만져질까요?"

서린이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준혁의 손에 닿으려 했다.

스쳤다.

완전히 만져지진 않았지만, 뭔가 느껴졌다. 미세한 저항감. 온기.

"어?"

"느껴져요?"

"네! 조금!"

서린의 눈이 반짝였다.

"정말로 돌아오고 있어요!"

"네... 조금씩..."

준혁도 감격스러운 표정이었다.

"189개만 더 하면... 완전히는 아니어도, 거의 만질 수 있을 거예요."

"그럼 우리..."

서린이 수줍게 웃었다.

"키스할 수 있을까요?"

"해봐야죠."

그들은 웃었다. 서로를 보며.

"준혁 씨."

"네?"

"189개 끝나면... 뭐 하고 싶어요?"

준혁은 잠시 생각했다.


"평범한 걸 하고 싶어요."

"평범한 거요?"

"네. 같이 밥 먹고, 영화 보고, 산책하고. 그런 거요."

"그게 다예요?"

"네. 그게 제일 하고 싶어요. 평범하게 사는 거."

준혁이 하늘을 봤다.

"저는 평생 평범하게 산 적이 없어요. 늘 아프거나, 시간 훔치거나, 투명하거나."

"이제는 할 수 있어요."

"그럴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서린이 그의 손을 잡으려 했다. 완전히 잡히진 않았지만, 온기가 느껴졌다.

"우리 같이 해요. 평범하게."

3.

하지만 그날 밤.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준혁이 서린을 만나러 왔다. 그런데 그의 모습이...

흐릿했다.

"준혁 씨?"

서린이 놀라 다가갔다.

"왜 그래요? 어제보다 더 흐려진 것 같은데..."

"저도... 모르겠어요..."

준혁의 목소리도 약했다.

"갑자기... 힘이 빠지는 것 같아요..."

"왜요? 우리 잘하고 있는데!"

"모르겠어요. 오늘 낮부터... 이상했어요..."

준혁이 비틀거렸다. 서린이 붙잡으려 했지만 손이 통과했다.

"준혁 씨!"

"괜찮아요... 잠깐만..."

하지만 그는 무릎을 꿇었다. 형체가 흔들렸다.

"안 돼... 왜 이러는 거예요?"

서린은 급히 핸드폰을 꺼내 소미에게 전화했다.

"언니! 준혁 씨가 이상해요! 갑자기 흐려지고 있어요!"

"뭐? 지금 어디야?"

"우리 집 앞이요!"

"금방 갈게. 준혁한테서 눈 떼지 마!"


10분 후. 소미가 도착했다. 그녀는 준혁을 보자마자 얼굴이 굳었다.

"이건..."

"뭐예요? 왜 이러는 거예요?"

소미가 준혁 주변을 살폈다. 무언가 감지하는 것 같았다.

"역류야."

"역류요?"

"시간의 역류. 돌려준 시간들이... 다시 빠져나가고 있어."

"왜요?"

"모르겠어. 보통은 이럴 리 없는데..."

소미가 노트를 펼쳤다.

"300개까지 돌려줬지?"

"네."

"그럼 문제가 뭐지..."

소미가 노트를 꼼꼼히 살폈다. 그리고 한 페이지에서 멈췄다.

"이거."

"뭐예요?"

"285번째. 이틀 전에 돌려준 거. 이거 제대로 된 거 맞아?"

"네. 확인했는데요."

"다시 확인해봐. 뭔가 잘못됐을 거야."

4.

다음 날 아침. 서린과 민우는 285번째 대상을 다시 찾아갔다.

30대 여성. 박민지. 회사원.

"저기요, 박민지 씨?"

"네? 또 누구세요?"

여자가 경계하는 표정이었다. 이틀 전에도 만났는데.

"이틀 전에 시간 돌려드렸잖아요. 혹시..."

"아, 그거요?"

여자가 가방에서 바이알을 꺼냈다. 텅 비어 있었다.

"이거 진짜 이상한 거였어요. 받자마자 기분이 좋아지더니, 한 시간 후에 다 사라졌어요."

"사라졌다고요?"

"네. 따뜻함이 싹 사라지고, 도로 피곤해지고."

서린은 병을 받아들었다. 냄새를 맡았다.

이상했다. 시간의 잔향이 없었다. 완전히 텅 빈 병.

"이거... 제대로 안 된 거예요."

"뭐가요?"

"시간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은 거예요. 임시로만 들어갔다가 다시 빠져나간 거예요."

"왜요?"

민우가 물었다.

"모르겠어요. 이런 적 처음이에요."


서린은 노트를 펼쳤다. 285번째 기록을 봤다.

2023년 8월 12일. 강남역 카페. 박민지. 업무 중 쉬는 시간 15분.

"이게 맞는데..."

"혹시 다른 사람의 시간을 잘못 가져온 거 아니에요?"

"아니요. 확인했어요. 분명히 박민지 씨 거였어요."

서린은 다시 채집을 시도했다. 눈을 감고 집중했다.


2023년 8월 12일. 강남역 카페. 박민지의 15분.

느껴졌다. 시간의 흔적이.

채집하고 바이알에 담았다.

"이제 받으세요."

박민지가 병을 받았다. 순간, 따뜻함이 느껴졌다.

"아, 이거예요! 이 느낌!"

하지만 30초 후.

따뜻함이 사라졌다. 다시.

"왜... 또 사라져요?"

"이상해..."

서린은 당황했다. 이런 적이 없었다.

"뭔가 막고 있어요. 시간이 제대로 들어가는 걸."

"뭐가요?"

"모르겠어요..."


5.

소미의 고물상.

서린, 민우, 소미가 모여 회의를 했다.

"285번째만 그래?"

"네. 다른 건 다 잘됐는데, 이것만..."

소미가 노트를 자세히 봤다.

"박민지. 30대. 회사원. 준혁이 훔친 시간은... 15분."

"네."

"이상한데. 다른 것들은 다 5분, 10분인데, 이것만 15분이야."

"그게 문제예요?"

"아니, 시간 길이는 문제가 아니야. 근데..."

소미가 뭔가 깨달은 표정이었다.

"혹시 이 사람, 준혁이 시간 훔친 후에 특별한 일 없었어?"

"어떻게 알아요?"

"확인해봐. 중요할 수도 있어."

서린은 다시 박민지를 찾아갔다.

"저기요, 혹시 2023년 8월 12일 이후에 특별한 일 있었어요?"

"2023년 8월 12일요?"

박민지가 생각했다.


"아... 그때 제가 프로젝트 마감이었는데, 쉬는 시간에 깜빡 졸았어요. 15분 정도."

"네."

"근데 그 후에 중요한 회의가 있었어요. 근데 제가 피곤해서 집중을 못 했어요. 그래서..."

박민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프로젝트를 망쳤어요. 그리고 회사에서 징계받았어요."

"..."

"그게 제 인생의 전환점이었어요. 그 후로 다 꼬였거든요."

서린은 깨달았다.


"그 15분이... 당신한테 정말 필요했던 시간이었구나."

"네. 그 15분만 제대로 쉬었어도... 회의를 잘했을 텐데."

"미안해요. 그걸 누군가 훔쳐갔어요."

"누가요?"

"...친구가요. 살려고."

박민지는 한참을 침묵했다.

"그 친구... 살았어요?"

"아직... 완전히는 아니에요. 근데 거의."

"그럼 됐어요."

박민지가 미소 지었다. 쓸쓸한 미소.

"제 15분이 누군가를 살렸다면, 그것도 의미 있죠."

"하지만 당신은..."

"저는 괜찮아요. 이미 지난 일이에요."

하지만 서린은 알았다. 박민지는 괜찮지 않았다. 그 15분 때문에 인생이 바뀌었다.

그리고 그 15분을 돌려줘도, 이미 벌어진 일은 되돌릴 수 없었다.

"이게... 문제구나."

서린이 중얼거렸다.


6.

밤. 준혁이 나타났다. 여전히 흐릿했다.

"서린 씨... 알아냈어요?"

"네. 알았어요."

서린은 285번째 이야기를 했다. 준혁은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제가... 그 사람 인생을 망쳤군요..."

"준혁 씨 잘못이 아니에요."

"아니에요. 제 잘못이에요. 제가 훔쳤으니까."

준혁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래서 시간이 돌아가지 않는 거예요. 이미 돌이킬 수 없으니까."

"..."

"다른 시간들은 어땠어요?"

서린은 노트를 펼쳤다. 300개의 기록을 다시 살폈다.

대부분은 괜찮았다. 졸던 시간, 멍때리던 시간, 스마트폰 보던 시간. 돌려줘도 큰 차이 없는 시간들.

하지만.

몇 개가 더 있었다. 박민지처럼. 정말 중요했던 시간들.

"12개예요."

서린이 말했다.

"300개 중 12개가... 돌려줄 수 없는 시간이에요. 이미 그 사람들 인생에 영향을 줘서."

"그럼..."

준혁이 떨렸다.

"저는 189개가 아니라... 201개를 더 찾아야 하는 거예요?"

"아니요."

서린이 고개를 저었다.

"그 12개는... 찾아도 소용없어요. 돌려줄 수 없으니까."

"그럼 저는..."

준혁의 형체가 더 흐려졌다.

"완전히 돌아올 수 없는 거네요..."

"..."


"12개의 빚은... 영원히 남는 거네요..."

준혁이 무릎을 꿇었다. 절망에.

"저는... 어떻게 되는 거죠?"

소미가 나타났다. 언제 왔는지 모르게.

"세 가지 선택이 있어."

"뭔데요?"

"첫 번째. 그냥 둔다. 12개의 빚을 안고 살아간다. 그럼 넌 영원히 85% 정도만 실체화된 채로 살아가게 돼."

"두 번째는요?"

"12명한테 다른 보상을 한다. 시간이 아닌 다른 것으로. 그럼 빚이 청산될 수도 있어."

"세 번째는요?"

소미가 준혁을 똑바로 봤다.

"포기한다. 실체화를 포기하고, 시간의 존재로 남는다."

침묵이 흘렀다.

준혁은 서린을 봤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서린은 대답하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7.

그날 밤. 서린은 혼자 걸었다. 한강을 따라.

머릿속이 복잡했다.

'12개의 빚.'

'돌려줄 수 없는 시간.'

'포기해야 하는 건가?'

아니, 포기할 수 없었다. 189개까지 왔는데.

'다른 보상...'

그게 뭘까?

시간이 아닌 것으로 빚을 갚는다?

서린은 멈춰 섰다. 강을 봤다.

달빛이 물에 반짝였다.

그때 깨달았다.

"내 시간..."

그녀가 중얼거렸다.

"내 시간을 주면 되는 거잖아."

12명에게 돌려줄 수 없는 시간. 그럼 서린의 시간을 주면 되는 거였다.

하지만.

그럼 서린은 무엇을 잃는 걸까?

10년치를 이미 잃었다. 더 잃을 게 있을까?

있었다.

미래.

준혁과 함께할 미래.

"..."

서린은 벤치에 앉았다. 고개를 떨구었다.

선택해야 했다.

준혁을 완전히 구하는 것.

아니면 함께할 미래를 지키는 것.

둘 다는 안 됐다.

8.

다음 날 아침. 서린은 소미를 찾아갔다.

"언니. 방법 있어요."

"뭔데?"

"내 시간을 줄게요. 12명한테."

소미는 잠시 놀란 표정이었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왜요?"

"네 시간을 주면, 너의 수명이 줄어들어. 얼마나 줄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줄어."

"괜찮아요."

"괜찮지 않아!"

소미가 소리쳤다.

"너 죽을 수도 있어!"

"그래도..."

"서린아. 정신 차려. 준혁이가 원하는 게 이거야? 네가 죽는 거?"

"준혁 씨는 몰라요. 아직."

"알려줘야지!"

"안 돼요. 알면 반대할 거예요."

서린이 소미를 똑바로 봤다.

"언니, 도와줘요. 이게 유일한 방법이에요."

"다른 방법 있어. 85%로도 충분히..."

"안 돼요. 완전해야 해요."

"왜?"

"그래야 준혁 씨가... 진짜로 살 수 있어요. 평범하게."

서린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게 그 사람이 원하는 거예요. 평범한 삶."

소미는 한참을 서린을 바라봤다.

"넌... 정말 바보야."

"알아요."

"미친 거 아냐?"

"맞아요. 미쳤어요."

서린이 미소 지었다. 눈물 섞인 미소.

"근데 이렇게밖에 못 해요. 나는."

소미는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도와줄게."

"고마워요, 언니."

"근데 조건 있어."

"뭔데요?"

"준혁한테는 나중에 말해. 다 끝나고."

"왜요?"

"그 사람이 알면 절대 안 할 거야. 너도 알잖아."

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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