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채집자 5화 : 잃어버린 생일

잃어버린 생일

by Rich and Growth

1.

10월 20일. 아침 9시.

한서린은 인천행 버스를 탔다. 옆자리에는 준혁이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색이 어제보다 더 안 좋아 보였다. 희미하게 투명해 보이기까지 했다.

"괜찮아요?"

서린이 물었다. 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괜찮아요. 그냥... 요즘 더 빨리 무너지는 것 같아요. 제가 훔친 시간이."

"쉬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쉬면 뭐해요. 어차피 시간 없는데."

준혁이 쓸쓸하게 웃었다. 서린은 가방에서 작은 보온병을 꺼냈다.

"소미 언니가 만들어준 차예요. 마셔요."

"뭔데요?"

"시간을 안정시켜주는 차래요. 훔친 시간이 무너지는 속도를 늦춰준대요."

준혁은 보온병 뚜껑에 차를 따라 마셨다. 따뜻하고 쓴맛이 났다. 하지만 마시고 나니 몸이 조금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고마워요."

"천만에요."


버스는 고속도로를 달렸다. 창밖으로 가을 풍경이 지나갔다. 붉게 물든 산들.


서린은 노트를 꺼내 다시 확인했다.

2022년 10월 20일. 민우 어머니 생일에 민우는 회식 참석. 어머니 혼자 생일

현재: 인천 실버타운 요양원

상태: 치매 초기


"어머니가 민우 씨 기억하실까요?"

준혁이 물었다.

"모르겠어요. 치매라고 했으니까... 하지만 시도는 해봐야죠."

"그날의 시간을 어떻게 찾을 건데요?"

"어머니한테 있을 거예요. 혼자 보낸 생일. 그 시간이 어머니의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거예요."


2.

인천 실버타운 요양원. 깨끗하고 조용한 곳이었다.

"강은숙 어르신 면회 왔습니다."

접수대 간호사가 확인했다.

"가족분이세요?"

"아니요. 아들 친구들이에요."

"아... 민우 씨 친구분들. 그분 소식 아세요?"

"네. 그래서 어머니 뵈러 왔어요."

간호사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어르신이 많이 안 좋아지셨어요. 요즘 아드님 얘기를 자주 하세요. 어디 갔냐고, 왜 안 오냐고."

"기억은 하세요?"

"네. 아직 아드님은 기억하세요. 다른 건 가물가물해도."

그들은 3층으로 올라갔다. 복도는 따뜻한 햇살로 가득했다. 노인들이 휠체어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었다.

302호. 문을 노크했다.


"들어오세요."

낮은 목소리. 문을 열었다.

작은 방. 침대, 옷장, 작은 테이블. 창가에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70대 후반. 회색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민우와 닮은 얼굴이다.

"누구세요?"

"안녕하세요. 저희는 민우 씨 친구들이에요."

"민우... 민우 친구?"

여자의 얼굴이 환해졌다.

"민우가 어디 있어요? 왜 안 와요? 연락이 안 되는데."

서린은 가슴이 먹먹했다. 민우가 3년 전 실종됐다는 걸 어머니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민우 씨는... 지금 일 때문에 바빠서요. 대신 저희가 왔어요."

"그래요? 또 바쁘구나. 항상 바빠요 그 애는."

어머니가 한숨을 쉬었다. 서린과 준혁은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

"어머니, 혹시 생일 기억하세요? 3년 전 생일."

"생일? 내 생일?"

"네. 10월 20일."

어머니는 창밖을 봤다. 한참을 생각하는 것 같았다.

"생일... 케이크... 촛불..."

"뭐가 기억나세요?"

"혼자였어요. 민우가 못 온다고 했어요. 회사 일이 있다고."

어머니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괜찮다고 했어요. 바쁜 거 아니까. 근데..."

"근데요?"


"외로웠어요."

어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녀는 손으로 닦았다.

"아들이 바쁜 건 좋은 거예요. 잘되고 있다는 거니까. 근데 생일날은... 같이 있어줬으면 좋겠었어요. 딱 한 시간만이라도."

서린은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차가웠다.

"그날 뭐 하셨어요?"

"케이크를 샀어요. 작은 거요. 혼자 먹을 거니까. 그리고 집에 왔어요. 촛불도 켜고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어요. 혼자."

어머니가 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목소리가 떨렸다. 서린의 눈에서도 눈물이 났다.

"사랑하는 은숙씨의... 생일 축하합니다..."

노래가 끝났다. 어머니는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촛불을 껐어요. 소원을 빌면서. 민우가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그게 전부였어요."

서린은 어머니의 손을 꽉 쥐었다.

"어머니, 제가... 이상한 질문 할게요. 그날 케이크, 아직 있어요?"

"케이크요?"

"네. 혹시 사진이라도..."

"아, 사진. 찍었어요. 핸드폰으로."

어머니가 침대 옆 서랍을 열었다. 오래된 스마트폰을 꺼냈다.

"여기 어딘가 있을 거예요."

그녀가 사진첩을 뒤적였다. 손이 느렸다. 준혁이 도와줬다.

"이거요?"

사진 하나. 테이블 위 작은 케이크. 켜진 촛불 하나. 그리고 텅 빈 의자.


서린은 사진을 봤다. 순간, 사진에서 무언가가 느껴졌다. 시간의 무게. 외로움의 밀도.

"이 사진... 저한테 보내주실 수 있어요?"

"네. 근데 왜요?"

"민우 씨한테 보여주려고요."

"그래요. 보여줘요. 그리고 말해줘요. 엄마가 괜찮다고. 바쁜 거 이해한다고."

어머니가 서린의 손을 꼭 잡았다.

"근데 가끔은... 얼굴 좀 보여줬으면 좋겠다고. 전화라도 좀 하라고."

"전할게요. 꼭."


3.

요양원을 나와 근처 카페에 앉았다. 서린은 핸드폰으로 사진을 들여다봤다. 테이블 위 케이크. 촛불. 빈 의자.

"이 사진에서 시간을 채집할 수 있어요?"

준혁이 물었다.

"아니요. 사진은 그냥 기록이에요. 진짜 시간은 다른 곳에 있어요."

"어디요?"

"그날 어머니가 있었던 곳. 그 집."

"가봐야 해요?"

"네."

서린은 어머니한테 주소를 받아뒀었다. 인천 구도심의 오래된 아파트. 민우가 자란 집.

버스를 타고 30분. 낡은 아파트 단지에 도착했다. 1990년대 건물. 페인트가 벗겨지고 복도가 좁았다.

엘리베이터가 고장나 5층 계단으로 올라갔다.


503호. 문 앞에 섰다. 빈집이었다. 어머니가 요양원에 간 후 비어 있었다.

"어떻게 들어가요?"

"관리사무소에서 열쇠 빌려야죠."

그들은 다시 내려가 관리사무소로 갔다. 사정을 설명하고 열쇠를 빌렸다.

"한 시간만 쓰고 오세요."

다시 5층. 열쇠로 문을 열었다.

삐걱—

낡은 문 소리. 안으로 들어갔다.

먼지 냄새. 오래된 집 냄새. 가구들이 그대로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게 회색빛이었다.

서린은 천천히 집 안을 둘러봤다. 거실, 작은 부엌, 방 두 개.

주방 테이블.

서린은 그 앞에 섰다. 여기였다. 어머니가 혼자 앉아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던 곳.

손을 테이블에 댔다. 차갑고 딱딱했다. 하지만 무언가가 느껴졌다. 스며든 시간.

"여기예요."

서린이 말했다. 준혁이 다가왔다.

"뭐가 느껴져요?"

"외로움. 기다림. 그리고... 사랑."

서린은 눈을 감았다. 집중했다. 시간의 층을 느꼈다. 수십 년의 시간이 이 집에 쌓여 있었다. 하지만 그중 하나만, 딱 하나만 찾아야 했다.

3년 전. 10월 20일. 저녁 7시.

그 시간.

서린은 테이블에 두 손을 올리고 눈을 감았다. 깊게 숨을 쉬었다.

그리고 느꼈다.

어둠속에서 촛불이 켜졌다. 작은 불꽃 하나

"생일 축하합니다..."

떨리는 목소리. 혼자 부르는 노래.

"사랑하는 은숙씨의..."

눈물이 케이크 위로 떨어졌다.

"생일 축하합니다..."

소원을 빌었다. '민우야, 건강해라. 행복해라. 엄마는 괜찮아.'

촛불을 끄자 어두워졌다.


텅 빈 식탁. 혼자 남은 케이크. 그리고 끝없는 외로움.

서린은 눈을 떴다.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준혁이 놀라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그냥... 너무 슬퍼서요."

서린은 바이알을 꺼냈다. 떨리는 손으로 마개를 열었다.

테이블에서 무언가가 피어올랐다. 촛불같은 희미한 빛이 천천히 바이알 안으로 들어갔다.

혼자 부른 생일 축하 노래.

혼자 끈 촛불.

혼자 먹은 케이크.

그리고 아들을 향한 끝없는 사랑.

모든 것이 작은 유리병 안에 담겼다.


병이 가득 차자, 서린은 마개를 닫았다. 병 속에서 따뜻한 빛이 반짝였다. 촛불처럼.

"찾았어요..."

서린이 속삭였다.

"민우 씨의 세 번째 시간."


4.

그들이 집을 나서려는데, 준혁이 갑자기 벽에 기댔다. 얼굴이 창백했다.

"준혁 씨!"

서린이 그를 붙잡았다. 준혁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괜찮아요... 잠깐만요..."

"괜찮지 않아 보이는데요!"

"진짜 괜찮아요. 그냥 어지러울 뿐이에요."

하지만 그의 손을 보니, 더 투명해져 있었다. 마치 서서히 사라지는 것처럼.

"병원 가야 해요."

"병원 가봤자 소용없어요."

준혁이 쓸쓸하게 웃었다.

"이건 병이 아니에요. 훔친 시간이 무너지는 거예요. 의사가 고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럼 어떻게 해요?"

"모르겠어요. 그냥... 견디는 수밖에."

서린은 준혁을 부축해 계단을 내려갔다. 한 계단 한 계단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와 벤치에 앉혔다. 준혁은 고개를 떨구고 숨을 고르고 있었다.

"소미 언니한테 연락해볼게요. 뭔가 방법이..."

"서린 씨."

준혁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차갑고 떨렸다.

"저는 괜찮아요. 어차피 알고 있었어요. 이렇게 될 거라는 걸."

"그래도..."

"대신 약속해줘요. 민우 씨는 꼭 구해줘요. 제가 망친 거니까. 제가 책임져야 하니까."

"당신도 구할 거예요. 둘 다."

"서린 씨는 고집이 세네요."

준혁이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무서워요. 사라지는 게."

"안 사라져요."

"사라질 거예요. 곧. 느껴져요."

"..."

"근데 이상한 게 뭔지 알아요? 지금 이 순간이 제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것 같아요. 3년간 훔친 시간보다 더."


준혁이 하늘을 봤다. 구름이 천천히 흘러갔다.

"당신 만나서, 민우 씨 만나서, 이렇게 누군가를 돕고 있는 이 시간. 이게 진짜 제 시간인 것 같아요. 처음으로."

서린은 준혁의 손을 꽉 쥐었다.

"그럼 더 많이 만들어요. 그런 시간. 포기하지 말아요."

"...네."


5.

저녁. 그들은 동숭동 빌딩으로 돌아왔다.

준혁의 상태는 조금 나아졌다. 소미가 준 차를 더 마시고, 한참을 쉬고 나니 얼굴에 색이 돌아왔다. 하지만 여전히 손은 희미하게 투명했다.

엘리베이터 앞. 버튼을 누르고 문이 열렸다.

민우가 거기 있었다. 하지만 뭔가 달라 보였다. 조금 더 움직일 수 있는 것 같았다. 손가락뿐 아니라 팔도 고개도.

"왔군요."

민우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도 빨라졌다. 거의 정상 속도였다.


"네. 세 번째 시간을 가져왔어요."

서린이 바이알을 꺼냈다. 촛불 같은 빛이 담긴 병.

"이번 건... 어머니예요."

민우의 얼굴이 굳었다.

"어머니..."

"3년 전. 어머니 생일. 당신이 가지 못한 날. 어머니가 혼자 보낸 저녁."

서린이 마개를 열었다.

따뜻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촛불 향기, 생일 축하 노래, 그리고 어머니의 사랑.

그것들이 민우를 감쌌다.

민우는 그 자리에서 무너졌다. 무릎을 꿇었다. 3년 만에 처음으로 자세가 바뀌었다.

"엄마...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울음이 터져 나왔다. 이번엔 눈물이 빠르게 흘렀다. 거의 정상 속도로.

빛이 그의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 혼자 앉아 있던 어머니의 모습이, 떨리는 목소리로 부르던 노래가, 아들을 향한 기도가.


"괜찮대요. 어머니가.. 바쁜 거 이해한다고."

서린이 말했다.

"근데 가끔은 얼굴 보여주라고. 전화라도 하라고."

민우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은 빨갛게 부어 있었다.

"지금 가도 돼요? 엄마한테?"

"아직 못 가요. 아직 여기 갇혀 있잖아요."

"알아요. 근데... 보고 싶어요. 너무."

빛이 다 스며들었다. 바이알이 비었다. 민우는 천천히 일어섰다. 3년 만에 처음으로 완전히 일어섰다.

"움직일 수 있어요..."


그가 손을 들어 올리고 발을 움직였다. 아직 느렸지만, 분명히 움직였다.

"거의 다 왔어요."

서린이 말했다.

"조금만 더 찾으면 당신을 풀어줄 수 있을 것 같아요."

"고맙습니다. 정말로."

민우가 서린을 봤다. 그리고 준혁도.

"두 분 다 고마워요. 당신들이 아니었으면..."

"아직 끝난 게 아니에요."

준혁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약했다.

"아직 더 있잖아요. 당신이 잃어버린 시간들."

"알아요. 근데 이미... 많이 가벼워졌어요. 이 정도면 혼자서도..."

"안 돼요."

서린이 단호하게 말했다.

"끝까지 해야 해요. 완전히 풀어줘야 해요. 그래야 당신이 진짜로 자유로워져요."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6.

밖으로 나왔다. 밤공기가 차가웠다.

"다음은 뭐예요?"

준혁이 물었다. 목소리에 피로가 묻어났다.

"친구. 민우 씨가 말했던 대학 동기. 여행 가자고 했는데 거절한 친구."

"그 사람 찾을 수 있어요?"

"찾아봐야죠."

서린은 노트를 펼쳤다. 민우의 휴대폰에서 본 연락처들. 대학 동기로 보이는 이름들.

"하나씩 전화해봐야겠어요."

"지금요? 밤 10시인데."

"내일은 늦어요. 빨리 해야 해요."

서린이 준혁을 봤다. 그의 얼굴. 점점 더 투명해지고 있었다.

"당신 시간이 없잖아요."

준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알고 있었다.

"카페 가요. 거기서 전화해봐요."

그들은 근처 24시간 카페로 갔다. 구석 자리에 앉아 커피를 시켰다.

서린은 휴대폰을 꺼냈다. 민우의 연락처 중 대학 동기로 보이는 번호들을 하나씩 돌렸다.

첫 번째. 연결 안 됨.

두 번째. 민우를 기억하지 못함.

세 번째. 통화 중.

네 번째.

"여보세요?"

남자 목소리. 30대 후반.

"안녕하세요. 혹시 강민우 씨 아세요?"

"민우? 민우 어떻게 아세요?"

"민우 씨 일로 연락드렸어요. 혹시 이름이...?"

"저 박준서예요. 민우 대학 동기인데... 민우가 무슨 일이에요? 실종됐다고 들었는데."

"네. 그 일로 연락드렸어요. 혹시 2005년쯤에 민우 씨랑 여행 계획 세운 적 있으세요?"

전화 너머 침묵이 흘렀다.

"...있어요. 근데 그걸 어떻게 아세요?"

"만나서 얘기할 수 있을까요? 중요한 일이에요."

"지금요?"

"네. 가능하시면."

박준서는 망설이다가 말했다.

"좋아요. 어디서 만날까요?"


7.

한 시간 후. 홍대 근처 조용한 술집.

박준서가 도착했다. 30대 후반. 편한 옷차림. 피곤해 보였다.

"안녕하세요."

그들은 인사를 나눴다. 맥주를 시켰다.

"민우 얘기 하신다고요?"

"네. 민우 씨가... 지금 힘든 상황이에요. 그걸 돕고 있어요."

서린이 설명했다. 물론 전부는 아니었다. 시간 정지자니 뭐니 하는 얘기는 믿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민우 씨 과거를 추적하고 있어요. 그가 후회하는 일들을. 그중 하나가 당신과의 여행인 것 같아요."

준서는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2005년 여름이었어요. 졸업하고 첫 직장 들어가기 전. 우리 둘이 유럽 여행 계획을 세웠어요."

"민우 씨도 동의했어요?"

"처음에는요. 민우가 먼저 제안했어요. '취직 전에 한 번 놀아보자'고. 근데..."

준서가 쓸쓸하게 웃었다.

"출발 일주일 전에 연락이 왔어요. 못 간다고. 회사에서 신입사원 조기 출근 요청이 들어왔대요. 거절하면 불이익이 있을 수도 있다고."

"그래서요?"

"혼자 갔죠. 뭐. 아쉽긴 했지만 이해했어요. 첫 직장이잖아요. 중요하죠."

"연락은 했어요? 여행 중에?"

"처음엔 했어요. 사진 보내고, 전화하고. 근데 민우는 항상 바빴어요. '통화 중이야' '회의 중이야' '나중에 하자'. 그러다가 아예 안 받더라고요."

준서가 맥주잔을 내려놓았다.

"돌아와서 한 번 만났어요. 근데 민우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어요. 여유가 없었어요. 시간 없다고, 바쁘다고. 밥 먹으면서도 계속 핸드폰 보고, 시계 보고."

"그 후로는요?"

"멀어졌죠. 제가 먼저 연락을 끊었어요. '너는 일만 하면서 살아라'고 한마디 하고."

준서의 목소리에 후회가 묻어났다.

"근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제가 너무했던 것 같아요. 민우도 어쩔 수 없었을 텐데. 첫 직장이었으니까."

"후회하세요?"

"당연하죠. 20년 친구였는데. 그렇게 끝나버렸어요. 민우가 실종됐다는 소식 듣고... 마지막이 그런 말이었다는 게."


준서가 눈을 감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여행, 정말 좋았거든요. 근데 혼자였어요. 계속 생각했어요. '민우가 여기 있었으면' 하고."

"그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이 어디예요?"

"스위스. 인터라켄. 산 위에서 본 일몰. 평생 못 잊을 것 같아요. 민우랑 같이 보고 싶었어요."

서린은 받아 적었다.

"그때 사진 있어요?"

"당연하죠. 잠깐만요."

준서가 핸드폰을 꺼내 앨범을 뒤적였다.

"여기. 이거."

사진 하나. 산 위. 석양. 그리고 사진 찍는 사람 옆에... 빈 공간.

서린은 사진을 받아 확대했다. 빈 공간을 봤다. 거기 누군가 있어야 했다. 민우가.

"이 사진... 저한테 보내주실 수 있어요?"

"네. 근데 이게 뭐 도움이 돼요?"

"됩니다. 많이."

사진을 받았다. 서린은 사진을 뚫어지게 봤다. 빈 공간.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보였다. 희미한 잔상. 거기 서 있어야 했던 사람의 흔적.

"준서 씨, 혹시 그곳에 다시 갈 수 있어요?"

"스위스요? 갑자기요?"

"네. 저희랑 같이."

준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도움이 되는데요?"

"민우 씨를 구하는 데 도움이 돼요. 믿어주세요."

준서는 서린의 눈을 봤다. 진지했다. 그리고 뭔가... 절박했다.

"...언제요?"

"최대한 빨리요. 이번 주 안에."

준서는 한참을 생각했다.

"좋아요. 제가 재택근무라 가능해요. 근데 비행기 표랑 숙소는..."

"저희가 할게요."

준혁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약했지만 단호했다.

"제가 다 처리할게요."

"준혁 씨..."

"괜찮아요. 이 정도는 할 수 있어요."


8.

술집을 나왔다. 준서와 헤어진 후, 서린과 준혁은 밤거리를 걸었다.

"스위스라니... 큰일 벌였네요."

준혁이 쓸쓸하게 웃었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어차피 쓸 데 없는 돈이에요. 3년간 모았던 건데."

"당신도 같이 가요."

"네?"

"스위스. 같이 가요. 우리 셋이."

준혁은 멈춰 섰다.

"저는... 괜찮아요. 몸도 안 좋고..."

"그래서 가야죠."

서린이 그를 똑바로 봤다.

"마지막일지도 모르잖아요. 제대로 된 여행."

준혁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눈에 무언가가 흔들렸다.

"저는... 여행 같은 거 해본 적 없어요. 늘 일하고, 아프고, 시간 훔치고... 그게 전부였어요."

"그럼 이제 해봐요. 진짜로."

"시간이 없는데..."

"그래서 더 가야죠. 시간 없으니까. 하나라도 더 해야죠."

준혁은 한참을 서린을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뭐가요?"

"저를... 사람 취급해줘서요."

서린은 준혁의 어깨를 툭 쳤다.

"무슨 소리예요. 당신 사람 맞잖아요."

"시간 도둑인데."

"그래도 사람이에요. 살고 싶었던 사람."

준혁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는 닦지 않았다.

"준비할게요. 스위스 여행."


9.

3일 후. 인천공항.

서린, 준혁, 준서 세 사람이 출국장에 섰다.

"진짜 가는 거예요? 스위스를?"

준서가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네. 민우 씨를 위해서."

서린이 여권을 꺼냈다. 10년 만에 쓰는 여권이었다.

준혁은 옆에서 조용히 서 있었다. 그의 몸은 더 투명해져 있었다. 하지만 표정은 밝았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가요."

그들은 게이트로 향했다.

비행기 안. 창가 자리에 앉았다. 서린은 가운데, 준혁은 창가, 준서는 복도 쪽.

비행기가 이륙했다. 서울이 작아졌다. 구름 위로 올라갔다.

준혁은 창밖을 뚫어지게 봤다.

"처음이에요."

"뭐가요?"

"비행기. 타본 적 없어요."

"정말요?"

"네. 여행 같은 거 해본 적 없어서."

준혁이 구름을 봤다. 하얀 구름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아름답네요."

"그렇죠?"

"이런 게... 진짜 시간인가봐요. 훔친 시간엔 없었어요. 이런 감동."

서린은 준혁의 손을 잡았다. 투명하고 차가운 손.

"많이 만들어요. 이런 시간. 앞으로."

"앞으로가 있을까요?"

"있어요. 만들 거예요."

준혁은 서린을 봤다. 그리고 미소 지었다.

"당신 정말 고집 세네요."

"나도 알아요."

비행기는 구름 위를 날았다. 스위스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으러.


10.

12시간 후. 스위스 취리히 공항.

그들은 피곤했지만 흥분되어 있었다. 특히 준혁은 눈을 반짝이며 주변을 둘러봤다.

"여기가 스위스..."

"처음이죠?"

"네. 꿈만 같아요."

그들은 기차를 타고 인터라켄으로 향했다. 창밖으로 알프스가 보였다. 설산, 호수, 작은 마을들.

"와..."

준혁이 감탄했다. 준서도 웃었다.

"20년 만에 다시 오네요."

"많이 바뀌었어요?"

"아니요. 똑같아요. 여전히 아름다워요."

인터라켄의 작은 산골 마을에 도착하고 그들은 호스텔에 짐을 풀었다.

"내일 산에 올라가요."

준서가 말했다.

"하더 쿨름. 거기서 일몰 봤었어요. 민우랑 보려고 했던."

"올라갈 수 있어요? 다들?"

서린이 준혁을 봤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어요. 꼭 하고 싶어요."


11.

다음 날 오후. 케이블카를 타고 산을 올라갔다.

준혁은 창에 얼굴을 붙이고 밖을 봤다. 점점 높아지는 고도. 발 아래로 펼쳐지는 계곡.

"무섭지 않아요?"

"무서워요. 근데 아름다워요."

하더 쿨름 정상. 해발 2,000미터.

그들은 전망대로 나갔다. 바람이 차갑게 불었다. 하지만 경치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알프스 산맥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아이거, 묀히, 융프라우. 거대한 설산들. 그리고 저 멀리 석양.

"여기였어요."

준서가 말했다.

"20년 전. 내가 혼자 섰던 곳."

서린은 주변을 둘러봤다. 시간의 흐름을 느꼈다. 20년 전의 흔적을. 혼자 서 있던 남자의 외로움을.

"여기 서봐요."

서린이 준서를 특정 위치로 안내했다.

"20년 전에도 여기 서 있었죠?"

"네... 어떻게 알았어요?"

"느껴져요."

서린은 바이알을 꺼냈다. 준혁이 옆에 섰다.

"저도 도와줄게요."

"고마워요."

서린은 눈을 감았다. 집중했다. 20년 전의 시간을 느꼈다.

석양. 산. 한 남자가 혼자 서 있다.

"민우야... 여기 너랑 같이 보고 싶었는데."

그가 사진을 찍는다. 옆 공간은 비어 있다.

"너 지금 뭐 하고 있어? 일하고 있겠지."

외로움. 그리움. 그리고...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왜 날 버렸어. 왜 일을 택했어."

석양이 진다. 아름답다. 하지만 슬프다.

"미안해, 민우야. 화낸 거. 근데 나도... 서운했어."

서린은 눈을 떴다. 그리고 바이알의 마개를 열었다.

순간, 석양빛이 병 안으로 흘러들었다. 20년 전의 석양. 혼자 본 아름다움. 나누지 못한 감동.

그리고 친구를 향한 복잡한 감정들.

모두 병 안에 담겼다.

준혁이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서 빛이 나왔다. 시간 도둑의 능력. 하지만 이번엔 훔치는 게 아니었다. 돕는 것이었다.

그의 빛이 서린의 채집을 도왔다. 시간이 더 선명하게, 더 완전하게 담겼다.

"고마워요."

서린이 속삭였다.

병이 가득 찼다. 마개를 닫았다. 석양빛이 병 안에서 반짝였다.

"찾았어요. 네 번째 시간."

준서는 그들을 봤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정확히는 몰랐다. 하지만 뭔가 중요한 일이었다는 건 느꼈다.

"민우한테 전해줘요."

준서가 말했다.

"괜찮다고. 나는 이해한다고.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미안하다고. 화낸 거. 네가 힘들었을 텐데."

"전할게요. 꼭."

해가 졌다. 석양이 알프스를 붉게 물들였다. 세 사람은 말없이 그것을 봤다.

준혁이 중얼거렸다.

"아름답다..."

그의 손은 거의 투명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평화로웠다.

"이런 거였구나. 진짜 시간."

서린은 그의 손을 잡았다. 준서도.

세 사람은 손을 잡고 석양을 봤다.

시간 채집자, 시간 도둑, 그리고 잃어버린 시간을 기억하는 사람.

그들이 함께 만든 시간.

이것이 진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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