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채집자 7화 : 균열

균열

by Rich and Growth

1.

일주일 후.

한서린은 카페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었다. 홍대 거리. 각자의 시간을 살며 사람들이 바쁘게 오갔다.

그녀의 눈에는 이제 시간의 밀도가 예전만큼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10년치 채집물을 풀어낸 후, 그녀의 능력도 약해진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의도적으로 보지 않으려는 것일지도 몰랐다.


"서린 씨?"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민우였다.

정장 대신 편한 옷을 입고 있었다. 얼굴에는 미소가 있었다. 3년 만에 진짜 자유로워진 사람의 얼굴.

"앉으세요."

민우가 앞자리에 앉았다. 커피를 주문했다.

"어떻게 지내세요?"

"잘 지내고 있어요. 당신은요?"

"저도요. 천천히... 적응하고 있어요."

민우가 창밖을 봤다.

"이상해요. 시간이 정상적으로 흐르는 게. 45초가 3년이었는데, 이제는 하루가 하루만큼 느껴져요."

"좋은 거죠?"

"네. 좋아요. 근데 가끔은... 무서워요."

"뭐가요?"

"다시 그렇게 될까봐. 시간에 쫓겨서 살다가, 또 갇힐까봐."

민우가 서린을 봤다.

"그래서 천천히 살려고 해요. 의도적으로."

"어머니 장례는... 잘 치렀어요?"

"네. 혼자였지만요. 친척들은 다 연락이 끊겼더라고요. 3년간 실종됐으니까."

민우의 목소리에 쓸쓸함이 묻어났다.

"근데 괜찮았어요. 엄마한테 제대로 작별 인사했으니까. 늦었지만."

"수진 씨도 만났어요?"

"네. 어제. 그분 작업실에 갔어요."

"어땠어요?"

"울었어요. 둘 다. 20년 만에 다시 만났는데, 할 말이 너무 많았어요."

민우가 미소 지었다.

"데이트 약속 잡았어요. 이번엔 안 취소할 거예요."

"잘됐네요."

"준서한테도 연락했어요. 처음엔 놀라더라고요. 유령인 줄 알았대요."

민우가 웃었다.

"다음 주에 만나기로 했어요. 같이 여행 계획 세우려고요. 20년 늦은."

서린은 민우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가 살아가고 있었다. 진짜로.

"서린 씨."

"네?"

"준혁 씨 얘기 좀 해도 돼요?"

서린의 미소가 사라졌다.

"그 사람... 어디 있어요?"

"사라졌어요. 비행기에서."

"알아요. 근데 정말로 사라진 건가요?"

서린은 가방에서 작은 바이알을 꺼냈다. 텅 비어 있었다. 준혁의 빛을 민우에게 보낼 때 함께 보냈으니까.

"여기 있었어요. 그의 마지막이. 근데 이제는..."

"제 안에 있어요."

민우가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느껴져요. 그 사람의 시간이. 따뜻하고 짧지만 의미 있었던 시간이."

"...그렇군요."

"서린 씨도 느껴야 해요."

"뭘요?"

"그 사람이 당신한테 뭘 남겼는지."

민우가 서린의 손을 잡았다.

"준혁 씨는 사라지지 않았어요. 우리 안에 있어요. 당신 안에도."

서린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러면 좋겠어요..."


2.

그날 저녁. 서린은 소미의 고물상을 찾아갔다.

"왔어?"

소미가 차를 내왔다.

"민우 만났어요."

"어떻더라?"

"좋아 보였어요. 진짜로 자기 삶을 살고 있었어요."

"다행이네."

소미가 서린을 뚫어지게 봤다.

"근데 넌 왜 그렇게 안 좋아 보여?"

"그래요?"

"응. 일주일 전보다 더 안 좋아. 무슨 일 있어?"

서린은 차를 마시며 한참을 침묵했다.

"언니, 나... 이상해요."

"뭐가?"

"채집물을 다 풀어냈잖아요. 10년치를. 근데..."

"근데?"

"공허해요. 너무."

서린의 목소리가 떨렸다.

"10년간 내가 한 게 전부 사라진 것 같아요. 내 의미가 사라진 것 같아요."

소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했어."

"네?"


"넌 10년간 채집에 정체성을 뒀어. 그게 사라지니까 공허한 거야."

"그럼 어떻게 해요?"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야지."

"뭘요?"

"모르지. 그건 네가 찾아야 해."

소미가 서린의 손을 잡았다.

"근데 서린아, 하나 말해줄게."

"뭔데요?"

"넌 이미 시작했어. 채집이 아닌 다른 걸. 민우 구한 거, 준혁 도운 거, 유진이 놓아준 거. 그게 다 새로운 시작이야."

"그런가요?"

"응. 넌 이제 채집자가 아니야. 시간을 살리는 사람이야."

서린은 그 말을 곱씹었다.


시간을 살리는 사람.

"근데 언니."

"응?"

"이상한 게 하나 더 있어요."

"뭔데?"

"가끔... 준혁 씨가 보여요."

소미의 표정이 굳었다.

"어디서?"

"거리에서. 카페에서. 지하철에서. 멀리서 스쳐 지나가는 것 같은데, 가까이 가면 없어요."

"환영이겠지."

"그런가요?"

"응. 네가 그 사람을 그리워하니까."

하지만 소미의 얼굴에는 뭔가 다른 표정이 있었다. 걱정이 아닌..불안안 표정.

3.

그날 밤. 서린은 잠들지 못했다.

준혁의 얼굴이 계속 떠올랐다. 비행기에서 사라지던 그 순간.

"고마워요... 서린 씨..."

그의 마지막 말.

서린은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밤공기가 들어왔다.

거리를 내려다봤다. 텅 빈 거리. 가로등 불빛만 깜빡였다.

그때였다.

거리 끝에 누군가 서 있었다.

가로등 아래. 희미한 형체.

서린은 눈을 크게 떴다.

준혁이었다.

아니, 준혁처럼 보였다.

투명한 몸. 흐릿한 윤곽.

그가 서린을 올려다봤다. 손을 흔들었다.

"준혁 씨?!"

서린은 소리쳤다.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거리로 나왔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준혁 씨!"

대답이 없었다.

서린은 거리를 이리저리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환영이었나..."

그녀가 중얼거리며 돌아서려는데,

"서린 씨."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서린은 얼어붙었다. 천천히 돌아봤다.

준혁이 거기 서 있었다.

투명한 몸으로. 희미하게 빛나는.

"준혁 씨... 당신..."

"네. 저예요."

"어떻게...? 당신 사라졌잖아요..."

"사라졌어요. 근데... 완전히는 아니에요."

준혁이 다가왔다. 서린은 손을 뻗었다. 만질 수 없었다. 손이 그를 통과했다.

"유령이에요?"

"비슷한 거요. 시간의 잔향이에요."

"무슨 소리예요?"

준혁이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제가 훔친 시간들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어요. 일부가 남아서... 저를 이 형태로 묶어뒀어요."

"그럼..."

"저는 완전히 사라질 수도, 완전히 남을 수도 없어요. 그 사이에 갇혀 있어요."


서린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안 돼... 당신 고통받고 있는 거예요?"

"아니요. 고통은 없어요. 그냥... 존재해요. 희미하게."

준혁이 미소 지었다.

"근데 이것도 나쁘지 않아요. 완전히 사라지는 것보단."

"언제까지 이렇게 있어요?"

"모르겠어요. 아마 제 시간의 빚이 완전히 청산될 때까지요."

"얼마나 걸려요?"

"모르겠어요. 몇 달? 몇 년? 아니면..."

준혁의 형체가 흔들렸다.

"영원히?"

서린은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이렇게 둘 순 없어요."

"괜찮아요."

"안 괜찮아요! 당신 또 갇혀 있는 거잖아요!"

"민우 씨처럼은 아니에요. 전 자유로워요. 이렇게 움직일 수도 있고, 당신 만날 수도 있고."

"하지만..."

"서린 씨."

준혁이 서린의 얼굴 가까이 다가왔다. 만질 수는 없었지만, 따뜻함이 느껴졌다.

"저는 괜찮아요. 정말로. 이것도 제 시간이에요. 남은."

"준혁 씨..."

"당신은 살아요. 진짜로. 저 대신."

준혁의 형체가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또 사라지는 거예요?"

"잠깐만요. 힘을 아껴야 해서요. 나타나는 데 에너지가 많이 들어요."

"언제 다시 볼 수 있어요?"

"모르겠어요. 근데... 볼 거예요. 가끔. 지켜보고 있을게요."

"준혁 씨!"

하지만 그는 사라졌다. 빛이 되어.

서린은 빈 거리에 홀로 섰다.

바람이 불었다. 차가웠다.

4.

다음 날 아침. 서린은 소미를 찾아갔다.

"준혁 씨 봤어요."

소미는 차를 내리던 손을 멈췄다.

"어디서?"

"우리 집 앞에서. 어젯밤."

"확실해?"

"네. 대화도 했어요. 그 사람...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어요."

소미는 한참을 침묵했다.

"그럴 줄 알았어."

"언니도 알았어요?"

"예상은 했어. 준혁 같은 경우는... 시간 도둑이었잖아. 훔친 시간의 빚이 너무 커."

"그럼 어떻게 해요?"


"두 가지 방법이 있어."

소미가 오래된 노트를 꺼냈다.

"첫 번째. 그냥 둔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사라질 거야. 몇 년 걸리겠지만."

"두 번째는요?"

"빚을 청산한다. 준혁이 훔친 시간들을 찾아서 원래 주인들한테 돌려준다."

"그게 가능해요?"

"가능해. 근데 쉽지 않아."

소미가 서린을 봤다.

"준혁이 3년간 훔친 시간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수백, 수천 개야. 그걸 다 찾아서 돌려주는 건..."

"할게요."

서린이 단호하게 말했다.

"준혁 씨 구할 거예요. 완전히."

"그럼 또 네 시간을 써야 해. 이번엔 10년치도 없는데."

"괜찮아요. 지금부터 다시 채집하면 돼요."

"서린아..."


"언니, 나 이제 알았어요. 내가 왜 시간을 채집하는지."

서린의 눈이 반짝였다.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서예요. 채집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걸로 누군가를 구하는 게 목적이에요."

소미는 서린을 한참 바라봤다.

"많이 컸네. 진짜로."

"도와주실 거예요?"

"당연하지. 근데 조건이 있어."

"뭔데요?"

"이번엔 혼자 하지 마. 도움 받아. 민우한테도, 나한테도."

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5.

그날 오후. 서린은 민우를 다시 만났다.

"준혁 씨가 살아있어요."

민우는 커피를 마시다 멈췄다.

"뭐라고요?"

서린은 어젯밤 일을 설명했다. 민우는 조용히 들었다.

"시간의 잔향..."

"네. 완전히 사라지지도, 완전히 남지도 못한 채 갇혀 있어요."

"그럼 어떻게...?"

"구해야 해요. 그 사람이 훔친 시간들을 찾아서 돌려주면 돼요."

민우는 한참을 생각했다.

"저도 돕고 싶어요."

"정말요?"

"네. 그 사람이 저 구해줬잖아요. 이번엔 제 차례예요."

민우가 서린을 봤다.

"근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요? 3년치를 어떻게 찾아요?"


"기록이 있어요. 준혁 씨가 남긴."

서린은 가방에서 작은 노트를 꺼냈다. 준혁의 것이었다. 그가 사라지기 전 서린에게 준.

"이게 뭐예요?"

"준혁 씨의 일기예요. 그 사람이 어디서, 누구한테서, 얼마나 훔쳤는지 다 적혀 있어요."

민우는 노트를 펼쳤다. 빼곡한 글씨들.


2022년 3월 7일. 지하철 2호선. 30대 남성. 졸고 있던 5분.

2022년 3월 10일. 강남역 스타벅스. 20대 여성. 스마트폰 보던 7분.

2022년 3월 15일. 타임웰 컨설팅. 강민우. 점심시간 혼자 먹는 밥 10분.

민우는 자신의 이름을 보고 멈췄다.

"여기... 저도 있네요."

"네. 그 사람이 가장 많이 훔친 게 당신한테서였어요."

민우는 계속 페이지를 넘겼다. 수백 개의 기록들.

"이걸 다 찾는다고요?"

"네. 하나씩."

"얼마나 걸릴까요?"

"모르겠어요. 몇 달? 몇 년?"

서린이 민우를 봤다.

"그래도 할 거예요. 준혁 씨를 위해서."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같이해요."

6.

일주일 후. 서린, 민우, 소미는 첫 번째 대상을 찾아갔다.

2022년 3월 7일. 지하철 2호선. 30대 남성. 졸고 있던 5분.

노트의 기록을 바탕으로 추적했다. CCTV, 교통카드 기록, 목격자 진술.

그리고 찾았다.

강남구 IT 회사에 다니는 김태훈. 35세.

서린은 그의 회사 앞에서 기다렸다. 퇴근 시간.

"저 사람이에요."

민우가 가리켰다. 피곤한 얼굴의 남자가 나왔다.

"김태훈 씨?"

"네? 누구세요?"

"저희는... 시간 회복 센터에서 나왔습니다."

서린이 급조한 거짓말을 했다.

"시간 회복 센터요?"

"네. 당신이 잃어버린 시간을 돌려드리려고요."

"무슨 소리예요?"

서린은 노트를 보여줬다.


"2022년 3월 7일. 지하철에서 졸고 있을 때. 5분을 잃어버렸어요."

김태훈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게... 뭐 문제라도 돼요?"

"그 5분이 당신한테 필요해요. 제대로 된 휴식이었으니까."

서린은 바이알을 꺼냈다. 텅 비어 있었다.

"지금부터 채집할게요. 당신이 가졌어야 할 5분을."

"이게 무슨..."

하지만 서린은 이미 시작했다. 눈을 감았다. 집중했다.

3년 전. 지하철. 피곤한 남자. 깜빡 졸던 순간.

그 시간을 느꼈다. 공기 중에 남아 있는 흔적을.

그리고 채집했다.

바이알 안에 희미한 빛이 담겼다. 피곤함이 녹아내리는 5분.

"이걸 받으세요."

서린이 김태훈에게 병을 내밀었다.

"이게... 뭔데요?"

"당신 시간이에요. 돌려드리는 거예요."

김태훈은 반신반의하며 병을 받았다.

순간, 그의 얼굴이 변했다.

"이게..."

따뜻함이 느껴졌다. 가슴속으로 스며드는.

3년 전 잃어버렸던 휴식. 그것이 돌아왔다.

"뭐예요... 이 기분..."

"당신 시간이에요. 이제 당신 거예요."

서린은 미소 지었다.

"잘 쓰세요."

그들은 떠났다. 김태훈은 멍하니 병을 쥐고 서 있었다.

7.

그날 밤. 서린의 집 앞.

준혁이 나타났다. 여전히 투명했지만, 조금 더 선명해 보였다.

"서린 씨."

"준혁 씨! 보여요?"

"네. 조금요."

"우리 시작했어요. 당신이 훔친 시간들 돌려주는 거."

준혁은 놀란 표정이었다.

"정말요?"

"네. 오늘 첫 번째. 김태훈 씨. 기억나요?"

"아... 지하철에서..."

"네. 그 사람한테 5분 돌려줬어요."

준혁의 형체가 조금 더 선명해졌다. 눈에 띄게.

"느껴져요. 가벼워진 게."

"진짜요?"

"네. 조금이지만... 분명히 달라졌어요."

준혁이 서린을 봤다. 눈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 투명한 눈물.

"고마워요..."

"고마워하긴요. 당신이 우리 구해줬잖아요."

"그래도..."

"이제 우리 차례예요. 당신 구할 차례."

서린이 노트를 꺼냈다.


"489개 남았어요. 하나씩 찾아서 돌려줄 거예요."

"그렇게 많은데..."

"괜찮아요. 민우 씨도 돕고 있어요. 소미 언니도."

"민우 씨가...?"

"네. 당신 덕분에 나왔다고, 이번엔 자기 차례라고 했어요."

준혁은 한참을 말없이 서 있었다.

"저는... 복받은 사람이네요."

"우리도요. 당신 만나서."

이전 06화시간 채집자 6화 : 시간 도둑의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