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채집자 6화 : 시간 도둑의 그림자

시간 도둑의 그림자

by Rich and Growth

1.

스위스 인터라켄. 밤 11시.

호스텔 작은 방. 서린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옆 침대에서는 준혁이 잠들어 있었다. 아니, 잠든 것처럼 보였다. 그의 숨소리가 너무 약했다.

서린은 조용히 일어나 창가로 갔다. 밖으로 알프스의 실루엣이 보였다. 달빛 아래 거대한 검은 그림자.

가방에서 바이알 네 개를 꺼냈다. 아버지의 사랑, 첫사랑의 봄날, 어머니의 생일, 친구의 석양. 모두 빛나고 있었다.

"네 개..."

서린이 중얼거렸다.

"얼마나 더 필요한 거지?"

"최소 두 개는 더."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준혁이었다. 일어나 있었던 것이다.

"깨웠어요?"

"아니요. 원래 잠 안 와요. 요즘은."

준혁이 창가로 왔다. 그의 몸은 달빛에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투명했다.

"소미 언니가 그러던데, 민우 씨 정도면 여섯 개에서 일곱 개 정도 필요할 거래요."

"그럼 아직 멀었네요."

"네."

둘은 말없이 창밖을 봤다.

"준혁 씨."

"네?"

"솔직하게 말해줘요. 얼마나 남았어요?"

준혁은 한참을 침묵했다.

"일주일. 길어야."

서린의 손이 떨렸다.

"병원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병원이 뭘 해줄 수 있겠어요. 이건 병이 아니에요. 시간의 빚이에요. 제가 훔친 시간들이 저를 집어삼키고 있는 거예요."

"그럼..."

"괜찮아요."

준혁이 미소 지었다.

"이미 3년을 더 살았어요. 보너스였어요. 그리고..."

그가 바이알들을 봤다.

"이런 것도 했잖아요. 누군가를 도왔잖아요. 나쁘지 않은 마무리인 것 같아요."

"마무리라니. 아직 끝난 게 아니에요."

"서린 씨."

준혁이 그녀를 똑바로 봤다.

"저는 괜찮아요. 받아들였어요. 근데 당신은... 소미 씨가 말한 거 생각해봤어요?"

"뭘요?"

"10년치 채집물을 전부 내놓는 거. 그거 진짜 할 거예요?"

서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10년이에요. 당신 인생의 10년. 그걸 포기하는 거예요."

"알아요."

"후회 안 해요?"

"모르겠어요."

서린이 솔직하게 말했다.

"무서워요. 10년이 사라지는 게. 근데..."

그녀가 바이알들을 봤다.

"이 시간들을 보면, 생각해요. 내가 10년간 뭘 했나. 채집만 했지, 살지는 않았구나."

"그래도..."

"준혁 씨는 6개월 남았다고 했잖아요. 근데 지난 3일이 가장 의미 있었다고 했잖아요."

서린이 준혁의 손을 잡았다.


"그럼 됐어요. 양이 아니라 질이에요. 시간은."

준혁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당신은... 정말 특별한 사람이에요."

"나도 알아요."

둘은 조용히 웃었다.


2.

다음 날 아침. 서울로 돌아가는 비행기.

준혁의 상태가 더 나빠졌다. 얼굴외에 몸의 절반이 투명해졌다. 서린의 목소리가 커졌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쳐다봤다. 혼자 소리치는 여자를.


"괜찮아요?"

"괜찮아요. 그냥 피곤할 뿐이에요."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희미했다. 바람 소리 같았다.

비행기 안 준혁은 거의 잠들어 있었다. 아니, 잠든 게 아니라 사라지고 있었다.

서린은 그의 손을 잡았다. 느낌이 없었다. 안개를 만지는 것 같았다.

"안 돼..."

그녀가 속삭였다.

"아직 안 돼. 조금만 더 버텨줘."

준혁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서린 씨..."

"네?"

"민우 씨한테... 전해줘요. 미안하다고. 그리고 고맙다고."

"직접 말해요. 우리 도착하면 바로 갈 거예요."

"못 갈 것 같아요."

"왜요?"

"느껴져요. 끝이."

"안 돼요!"

서린의 목소리가 커졌다. 주변 승객들이 쳐다봤다.

"조용히 해요."

준혁이 웃었다.

"괜찮아요. 전 괜찮아요. 당신 덕분에... 진짜 시간을 살았어요. 마지막에."

"준혁 씨..."

"고마워요. 정말로."

그의 손이 완전히 투명해졌다. 서린은 손을 뻗었지만 잡을 수 없었다.

"안 돼... 제발..."

"서린 씨. 하나만... 부탁해도 돼요?"

"뭔데요?"

"저를... 채집해줘요."

"네?"

"이 순간을. 제가 사라지는 이 순간을. 채집해줘요. 증거로 남겨줘요. 제가 여기 있었다는."

서린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싫어요. 채집 안 할 거예요. 당신 안 사라져요."

"서린 씨. 제발."

준혁의 목소리가 간절했다.

"10년 전에 못 한 거. 이번엔 해줘요. 놓치지 말아요."

서린은 떨리는 손으로 바이알을 꺼냈다. 마지막 남은 빈 병.

"싫어..."

"해줘요."

서린은 마개를 열었다.


순간, 준혁에게서 빛이 흘러나왔다. 따뜻한 빛. 지난 3년, 아니 지난 일주일의 빛.

훔친 시간이 아닌, 진짜로 산 시간.

스위스 석양, 알프스 바람, 서린의 손, 민우와의 대화, 용서와 감사.

모든 것이 병 안으로 들어갔다.

준혁이 미소 지었다. 투명한 얼굴로.

"고마워요... 서린 씨..."

"준혁 씨!"

"당신은... 좋은 사람이에요... 계속... 그렇게 살아요..."

그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도 사라졌다.

빛이 되어.

서린은 빈 좌석을 바라봤다. 준혁이 앉아 있던 자리. 이제는 아무도 없었다.

손에 든 바이알. 안에는 따뜻한 빛이 담겨 있었다. 준혁의 마지막 순간.

서린은 병을 가슴에 꼭 안았다.

"미안해... 미안해..."

그녀는 울었다. 조용히. 주변 사람들은 이상한 여자를 봤다. 혼자 우는 여자를.

하지만 서린은 혼자가 아니었다.

손 안에 준혁이 있었다.

빛으로.


3.

인천공항. 서린은 비틀거리며 입국장을 나왔다.

핸드폰을 켰다. 소미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빨리 와. 급해. 민우가 이상해."

심장이 철렁했다. 서린은 택시를 잡아탔다.

"동숭동으로 가주세요. 빨리요."

택시는 도심을 달렸다. 서린은 창밖을 봤다. 서울. 익숙한 풍경. 하지만 뭔가 달라 보였다. 준혁이 없는 세상.

동숭동 도착. 건물로 뛰어들어갔다. 지하로 내려갔다.

엘리베이터 앞.

소미가 거기 서 있었다.

"드디어 왔네. 빨리 봐봐."

버튼을 누르고 문이 열렸다.

민우가 거기 있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그의 주변 시간이 더 왜곡되어 있었다. 전보다 더 어두웠다. 더 무거웠다.

"무슨 일이에요?"

"모르겠어. 3일 전부터 이래. 네가 스위스 간 사이에."

서린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민우에게 다가갔다.

"민우 씨? 괜찮아요?"

민우의 눈이 천천히 그녀를 봤다. 눈빛이... 이상했다. 공허했다.

"서린... 씨..."

"네. 왔어요. 네 번째 시간도 가져왔어요."

서린은 바이알을 꺼냈다. 석양빛이 담긴 병.

하지만 민우는 고개를 저었다.

"필요 없어요."

"네?"

"그만하세요. 더 이상..."

"무슨 소리예요?"

"저는... 나올 수 없어요. 이미... 늦었어요."

민우의 목소리가 무기력했다.

"네가 없는 동안... 생각했어요. 정말 많이. 저는 왜 여기 갇혔나. 제가 뭘 잘못했나."

"그래서 찾고 있잖아요. 당신이 잃어버린 시간들을."

"그게 소용없어요."

민우가 서린을 봤다.

"네 개를 돌려받았어요. 아버지, 첫사랑, 어머니, 친구. 근데 알았어요. 이건 시작도 아니에요. 제가 잃어버린 시간은... 훨씬 많아요."

"그래도..."

"평생이에요. 제 평생이 잃어버린 시간이에요. 전 한 번도... 제대로 산 적이 없어요."

민우의 주변이 더 어두워졌다. 시간이 그를 잠식하고 있었다.

"포기하세요. 저는..."

"안 돼요!"

서린이 소리쳤다.

"포기 안 해요. 당신 구할 거예요."

"왜요?"

민우가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해요? 저는 당신한테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서린은 대답하지 못했다. 왜일까? 정말로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10년 전에..."

서린이 입을 열었다.


"제 친구가 죽었어요. 제 앞에서. 근데 전 그 순간을 채집하지 못했어요. 무서워서. 도망쳤어요."

"..."

"그 후로 10년간 후회했어요. 그때 용기를 냈어야 했다고. 그 순간을 지켰어야 했다고."

서린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번에는 도망치고 싶지 않아요. 당신을 놓치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예요."

민우는 서린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준혁 씨는... 어디 있어요?"

서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사라졌어요. 비행기에서."

"뭐라고요?"

"훔친 시간이 무너져서. 그가... 사라졌어요."

서린은 가슴에서 바이알 하나를 더 꺼냈다. 준혁의 빛.

"이게... 그가 남긴 거예요. 마지막 순간을."

민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 사람이... 저 때문에..."

"아니에요. 그 사람 선택이었어요. 당신을 돕는 게."

"안 돼..."

민우가 무너졌다. 완전히 주저앉았다. 3년 만에 처음으로 자세가 바뀌었지만, 절망으로.

"제 잘못이에요.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제대로 살았으면... 준혁 씨가 시간을 훔칠 필요가 없었을 텐데..."

"민우 씨..."

"그만해요. 제발. 더 이상 아무도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서린은 민우 앞에 무릎을 꿇었다.

"들어봐요. 준혁 씨가 마지막에 뭐라고 했는지 알아요?"

"..."

"고맙다고 했어요. 당신 덕분에 진짜 시간을 알게 됐다고. 후회 없다고."

서린이 준혁의 바이알을 들어 올렸다.

"이게 그 증거예요. 그의 마지막이 얼마나 빛났는지."

병 속에서 따뜻한 빛이 반짝였다. 알프스의 석양, 비행기 창밖의 구름, 서린의 손.

민우는 빛을 봤다. 눈물이 흘렀다.

"저도... 그렇게 살고 싶어요..."

"그럼 나와요. 여기서. 우리 같이 끝까지 가요."

서린이 손을 내밀었다.

민우는 한참을 그 손을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손을 뻗었다.

두 손이 닿았다.

순간, 주변이 밝아졌다. 어둠이 조금 걷혔다.

"좋아요..."

민우가 말했다.

"계속해요. 함께."


4.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왔다. 소미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됐어?"

"괜찮아요. 다시 시작해요."

서린이 바이알들을 꺼냈다. 친구, 그리고 준혁.

"이것들을 민우 씨한테 줘야 해요."

"그리고... 더 찾아야 해요."

"몇 개나 더?"

"모르겠어요. 하지만 끝까지 갈 거예요."

소미는 서린을 보았다.

"넌 알고 있지? 결국 네 10년치를 써야 한다는 거."

"알아요."

"후회 안 해?"

"해요. 당연히. 근데..."

서린이 바이알들을 봤다.

"이게 더 의미 있는 것 같아요. 10년간 채집만 한 것보다."

소미가 서린의 어깨를 두드렸다.

"많이 컸네."

"네?"

"10년 전보다. 유진이 일 있고 나서 넌 멈춰 있었어. 근데 이제... 움직이고 있어."

서린은 웃었다.

"준혁 씨 덕분인 것 같아요. 그 사람이 보여줬어요. 끝까지 가는 게 뭔지."

"그 사람도 지금 어딘가에 있을 거야."

"네?"

"시간은 사라지지 않아. 형태만 바뀔 뿐이지. 그 사람도."

소미가 준혁의 바이알을 가리켰다.

"여기 있잖아. 빛으로."

서린은 병을 꼭 쥐었다.

"네. 여기 있어요."


5.

그날 밤. 서린의 방.

그녀는 캐비닛 앞에 앉았다. 10년치 채집물. 수백 개의 유리병들.

맨 아래 서랍. 유진이의 빈 병이 있던 곳. 서린은 그곳에 준혁의 병을 넣었다.

"여기 있어줘. 유진이랑 같이."

병이 놓이자, 캐비닛 전체가 희미하게 빛났다. 모든 시간들이 공명하는 것 같았다.

핸드폰이 울렸다. 민우 어머니 요양원에서 온 전화였다.

"여보세요?"

"한서린 씨죠? 강은숙 어르신 보호자 연락처에 남겨진..."

"네. 무슨 일이세요?"

"어르신이... 위독하세요. 빨리 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서린의 손이 떨렸다.

"지금 갈게요."


6.

인천 요양원. 새벽 2시.

서린은 택시를 타고 달려왔다. 3층 302호.

어머니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산소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숨이 약했다.

"어머니..."

서린이 다가갔다. 어머니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누구...세요..."

"민우 씨 친구예요. 기억하세요?"

"민우... 우리 민우..."

어머니의 손이 움직였다. 서린은 그 손을 잡았다.

"민우 찾았어요?"

"네... 찾았어요..."

거짓말이었다. 아직 완전히 구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머니를 안심시키고 싶었다.

"다행이다... 우리 아들...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곧 올 거예요."

"그래요... 기다릴게요... 엄마가..."

어머니의 목소리가 약해졌다.

"민우한테... 전해줘요... 엄마가... 사랑한다고..."

"네. 전할게요."

"그리고... 미안하다고... 좋은 엄마 못 돼서..."

"아니에요. 어머니 좋은 엄마예요."

"고마워요..."

어머니의 손에 힘이 풀렸다.

기계음이 울렸다.

간호사들이 뛰어들어왔다.

"어르신!"

하지만 늦었다.

어머니는 조용히 숨을 거뒀다.

서린은 어머니의 손을 잡은 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느꼈다.

방 안의 시간이 변하는 것을.

어머니의 평생이 공기 중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70년의 시간. 기쁨, 슬픔, 사랑, 외로움.

모든 것이 빛이 되어 떠올랐다.

서린은 바이알을 꺼내지 않았다.

채집하지 않았다.

그냥 지켜봤다.

어머니의 시간이 천천히 사라지는 것을.

아니,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아마도 민우에게로.


7.

새벽 5시. 동숭동 빌딩.

서린은 지하로 내려갔다. 엘리베이터 앞.

버튼을 누르고 문이 열렸다.

민우가 울고 있었다.

"알았어요..."

그가 말했다.

"엄마가... 가셨죠..."

"어떻게...?"

"느껴졌어요. 갑자기... 따뜻한 게 가슴으로 들어왔어요. 엄마 냄새가 났어요."

민우는 고개를 들었다. 얼굴은 눈물범벅이었다.

"전 아무것도 못 했어요. 엄마한테. 마지막까지..."

"아니에요."

서린이 말했다.

"어머니는 당신을 사랑했어요. 끝까지."

"저도 사랑했어요. 근데 표현을 못 했어요. 바빠서. 시간이 없어서."

민우가 주먹을 쥐었다.

"나가야 해요. 여기서. 엄마 장례식이라도 가야 해요."

"나갈 수 있어요. 우리 끝까지 갈 거예요."

서린은 나머지 두개의 바이알을 꺼냈다.

"이제 이것들을 줄게요. 전부."

"준혁 씨 것도요?"

"네. 그 사람이 원했어요. 당신을 돕는 데 쓰라고."

서린은 하나씩 마개를 열기 시작했다.

친구의 석양. 그리고 준혁의 마지막.

빛이 쏟아져 나왔다.

그것들이 민우를 감쌌다. 완전히. 따뜻하게.

민우는 빛 속에서 울었다. 그리고 느꼈다. 자신이 잃어버린 것들을. 버린 것들을. 그리고 사랑받았던 것들을.

빛이 그의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

천천히.

그의 주변을 감싸고 있던 어둠이 걷혔다. 시간의 왜곡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는 움직였다. 거의 정상 속도로.

한 발. 두 발.

엘리베이터 문 쪽으로.

서린은 손을 내밀었다.

"이리 와요. 나와요."

민우는 손을 뻗었다. 문턱을 넘으려 했다.

하지만.

"으악!"

갑자기 뒤로 끌려갔다. 보이지 않는 힘에.

"안 돼!"

서린이 달려들어 그의 손을 잡았다.

"놓지 마요!"

"못 나가요... 아직..."

"왜요?"

"부족해요... 아직... 빚이 남았어요..."

민우가 서린을 봤다.

"더 필요해요. 시간이. 더 많이."

서린은 이를 악물었다.

"알았어요. 더 찾을게요."

"서린 씨... 그만해도 돼요..."

"안 돼요. 끝까지 갈 거라고 했잖아요."

민우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다시 끌려갔다. 45초의 순간으로.

하지만 이번엔 완전히 갇히지 않았다. 조금 자유로워졌고 조금 더 움직일 수 있었다.

"고마워요..."

그가 말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버틸게요..."

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 올게요. 당신 시간 더 찾아서."


8.

서린은 빌딩을 나와 벤치에 주저앉았다. 새벽 공기가 차가워서 손이 떨렸다.

준혁은 사라졌다.

민우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그리고 민우는 여전히 갇혀 있었다.

"뭘 더 해야 해...?"

그녀가 중얼거렸다.

핸드폰이 울렸다. 소미였다.

"어디야?"

"동숭동 빌딩 앞이요."

"가만히 있어. 10분 안에 갈게."


9.

소미가 도착했다. 오래된 승용차를 몰고 왔다. 조수석에 서린을 태웠다.

"민우는?"

"여전히 갇혀 있어요. 다섯 개로도 부족했어요."

"예상했어."

소미가 운전대를 잡았다.

"시간 정지자를 푸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특히 민우 같은 경우는... 평생의 빚이 쌓여 있으니까."

"그럼 어떻게 해요?"


"네 10년치를 써야 해. 이제."

서린은 창밖을 봤다. 동이 트고 있었다. 새벽의 서울.

"준비됐어?"

소미가 물었다.

"아니요. 전혀."

"솔직하네."

"근데 해야죠.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소미는 고물상으로 차를 몰았다. 도착해서 안으로 들어갔다.

"앉아."

소미가 차를 내왔다. 서린은 마셨다. 쓰고 뜨거웠다.

"10년치를 푸는 건 위험해."

소미가 말했다.

"네 기억도 같이 흐려질 수 있어. 채집한 순간들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어."

"괜찮아요."

"진짜?"

"아니요. 무서워요. 근데 해야죠."

소미는 서린을 한참 바라봤다.

"넌 정말 많이 변했어. 10년 전만 해도 도망만 다녔는데."

"유진이 일 때문에요?"

"응. 그때 넌 완전히 무너졌었어. 책임감에 짓눌려서."

서린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유진이 왜 그랬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아요."

"왜?"

"날 대신해서 뛰어든 거잖아요. 위험한 시간 속으로,, 그게... 사랑이었던 것 같아요."

서린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이제 제 차례예요. 누군가를 위해 뛰어들 차례."

소미가 서린의 손을 잡았다.

"준비됐으면 가자 네 집으로. 캐비닛 가져와야지."


10.

서린의 방. 오전 8시.

캐비닛 앞에 섰다. 10년치. 수백 개의 유리병들이 빛나고 있었다.

"이것들을 어떻게...?"

"한꺼번에 풀어."

소미가 말했다.

"모든 서랍을 열고, 모든 병의 마개를 열어. 그럼 시간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올 거야."

"그러면?"

"그 시간들을 민우한테 보내. 네 능력으로. 시간을 채집할 수 있으면, 보낼 수도 있어."

"해본 적 없는데..."

"할 수 있어. 넌 이미 알고 있어. 어떻게 하는지."

서린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시작할게요."


첫 번째 서랍을 열었다. 수십 개의 병들. 하나씩 마개를 열기 시작했다.

빛들이 쏟아져 나왔다.


지하철에서 잠든 학생의 평화로운 3분.

비 오는 날 우산을 나눠 쓴 연인의 10초.

합격 통지서를 받은 수험생의 5초.

두 번째 서랍. 세 번째 서랍.

할머니가 손주를 안은 7초.

거리 음악가의 공연을 듣던 행인의 2분.

첫 월급을 받은 사회초년생의 30초.

네 번째 서랍. 다섯 번째 서랍.

빛들이 방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수백 개의 순간들. 10년치 인생의 조각들.

서린은 마지막 서랍을 열었다. 맨 아래.


유진이의 빈 병은 열지 않았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아니, 있었다.

빈 공간. 채집하지 못한 시간. 10년의 후회.

서린은 그 병도 열었다.

순간, 뭔가 터져 나왔다. 빛이 아니라... 어둠이었다.

"조심해!"

소미가 소리쳤다.

하지만 늦었다. 어둠이 서린을 감쌌다.

그리고 그 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서린아..."

유진이었다.

"유진이?!"

"응. 나야."

어둠 속에서 형체가 나타났다. 유진의 10년 전 그 모습 그대로.

"어떻게...?"

"나는 시간의 틈에 갇혀 있었어. 10년간. 네가 날 놓아주지 않아서."

"무슨 소리야?"

"넌 날 채집하지 못한 게 아니야. 안 한 거야. 무서워서."

유진이 서린에게 다가왔다.

"근데 그게 날 여기 묶어뒀어. 네 후회가. 네 죄책감이."

"미안해... 정말 미안해..."

"미안해하지 마."

유진이 서린을 안았다.

"이제 놓아줘 나를. 네 자신도."

"어떻게?"

"이 빈 병에 날 담아. 10년 전 그날의 나를. 그럼 나는 자유로워질 수 있어."

서린은 떨리는 손으로 빈 병을 들었다.

"진짜로... 사라지는 거야?"

"아니. 제자리로 가는 거야.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유진이 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어둠이 아니라 빛으로.

"고마워, 서린아. 10년간 날 기억해줘서."

"유진아..."

"이제 너도 살아. 채집만 하지 말고. 진짜 삶을."

빛이 병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내.

10년 만에 채집됐다. 유진이의 순간이.

서린은 병을 꽉 쥐고 울었다.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

소미가 서린을 일으켰다.

"이제 보내야 해. 민우한테. 모든 시간을."


서린은 눈물을 닦고 일어섰다.

방 안은 빛으로 가득했다. 수백 개의 순간들이 공중에 떠 있었다.

10년치 인생.

그리고 이제 유진이도.

"어떻게 보내요?"

"네 마음으로 보내. 민우를 생각하면서. 그의 자유를 바라면서."

서린은 눈을 감았다. 민우를 떠올렸다. 엘리베이터에 갇힌 남자. 45초 안에 갇힌.


나가라.

자유로워져라.

이제 살아라.

서린의 온몸에서 빛이 났다. 그녀의 능력이 발동했다. 채집의 반대. 방출.

모든 빛들이 그녀를 통과해 흘러나갔다. 동숭동을 향해. 민우를 향해.

10년치 순간들이 빛의 강이 되어 흘렀다.

서린은 서 있었다. 빛의 중심에서.

그리고 느꼈다. 자신의 기억들이 흐려지는 것을.

지하철의 학생. 누구였더라?

비 오는 날의 연인. 어디서 봤더라?

할머니와 손주. 언제였더라?

기억이 사라졌다. 하나씩.

하지만 괜찮았다.

이것들은 이제 민우의 것이었다. 그의 자유를 위한 선물.

마지막 빛이 사라졌다.

서린은 무릎을 꿇었다. 탈진했다.

소미가 그녀를 붙잡았다.

"잘했어. 정말 잘했어."

서린은 빈 캐비닛을 봤다. 텅 비어 있었다.

10년이 사라졌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민우 씨... 나왔을까요?"

"가봐야지."


11.

동숭동 빌딩. 오후 2시.

서린과 소미는 지하로 내려갔다. 엘리베이터 앞.

문이... 열려 있었다.

완전히.

그리고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민우 씨?!"

서린이 소리쳤다. 대답이 없었다.

"어디 간 거예요?"

"나온 거야. 드디어."

소미가 웃었다.

"네 시간들이 그를 풀어준 거야."

"그럼 어디...?"

"아마 가야 할 곳에 갔을 거야."

서린은 엘리베이터 안을 들여다봤다. 정말로 비어 있었다. 3년간 민우가 갇혀 있던 그 공간.

하지만 바닥에 뭔가 놓여 있었다.

쪽지 한 장.

서린은 주워서 펼쳤다.

서린 씨.

고맙습니다. 당신 덕분에 나왔습니다.

3년간 45초 안에 갇혀 있으면서 많은 것을 생각했습니다.

제가 얼마나 잘못 살았는지. 얼마나 많은 것을 놓쳤는지.


이제 제대로 살고 싶습니다.

천천히. 의미 있게.

늦었지만 엄마 장례식에 갑니다.

그리고 아버지 묘에도 갈 겁니다.

수진 씨도 찾아갈 겁니다.

준서한테도 연락할 겁니다.

하나씩. 천천히.

준혁 씨 일은 정말 슬픕니다.

하지만 그분이 제게 준 선물을 잘 쓰겠습니다.

당신도 그렇게 하세요.

채집만 하지 마시고, 이제는 사세요.

진짜로.

- 강민우


서린은 쪽지를 가슴에 안았다.

"나왔구나..."

"응. 자유로워졌어."

소미가 서린의 어깨를 두드렸다.

"넌 해냈어. 유진이도 구했고, 민우도 구했어."

"준혁 씨는...?"

"그 사람도 구한 거야. 마지막에. 의미 있는 시간을 줬잖아."

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뭐 해요? 나는?"

"살아야지. 네가 민우한테 말한 것처럼."

"채집 안 하고요?"

"해도 되고 안 해도 돼. 근데 이번엔 균형 있게. 채집과 삶 사이의."

서린은 엘리베이터를 마지막으로 한 번 봤다.

텅 빈 공간. 하지만 이제는 자유로운 공간.


"가자."

그들은 지하를 나왔다. 밖은 밝았다. 햇살이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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