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9개
1.
한 달 후.
한서린은 노트에 체크 표시를 했다. 빨간 줄이 하나 더 그어졌다.
"47번째."
민우가 옆에서 말했다.
"489개 중 47개. 10분의 1도 안 됐네요."
"그래도 47개예요. 하나도 아니고."
서린은 노트를 덮었다. 그들은 카페에 앉아 있었다. 준혁이 일했던 카페, 이제는 다른 바리스타가 일하고 있었다.
"피곤해 보여요."
민우가 말했다.
"괜찮아요."
"괜찮지 않아 보이는데."
민우가 서린의 얼굴을 자세히 봤다. 다크서클이 짙고, 살도 빠진 것 같았다.
"밤에 잠 못 자요?"
"조금요."
"왜요?"
"채집하느라요. 밤에 시간이 더 선명하게 보여서."
서린은 커피를 마셨다. 식어 있었다.
"한 달에 47개면... 1년이면 564개. 489개는 1년도 안 걸려요."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민우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이 쓰러질 것 같아요. 이 속도로 가면."
"안 쓰러져요."
"서린 씨."
민우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쉬어야 해요. 당신도 사람이에요."
"시간이 없어요. 준혁 씨가..."
"준혁 씨는 기다릴 수 있어요. 당신이 쓰러지는 것보단."
서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을 봤다.
거리 끝에 준혁이 서 있었다. 여전히 투명했지만, 한 달 전보다는 선명했다. 47개의 시간 덕분에.
그가 손을 흔들었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준혁 씨도 걱정하고 있어요. 당신을."
민우가 말했다.
"그 사람한테 물어봤어요. 어제. 당신 괜찮냐고."
"뭐래요?"
"걱정된대요. 당신이 너무 무리하는 것 같다고."
서린은 미소 지었다. 쓸쓸한 미소.
"근데 멈출 수가 없어요. 멈추면... 무너질 것 같아요."
"뭐가요?"
"나. 내가."
서린의 목소리가 떨렸다.
"10년치를 잃었잖아요. 내 정체성을. 이제 이것밖에 없어요. 준혁 씨 구하는 것."
민우는 서린을 안타깝게 봤다.
"서린 씨는 그것보다 많은 사람이에요."
"아니에요. 나는..."
"충분해요. 당신은 충분히 가치 있어요. 준혁 씨 구하든 안 구하든."
서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나는 이걸 해야 해요. 그래야..."
그녀가 말을 잇지 못했다. 눈물이 흘렀다.
민우는 조용히 그녀를 안았다.
"울어도 돼요. 괜찮아요."
서린은 민우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한참을.
2.
그날 저녁, 소미의 고물상.
"이러다 큰일 나겠어."
소미가 말했다. 서린은 바닥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뭐가요?"
"너. 번아웃 온다."
"아니에요."
"눈 봐. 초점도 없어."
소미가 서린의 턱을 들어 얼굴을 봤다.
"체중도 5킬로는 빠진 것 같고."
"괜찮아요. 먹고 있어요."
"거짓말. 민우한테 들었어. 요즘 제대로 밥도 안 먹는다고."
서린은 고개를 돌렸다.
"배가 안 고파서요."
"서린아."
소미가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왜 이렇게까지 해? 준혁이 원하는 게 이게 아니잖아."
"언니는 몰라요."
"뭘?"
"나는... 또 놓칠까봐 무서워요."
서린의 목소리가 떨렸다.
"10년 전 유진이 놓쳤잖아요. 그때 후회하면서 살았어요. 이번에도 준혁 씨 놓치면..."
"안 놓쳐. 천천히 해도 돼."
"안 돼요. 시간이 없어요. 준혁 씨가 언제 완전히 사라질지 몰라요."
"그래도 네가 쓰러지면 소용없잖아."
"안 쓰러져요."
"고집 피우지 마."
소미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넌 지금 자멸하고 있어. 누군가를 구한답시고 너 자신을 죽이고 있어."
"나는..."
"유진이 원했던 게 이거야? 네가 이렇게 사는 거?"
서린은 대답하지 못했다.
"준혁이도 마찬가지야. 그 사람이 네게 뭐라고 했어? 살라고 했잖아. 진짜로."
"알아요..."
"그럼 살아. 채집만 하지 말고."
소미가 서린의 손을 잡았다.
"1주일만 쉬어. 제발. 아무것도 하지 말고."
"안 돼요..."
"1주일. 그것도 못 해?"
서린은 한참을 침묵했다. 그리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3.
1주일 간의 강제 휴식.
소미는 서린의 채집 도구를 모두 빼앗았다. 바이알, 노트, 심지어 핸드폰도.
"민우한테도 연락했어. 1주일간 서린이 못 만난다고."
"언니..."
"더 이상 말하지마. 넌 쉬는 거야."
서린은 할 수 없이 집에 있었다. 텅 빈 캐비닛 앞에 앉아.
첫날은 괜찮았다.
둘째 날부터 불안했다.
셋째 날은 지옥 같았다.
'준혁 씨는 괜찮을까?'
'시간이 흐를수록 더 사라지는 거 아닐까?'
'나는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서린은 창밖을 봤다. 거리에 준혁이 서 있었다. 멀리서.
그는 매일 나타났다. 서린을 보기 위해.
넷째 날. 서린은 견딜 수 없었다. 밖으로 나갔다.
"준혁 씨!"
그가 돌아봤다. 미소 지었다.
"서린 씨. 쉬고 있는 거 아니었어요?"
"쉬고 있어요. 그냥 산책."
"거짓말. 얼굴에 다 써있어요."
준혁이 다가왔다. 여전히 투명했지만, 한 달 전보다는 확실히 나아 보였다.
"괜찮아요?"
서린이 물었다.
"네. 괜찮아요."
"더 사라지지 않았어요?"
"오히려 조금 나아진 것 같아요. 47개 덕분에."
"다행이다..."
서린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근데 서린 씨는 괜찮아요?"
"저요? 당연히 괜찮죠."
"거짓말."
준혁이 그녀를 똑바로 봤다.
"얼굴 봐요. 완전히 지쳐 있잖아요."
"괜찮아요..."
"서린 씨."
준혁의 목소리가 진지했다.
"멈춰도 돼요."
"네?"
"저 구하는 거. 멈춰도 돼요."
서린은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당신 구해야 해요."
"당신이 쓰러지는 것보다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해요! 당신은 중요해요!"
서린의 목소리가 커졌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쳐다봤다. 혼자 소리치는 여자를.
준혁은 그들이 자신을 보지 못한다는 걸 알았다.
"앉아요."
그가 근처 벤치를 가리켰다. 서린은 따라갔다. 앉았다.
준혁은 앉을 수 없었다. 투명한 몸은 물리적 접촉이 안 됐으니까. 그는 서서 서린을 봤다.
"서린 씨, 솔직하게 말할게요."
"뭔데요?"
"저는 사라져도 괜찮아요."
"무슨 소리예요!"
"진짜예요. 저는 이미... 보너스 시간을 살았어요. 3년이나. 그것만으로도 감사해요."
"하지만..."
"그리고 마지막에 의미 있는 일도 했어요. 민우 씨 구했고, 당신 만났고, 스위스도 갔고."
준혁이 미소 지었다.
"후회 없어요. 정말로."
"나는 후회해요."
서린이 말했다.
"나는 후회할 거예요. 당신 구하지 못하면."
"왜요? 당신 잘못이 아닌데."
"유진이 때처럼 될 거예요. 또 10년 후회하면서 살 거예요."
서린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나는... 또 놓치고 싶지 않아요."
준혁은 한참을 그녀를 봤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서린 씨. 저는...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행복해요. 당신 구하면."
"그게 아니에요. 저 없이도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무슨 소리예요?"
"당신은 충분해요. 누군가를 구하지 않아도.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지 않아도."
준혁의 형체가 희미해졌다. 에너지가 다 된 것 같았다.
"제발... 당신 자신을 아껴요..."
그는 사라졌다.
서린은 빈 공간을 바라봤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데..."
4.
일주일이 지났다. 소미가 도구들을 돌려줬다.
"어때? 좀 나아졌어?"
"네... 감사해요, 언니."
서린의 얼굴에는 조금 생기가 돌아왔다. 잠도 푹 잤고, 밥도 제대로 먹었다.
"이제 다시 시작할 거야?"
"네. 근데 이번엔... 천천히 할게요."
"다행이네."
소미가 차를 내왔다.
"그리고 혼자 하지 마. 민우도 있고, 나도 있고."
"알아요."
서린은 노트를 펼쳤다. 47개. 아직 442개가 남아 있었다.
"하나씩 하면 돼. 서두르지 말고."
"네."
그날부터 서린은 속도를 조절했다. 하루에 세 개씩.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민우가 도왔다. 그는 낮에 시간이 있었다. 일부러 시간을 만들었다.
"제가 찾아볼게요. 이 사람."
민우가 노트를 보며 말했다.
"감사해요."
"아니에요. 저도 하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그들은 팀을 이뤘다. 민우가 사람을 찾고, 서린이 시간을 채집하고 돌려줬다.
48번째. 49번째. 50번째.
한 명 한 명. 천천히.
어떤 사람들은 고마워했다.
"이게... 제 시간이었군요. 고마워요."
어떤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이게 대체 뭔가요?"
어떤 사람들은 거부했다.
"필요 없어요. 가져가세요."
하지만 서린은 포기하지 않았다. 설득하고 설명했다. 이해시켰다.
그리고 하나씩 돌려줬다.
5.
두 달째.
"95번째요."
민우가 체크했다.
"거의 100개네요."
"네. 다음 주면 100개."
서린은 미소 지었다. 피곤했지만, 예전처럼 탈진하지는 않았다.
"준혁 씨는 어때요?"
"많이 나아졌어요. 이제 거의 반쯤 선명해진 것 같아요."
"다행이네요."
그들은 카페에 앉아 있었다. 요즘 매일 만나는 루틴이 생겼다.
"서린 씨."
"네?"
"하나 물어봐도 돼요?"
"뭔데요?"
민우가 망설이다가 물었다.
"준혁 씨한테... 특별한 감정 있어요?"
서린은 커피를 마시다 멈췄다.
"무슨 뜻이에요?"
"그냥... 궁금해서요. 당신이 준혁 씨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거 보면..."
"친구예요. 그냥 친구."
"정말요?"
"네."
하지만 서린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지 않았다.
민우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말했다.
"준혁 씨, 행운아예요."
"왜요?"
"당신 같은 사람 만나서."
서린은 얼굴이 붉어졌다.
"민우 씨는 오해하는 것 같은데..."
"오해 아니에요. 저는 보여요. 당신이 그 사람 볼 때 눈빛."
"무슨 눈빛인데요?"
"사랑하는 사람 보는 눈빛."
서린은 대답하지 못했다.
사랑?
준혁을?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처음으로 들여다봤다.
'나는 준혁 씨를...'
6.
그날 밤. 준혁이 나타났다.
"서린 씨."
"준혁 씨."
그는 확실히 선명해졌다. 이제 거의 반쯤 사람처럼 보였다.
"95개까지 왔다며요?"
"네. 들었어요?"
"민우 씨한테. 고마워요."
"당연한 걸요."
그들은 나란히 걸었다. 밤거리를. 준혁은 걸을 수 있었다. 투명하지만.
"서린 씨."
"네?"
"저... 하나 고백할 게 있어요."
"뭔데요?"
준혁이 멈춰 섰다. 서린도 멈췄다.
"저는... 당신이 좋아요."
서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네?"
"사랑해요. 서린 씨."
준혁의 목소리는 떨렸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아니, 어쩌면 빌딩 지하에서 민우 씨 발견했을 때부터."
"준혁 씨..."
"말 안 하려고 했어요. 제 처지가 처지니까. 투명한 유령 같은 존재가 무슨..."
"아니에요."
서린이 그의 말을 끊었다.
"당신은 유령이 아니에요."
"하지만..."
"사람이에요. 제게는."
서린이 손을 뻗었다. 만질 수는 없었지만, 손을 뻗었다.
"나도... 당신이 좋아요. 준혁 씨."
준혁의 눈이 커졌다.
"정말요?"
"네. 언제부턴가. 모르겠어요. 근데 지금은 확실해요."
서린이 미소 지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준혁의 형체가 밝게 빛났다. 감정이 강렬해서.
"저를... 사랑해요?"
"네."
"저는 곧 사라질지도 모르는데..."
"상관없어요. 지금이 중요해요."
서린이 손을 뻗어 준혁의 뺨을 만지려 했다. 만질 수는 없었지만, 따뜻함이 느껴졌다.
"당신이 완전히 사라진다 해도, 후회 안 해요. 당신을 사랑한 걸."
준혁은 울었다. 투명한 눈물이 흘렀다.
"고마워요... 정말로..."
그들은 만질 수 없는 채로 서로를 안았다.
투명한 몸과 실제 몸.
하지만 마음은 닿아 있었다.
7.
그날 이후, 모든 게 달라졌다.
서린은 더 이상 강박적으로 시간을 쫓지 않았다. 천천히, 확실하게 하나씩.
준혁은 매일 밤 나타났다. 그들은 데이트를 했다. 투명한 남자와 실제 여자의 데이트.
영화관에 갔다. 준혁만 공짜였다. 아무도 그를 보지 못했으니까.
"이거 사기 아니에요?"
서린이 웃었다.
"사기죠. 근데 기분 좋은 사기."
공원을 걸었다. 손을 잡을 수는 없었지만, 나란히 걸었다.
"이런 게 데이트구나..."
준혁이 중얼거렸다.
"처음이에요?"
"네. 저는... 아플 때부터 시간 도둑이었으니까. 연애 같은 거 할 겨를이 없었어요."
"지금 하잖아요."
"네. 행복해요."
100번째 시간을 돌려준 날, 그들은 한강에 갔다.
"100개요."
서린이 노트에 체크했다.
"389개 남았어요."
"많이 왔네요."
준혁이 강을 봤다. 달빛이 물에 반짝였다.
"서린 씨."
"네?"
"저...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뭔데요?"
"만약 제가 완전히 사라지게 되면..."
"안 사라져요."
"만약이요. 만약. 그럼..."
준혁이 서린을 봤다.
"저를 채집해줘요. 마지막 순간을."
"싫어요."
"서린 씨."
"싫어요. 당신 안 사라져요. 내가 끝까지 구할 거예요."
서린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389개. 다 찾을 거예요. 하나도 안 놓치고."
준혁은 서린을 투명한 팔로 안았다.
"고마워요. 당신을 만나서."
"나도요."
그들은 한강을 보며 서 있었다.
투명한 남자와 안 그런 여자.
하지만 그 누구보다 진짜인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