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채집자 9화 : 틈 사이의 목소리

틈 사이의 목소리

by Rich and Growth

1.

석 달째.

"200번째!"

민우가 환호했다. 서린은 노트에 큰 동그라미를 그었다.

"절반 넘었어요."

"289개 남았어요. 이제 거의 다 왔어요."

그들은 소미의 고물상에서 작은 파티를 열었다. 케이크도 사고, 샴페인도 폈다.

"축하해, 서린아."

소미가 잔을 들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어."

"언니 덕분이에요."

"민우도."

민우가 웃으며 잔을 부딪쳤다.

"우리 모두 덕분이죠."

그들은 웃고 떠들었다. 하지만 한 사람이 없었다.

준혁.

낮에는 나타날 수 없었다. 에너지가 너무 많이 들어서. 밤에만 가능했다.

"준혁 씨한테도 알려줘야죠."

서린이 말했다.

"오늘 밤에 알려줄게요."

"요즘 어때요? 준혁 씨?"

소미가 물었다.

"많이 나아졌어요. 이제 거의 70% 정도는 선명해진 것 같아요."

"다행이네."

"289개만 더 하면... 완전히 돌아올 거예요."

서린의 목소리에 희망이 가득했다.

"그렇게 되길 바라야죠."

소미의 표정은 복잡했다.


2.

그날 밤. 준혁이 나타났다.

"서린 씨!"

"준혁 씨! 200개 됐어요!"

"정말요?"

준혁의 얼굴이 환해졌다. 확실히 선명했다. 이제 거의 실제 사람처럼 보였다.

"이제 절반 넘었어요. 조금만 더 하면..."

서린이 그에게 달려가 안으려다가 멈췄다. 아직도 만질 수 없었다.

"아... 미안해요. 또 깜빡했어요."

"괜찮아요."

준혁이 웃었다.

"곧 만질 수 있을 거예요."

"정말요?"

"느껴져요. 제 몸이 점점 무거워지고 있어요"

"얼마나 남았을까요?"

"잘 모르겠어요. 근데... 틀림없이 가까워지고 있어요."

준혁이 자신의 손을 봤다. 투명했지만, 빛이 달랐다. 더 단단해 보였다.

"서린 씨."

"네?"

"제가... 완전히 돌아오면요."

"네?"

"하고 싶은 게 있어요."

"뭔데요?"

준혁이 서린을 똑바로 봤다.

"당신 손 잡고 싶어요. 진짜로."

서린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나도요. 정말 많이."

"그리고 안고 싶어요."

"네."

"키스도 하고 싶어요."

서린의 얼굴이 붉어졌다.

"준혁 씨..."

"미안해요. 너무 솔직했나요?"

"아니요. 좋아요. 나도... 그러고 싶어요."

그들은 웃었다. 만질 수 없는 거리에서.

"조금만 더요. 조금만 더 기다려요."

"네. 289개. 금방이에요."


3.

하지만 그날 밤 늦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서린이 잠들려는데, 창문이 흔들렸다. 바람도 없는데.

그리고 목소리가 들렸다.

"서린아..."

유진이였다.

서린은 벌떡 일어났다.

"유진아?"

"응... 나야..."

목소리가 희미했다. 창문 틈에서 들렸다.

"어디 있어?"

"틈 사이에... 나 아직... 완전히 가지 못했어..."

"무슨 소리야?"

서린은 창문으로 다가갔다. 틈 사이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나를... 채집했잖아... 근데... 아직 놓지 못했어..."

"무슨 뜻이야?"

"너의... 집착이... 날 묶고 있어..."

유진의 목소리가 괴로워 보였다.

"준혁도... 마찬가지야... 너의 집착이... 그를 묶고 있어..."

"아니야! 나는 준혁 씨 구하려는 거야!"

"구하는 게... 아니야... 붙잡는 거야..."

"무슨 소리야!"

서린의 목소리가 커졌다.

"너는... 두려워해... 또 혼자 남겨질까봐... 그래서... 우릴 놓지 못해..."

"아니야..."

"서린아... 제발... 놓아줘... 준혁도... 나도... 자유롭게 해줘..."

목소리가 사라졌다. 빛도 사라졌다.

서린은 창문 앞에 주저앉았다. 손이 떨렸다.

"아니야... 나는... 구하려는 거야..."

하지만 유진의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너의 집착이 그를 묶고 있어...'


4.

다음 날 아침. 서린은 소미를 찾아갔다.

"언니, 나... 이상한 일이 있었어요."

그녀는 어젯밤 일을 설명했다. 소미는 심각한 표정으로 들었다.

"유진이가 나타났다고?"

"네. 그리고 이상한 말을 했어요. 내가 준혁 씨를 묶고 있다고..."

"그게..."

소미가 말을 잇지 못했다.

"뭐예요? 언니도 뭔가 알고 있는 거예요?"

"서린아. 솔직하게 물어볼게."

소미가 서린을 똑바로 봤다.


"넌 왜 준혁을 구하려는 거야?"

"그야... 사랑하니까요."

"정말?"

"네!"

"다른 이유는 없어?"

"...무슨 뜻이에요?"

소미가 한숨을 쉬었다.

"넌 혹시... 준혁이 완전히 돌아와서, 너랑 평범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당연하죠. 289개만 더 돌려주면..."

"서린아."

소미의 목소리가 낮았다.

"시간 도둑은... 완전히 돌아올 수 없어."

서린은 얼어붙었다.

"무슨... 소리예요?"

"준혁이 훔친 시간의 빚을 청산해도, 그는 완전한 사람으로는 돌아올 수 없어. 최대한 선명해질 수는 있어. 거의 실체처럼. 근데 완전히는..."

"아니에요. 언니가 틀렸어요."

"서린아..."

"틀렸다고요! 언니는 모르는 거예요!"

서린이 소리쳤다.

"나는 준혁 씨 완전히 되돌릴 거예요. 꼭!"

그녀는 고물상을 뛰쳐나갔다. 소미는 그녀를 따라가지 않았다. 그저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볼 뿐.


5.

서린은 미친 듯이 시간을 찾기 시작했다.

하루에 다섯 개. 여섯 개. 일곱 개.

민우가 걱정했다.

"서린 씨,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괜찮아요. 해야 해요."

"왜요? 갑자기 왜 이렇게..."

"시간이 없어요."

서린의 목소리가 절박했다.

"빨리 해야 해요. 289개를."

"천천히 해도 돼요. 우린 잘하고 있어요."

"안 돼요. 빨리."

민우는 더 묻지 못했다. 서린의 눈빛이 너무 불안해 보였다.


일주일.

210번째. 220번째. 230번째.

서린은 밤낮없이 시간을 찾았다. 채집하고 돌려줬다.

잠을 줄이고 끼리는 걸렀다.


준혁이 나타났다.

"서린 씨, 무슨 일 있어요?"

"없어요."

"거짓말. 얼굴 봐요. 완전히..."

"괜찮아요!"

서린이 소리쳤다.

"나는 괜찮아요. 당신만 구하면 돼요."

"서린 씨..."

"259개 남았어요. 조금만 더. 조금만 더요."

준혁은 불안했다. 서린이 다시 무너지고 있었다.

"서린 씨, 멈춰요. 제발."

"안 돼요. 멈출 수 없어요."

"왜요?"

"당신이... 완전히 돌아와야 하니까."

"저는 이 정도로도 충분해요."

"안 돼요! 완전해야 해요!"

서린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만질 수 있어야 해요. 안을 수 있어야 해요. 같이 살 수 있어야 해요!"

"서린 씨..."

"당신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으면... 나는..."

그녀가 주저앉았다.

"나는 또 혼자예요. 또 누군가를 잃는 거예요."

준혁은 그제야 알았다.

서린은 그를 구하는 게 아니었다. 자신을 구하려는 거였다. 혼자 남겨질 두려움에서.

"서린 씨."

준혁이 무릎을 꿇었다. 그녀 앞에.

"저를 보세요."

서린은 눈물 범벅인 얼굴을 들었다.

"저는 여기 있어요. 지금."

"하지만..."

"완전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이 정도로도 충분해요."

"안 돼요..."

"왜 안 돼요?"

"당신이 사라질까봐... 무서워요..."

서린이 울먹였다.

"유진이처럼... 또 놓칠까봐..."

준혁은 서린을 안으려 했지만 만질 수 없었다. 대신 그녀를 투명한 몸으로 감쌌다.


"서린 씨. 사람은 언젠가 다 떠나요."

"...알아요."

"저도 언젠가는 떠날 거예요. 완전히 돌아와도, 결국은."

"싫어요..."

"하지만 지금은 여기 있잖아요. 그걸로 충분하지 않아요?"

서린은 대답하지 못했다.

"제발... 놓아줘요. 저를. 완벽하게 구하려는 집착을."

"그럼... 당신은..."

"저는 괜찮아요. 이대로도. 당신만 괜찮다면."

서린은 준혁의 품 안에서 한참을 울었다.


6.

다음 날. 서린은 소미를 찾아갔다.

"언니... 미안해요. 어제."

"괜찮아. 앉아."

소미가 차를 내왔다.

"정리됐어?"

"아니요. 아직... 혼란스러워요."

서린은 차를 마셨다.

"언니, 솔직하게 말해줘요. 준혁 씨는... 완전히는 못 돌아오는 거예요?"

소미는 한참을 침묵했다.

"99%는 돌아올 수 있어. 거의 실체처럼. 만질 수도 있고, 안을 수도 있고."

"근데 1%는?"

"완전한 사람은 아니야. 시간의 존재야. 언젠가는... 다시 흩어질 거야."

"언제요?"

"모르지. 몇 년 후일 수도, 몇십 년 후일 수도."

서린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럼... 결국 잃는 거네요."

"모든 사랑은 그래. 결국은 잃게 돼. 죽음이든 이별이든."

소미가 서린의 손을 잡았다.

"중요한 건, 지금이야. 함께 있는 이 순간."

"근데 그게... 무서워요."

"알아. 근데 그 무서움 때문에 사랑하지 않을 거야?"

서린은 대답하지 못했다.

"서린아. 유진이도, 준혁이도, 완벽하게 구할 수는 없어. 넌 그냥 사랑할 수밖에 없어. 불완전하게."

"어떻게요?"


"받아들이는 거야. 언젠가는 잃게 된다는 걸..그래도 사랑하는 거야."

소미가 서린을 똑바로 봤다.


"그게 진짜 사랑이야. 완벽하게 소유하는 게 아니라, 불완전하게 함께하는 거."

서린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나는... 할 수 있을까요?"

"할 수 있어. 넌 이미 하고 있어."


7.

그날 밤. 서린은 준혁을 기다렸다.

그가 나타났다. 여전히 투명했지만, 선명했다.

"서린 씨."

"준혁 씨. 앉아요."

그들은 서린의 방에 앉았다. 텅 빈 캐비닛 앞에.

"할 말이 있어요."

서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뭔데요?"

"나는... 당신을 완벽하게 구하려고 했어요. 489개 전부 돌려주고, 당신을 완전한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어요."

"알아요."

"근데 그게... 나 때문이었어요. 당신 때문이 아니라."

서린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무서웠어요. 또 혼자 남겨질까봐. 유진이처럼 당신도 잃을까봐."

"서린 씨..."

"미안해요. 나는 당신을 구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당신을 붙잡으려고 한 거예요."

눈물이 흘렀다.

"이기적이었어요."

준혁은 서린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니에요. 당신은 충분히 잘했어요."

"아니에요..."

"서린 씨. 저를 보세요."

서린이 고개를 들었다.

"저는 고마워요. 당신이 저를 사랑해줘서. 불완전한 저를."

"준혁 씨..."

"그리고 저도 사랑해요. 불완전한 당신을."

준혁이 미소 지었다.


"우리 그냥 그렇게 하면 안 될까요? 불완전하게 사랑하는 거."

서린은 한참을 그를 바라봤다.

"259개... 계속할까요?"

"당신이 원하면요. 근데 천천히. 무리하지 말고."

"완전히 돌아오지 못해도... 괜찮아요?"

"괜찮아요. 당신만 있으면."

서린은 눈물을 닦고 미소 지었다.

"알았어요. 그럼 천천히 할게요. 259개."

"고마워요."

"하나 조건이 있어요."

"뭔데요?"

서린이 손을 내밀었다.


"만질 수 있게 되는 순간, 제일 먼저 할 거예요."

"뭘요?"

"키스."

준혁의 얼굴이 붉어졌다.

"약속해요."

"약속이에요."

그들은 웃었다. 만질 수 없는 거리에서.

하지만 마음은 닿아 있었다.

8.

그날 밤 늦게. 창문 틈에서 다시 빛이 새어 나왔다.

유진의 목소리.

"잘했어, 서린아..."

"유진아?"

"이제... 놓아줄 수 있겠어...?"

"응. 조금씩."

"고마워... 이제 나는... 갈 수 있어..."

"어디로?"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시간의 끝으로..."

유진의 목소리가 평화로웠다.

"행복해, 서린아. 준혁이랑."

"응. 나도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이미 행복해... 너를 봤으니까... 마지막으로..."

빛이 사라졌다. 이번엔 완전히.

서린은 창문에 손을 댔다.


"잘 가, 유진아. 사랑해."

바람이 불었다. 따뜻한 바람.

작별의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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