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의 남자
1.
"제 잘못 때문에."
준혁의 말이 카페 안에서 맴돌았다. 서린은 커피잔을 내려놓고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준혁의 얼굴은 창밖 가로등 빛과 그림자 사이에 반쯤 가려져 있었다.
"구체적으로 말해주세요."
서린의 목소리는 차갑지 않았지만 단호했다.
준혁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2022년 3월이었어요. 저는 그때 민우 씨 회사 근처 카페에서 일했어요. 그 사람은 단골이었죠. 매일 아침 8시 30분, 점심 12시 15분, 오후 4시. 정확하게. 시계처럼."
준혁이 자신의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어느 날 그 사람이 전화를 받더라고요. 아버지한테서 온 전화. 근데 바로 끊었어요. '바빠서 나중에'라고 하면서. 그리고 저한테 아메리카노를 주문했죠."
"그게... 뭐가 잘못인데요?"
"그게 전부가 아니에요."
준혁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때 제가... 이상한 걸 느꼈어요. 그 사람 주변의 시간이 왜곡되는 걸. 마치 서린 씨처럼, 저도 볼 수 있거든요.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걸."
서린의 등에 소름이 돋았다.
"당신도... 시간을 볼 수 있어요?"
"네. 하지만 서린 씨와는 달라요. 저는 보기만 하는 게 아니에요."
준혁이 손을 펼쳤다. 그의 손바닥에서 희미한 빛이 일렁였다.
"저는 가져갈 수 있어요. 시간을."
서린은 숨을 멈췄다. 소미가 말했던 것이 기억났다. '시간 도둑'. 남의 시간을 훔치는 사람들.
"그날... 당신이 민우 씨의 시간을..."
"아직 말 안 끝났어요."
준혁이 손을 오므리니 빛이 사라졌다.
"그때 저는 느꼈어요. 그 사람에게서 '버려진 시간'들이 흘러나오는 걸. 쓰지 않는 시간, 낭비하는 시간, 의미 없이 흘려보내는 시간들. 그게... 제게 유혹이었어요."
"왜요?"
"저는 아팠으니까요."
준혁이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췌장암. 4기. 6개월 시한부. 2021년 12월에 진단받았어요. 의사가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고 하더군요. 웃기죠? 시간이 없다니. 전 평생 시간을 볼 수 있었는데, 정작 제 시간은 없었어요."
서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준혁은 계속 말했다.
"그래서 시작했어요. 남의 시간을 가져가는 것을요. 처음엔 작은 것들로 시작했어요. 버스에서 졸고 있는 사람의 3분, 스마트폰만 보는 사람의 10분. 그 시간들을 제 것으로 만들었어요."
"그게... 가능해요?"
"가능해요. 시간 도둑은 그렇게 살아요. 남의 시간을 빼앗아서."
준혁의 목소리에 자조가 섞였다.
"그리고 그날, 민우 씨를 봤어요. 그 사람은... 시간의 보물창고였어요. 효율적으로만 살다가 정작 의미 있는 순간들은 다 버린 사람이더군요. 그 버려진 시간들이 그 사람 주변에 가득했어요."
"당신이... 가져갔어요?"
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씩. 매일 그 사람이 카페에 올 때마다 3개월 동안요. 아버지와의 통화 시간, 점심시간에 혼자 먹는 밥 시간, 잠들기 전 멍하니 천장 보는 시간... 그 사람한테는 쓸모없어 보였던 시간들."
"그게 쌓여서..."
"그 사람을 시간의 끝으로 밀어넣었어요."
침묵이 흘렀다. 에어컨 소리만 낮게 웅웅거렸다.
"저는 몰랐어요. 제가 훔친 시간들이 그 사람한테 빚이 될 줄은. '어차피 안 쓰는 시간'이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준혁이 고개를 떨구었다.
"3월 15일. 그 사람이 마지막으로 카페에 왔어요. 그날따라 굉장히 조급해 보였죠. 전화를 계속 확인하고, 시계를 보고. 그리고 지하로 내려갔어요. 엘리베이터를 타러."
"그게 마지막이었구나."
"네. 다음 날 그 사람은 실종 신고가 됐어요. 저는 그제야 알았죠. 제가 뭘 한 건지."
준혁이 서린을 봤다. 그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래서 당신을 도와주고 싶어요. 제가 훔친 시간들... 돌려줄게요. 민우 씨를 구하는 데 쓰세요."
서린은 한참을 준혁을 바라봤다. 분노해야 할까? 그를 비난해야 할까? 하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다른 감정이 있었다.
이해.
준혁도 살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사람이 발버둥 친 것뿐이었다.
"지금은... 괜찮아요? 몸이?"
서린이 물었다. 준혁은 씁쓸하게 웃었다.
"아니요. 전혀. 훔친 시간으로 3년을 더 살았어요. 원래는 2022년 6월에 죽었어야 했는데. 근데 이제... 끝이 보여요. 훔친 시간은 진짜 시간이 아니거든요. 빌린 거죠. 언젠가 갚아야 하는."
"언제까지예요?"
"의사는 6개월이라고 했어요. 작년 말에. 근데 전 아직 여기 있죠. 훔친 시간 덕분에."
준혁이 창밖을 봤다. 빌딩이 어둠 속에 서 있었다.
"그 사람을 구하면, 제가 훔친 시간도 돌려줘야 해요. 그럼 저는..."
"죽는 거예요?"
"아마도요."
서린은 커피를 마셨다. 이미 식어 차갑고 쓴맛만 남았다.
"도와줄게요."
"네?"
"당신 도움 받을게요. 민우 씨 구하는 데."
준혁의 눈이 커졌다.
"진짜요?"
"네.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뭔데요?"
"당신도 구할 거예요."
"...뭐라고요?"
"당신도 같이 구할 거예요. 민우 씨랑. 둘 다 살리는 방법이 있을 거예요."
준혁은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해요. 시간은 제로섬 게임이에요. 한 사람을 살리면 다른 사람이..."
"아직 모르잖아요."
서린이 단호하게 말했다.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지 마세요. 그게 진짜 시간 낭비예요."
준혁은 서린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미소 지었다. 진짜 미소였다.
"당신... 이상한 사람이네요."
"나도 알아요."
2.
다음 날 오전. 서린은 준혁과 함께 소미의 고물상에 있었다.
"시간 도둑이라고?"
소미가 준혁을 날카롭게 쳐다봤다. 준혁은 고개를 숙였다.
"네.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네가 민우를 그렇게 만든 거잖아."
"알고 있어요."
소미는 팔짱을 끼고 준혁을 한참 관찰했다. 그녀의 눈은 예리했다.
"췌장암 4기. 훔친 시간으로 3년 연장. 남은 시간... 약 6개월?"
"맞아요."
"이미 곳곳에 균열이 보이네. 훔친 시간이 무너지고 있어."
소미가 준혁의 손목을 잡았다. 그의 피부가 희미하게 투명해 보였다.
"3개월도 안 남았어. 길어야."
준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언니, 방법이 없어요?"
서린이 물었다.
"둘 다 살리는 방법. 민우 씨도 구하고 준혁도..."
"있긴 해."
소미가 캐비닛으로 걸어갔다. 맨 위 서랍을 열어서 오래된 가죽 노트를 꺼냈다.
"'시간의 균형' 이론. 아주 옛날 시간 채집자들이 연구했던 거야."
그녀가 노트를 펼쳤다. 낡은 페이지에 복잡한 도표와 글씨들이 가득했다.
"시간은 빚이 될 수 있어. 하지만 선물도 될 수 있지. 누군가 자발적으로 자신의 시간을 주면, 그건 빚이 아니라 선물이 돼."
"자발적으로요?"
"응. 훔친 시간이 아니라 준 시간이어야 해."
소미가 서린을 봤다.
"네가 10년간 채집한 시간들. 그걸 풀어서 둘에게 나눠주면 돼. 민우한테는 그가 잃어버린 시간의 의미를, 준혁한테는 그가 훔치지 않아도 됐던 시간을."
서린은 숨을 들이켰다. 10년치 채집물. 그녀의 전부였다.
"전부... 다요?"
"응. 전부. 그래야 균형이 맞아."
"그럼 난..."
"너는 다시 시작하는 거지. 처음부터."
소미가 서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쉬운 결정은 아니야. 10년이잖아. 하지만 생각해봐. 넌 그 10년 동안 시간을 채집만 했지, 산 적은 없었어. 어쩌면 이게 기회일 수도 있어. 진짜로 살 수 있는."
서린은 창밖을 봤다. 햇빛이 비스듬히 들어오고 먼지가 빛 속에서 춤췄다.
"생각해볼게요."
"서린 씨."
준혁이 말했다.
"안 그래도 돼요. 저는... 이미 빌린 시간으로 살았어요. 이제 그만..."
"가만있어요."
서린이 날카롭게 말했다. 준혁은 입을 다물었다.
"포기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내가 결정할게요. 당신 말고."
소미가 피식 웃었다.
"서린이 저렇게 말하는 거 처음 보네."
3.
오후. 서린과 준혁은 함께 민우의 과거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찾아야 할 건 뭐예요?"
준혁이 물었다. 서린은 노트를 펼쳤다. 민우의 휴대폰에서 발견한 것들.
"첫사랑. 민우 씨가 말했어요. 이름은 기억 안 나지만 얼굴은 기억난다고."
"연락처는요?"
"없어요. 연락처 자체가 없어요. 아예 지운 것 같아요."
준혁은 잠시 생각했다.
"민우 씨 회사 가봐요. 거기 동료들이 알 수도 있어요."
"폐업했다고 했잖아요."
"폐업했어도 사람들은 어딘가 있죠."
준혁이 핸드폰을 꺼냈다. 검색을 시작했다.
"민우 씨 회사... '타임웰 컨설팅'. 2022년 5월 폐업. 대표는... 최진수. 이 사람 찾아봐요."
그들은 최진수를 찾아갔다. 그는 이제 다른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강남의 작은 사무실.
"강민우요? 아, 기억하죠. 우리 회사 최고 컨설턴트였어요."
최진수는 40대 중반의 말쑥한 남자였다.
"근데 왜 갑자기 그 사람 얘기를...?"
"개인적인 일이에요. 혹시 민우 씨 첫사랑에 대해 아세요?"
"첫사랑이요? 아... 한 번 들은 것 같은데."
최진수가 기억을 더듬었다.
"회식 자리에서 누가 물어봤었어요. 민우 씨한테 연애는 안 하냐고. 그때 민우 씨가 잠깐 얘기했죠. 대학 때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다고. 근데 데이트 한 번 못 해봤대요."
"왜요?"
"바빠서요. 뭐 때문에 바빴는지는 기억 안 나는데... 아, 보고서. 중요한 보고서 때문에 데이트를 취소했다고 했던 것 같아요."
서린은 받아 적었다.
"그 사람 이름은요?"
"그건 몰라요. 민우 씨가 안 말해줬어요. 근데 하나 기억나는 게, 그 사람이 미대생이었대요. 그림 그리는 사람."
"대학은요?"
"같은 대학이었다고 했어요. 민우 씨가 경영학과였으니까... 같은 학교 미대?"
서린은 민우의 출신 대학을 알고 있었다. 휴대폰에 학교 동문회 연락처가 있었으니까.
"감사합니다."
사무실을 나오며 준혁이 물었다.
"어떻게 찾을 거예요? 이름도 모르는데."
"학교 가야죠. 미대. 그리고 2000년대 초반 졸업생 명단 찾아보고."
"그게 가능해요?"
"해봐야죠."
4.
그들은 민우의 모교를 찾아갔다. 오래된 대학. 캠퍼스는 가을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미대 건물. 서린은 행정실에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졸업생 명단 좀 볼 수 있을까요?"
"무슨 일이세요?"
"개인적인 일이에요. 오래된 친구를 찾고 있어서요."
직원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들을 봤다.
"개인정보라서요... 쉽게 드릴 수가 없는데."
준혁이 나섰다.
"제가 이 학교 졸업생이에요. 확인해보세요."
그는 거짓말을 자연스럽게 했다. 직원은 잠시 망설이다가 오래된 졸업 앨범 몇 권을 꺼내줬다.
"여기서 찾아보세요. 사진만요. 이름은 가렸으니까."
서린은 앨범을 펼쳤다. 2003년. 2004년. 2005년. 수백 명의 얼굴들.
민우가 말했던 것. "웃을 때 눈이 초승달 모양이 됐어요."
서린은 한 장 한 장 넘겼다. 준혁도 옆에서 함께 봤다.
10분. 20분. 30분.
"여기."
서린의 손이 한 페이지에서 멈췄다. 한 여자의 졸업 사진. 웃고 있었다. 눈이 초승달 모양이었다.
"이 사람인 것 같아요."
서린이 사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름은 테이프로 가려져 있었다.
"어떻게 확신해요?"
"느껴져요. 이 사진에서... 시간의 잔향이."
서린은 사진에 손을 댔다. 순간, 무언가가 느껴졌다. 따뜻한 봄날. 캠퍼스 벤치. 두 사람. 멀리서 바라보는 남자.
민우였다.
그는 용기를 내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다. 그날도. 그다음 날도.
"선생님, 이 사람 이름 좀 알려주실 수 있어요?"
직원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정말..."
"제발이에요. 정말 중요한 일이에요."
서린의 눈에 간절함이 있었다. 직원은 한숨을 쉬었다.
"잠깐만요."
그녀가 컴퓨터를 확인했다. 그리고 작은 쪽지에 이름을 적어 주었다.
이수진
"감사합니다."
밖으로 나오며 준혁이 물었다.
"이제 이 사람 찾아가는 거예요?"
"네. 근데 어떻게 찾죠?"
"SNS요. 요즘 사람들 다 하잖아요."
준혁이 핸드폰을 꺼내 검색했다. 이수진. 미술. 2012년 졸업.
"있어요. 여기."
화면에 한 여자의 프로필이 떴다. 프로필 사진. 초승달 눈의 여자. 조금 나이 들었지만 분명했다.
"화가네요. 개인 작업실이 있어요. 홍대 근처."
"가봐요."
5.
홍대 골목 안쪽. 작은 작업실 겸 갤러리.
서린과 준혁은 문 앞에 섰다. 유리문 너머로 그림들이 보였다. 추상화들이 마치 시간을 그린 것 같았다. 흐르고, 멈추고, 뒤엉키는 시간들.
문을 열었다. 종이 울렸다.
"어서 오세요."
여자가 안쪽에서 나왔다. 이수진이었다. 40대 초반으로 보이고 여전히 웃을 때 눈이 초승달 모양이었다.
"그림 보러 오셨어요?"
"아니요. 사실은..."
서린이 말하려는데, 준혁이 먼저 물었다.
"혹시 강민우라는 사람 아세요?"
이수진의 얼굴이 굳었다. 붓을 쥔 손이 떨렸다.
"민우를... 어떻게 아세요?"
"개인적인 일로 찾고 있어요. 그 사람과 관련된 일을."
이수진은 한참을 그들을 바라보다가, 작업실 안쪽으로 안내했다.
"앉으세요."
그들은 작업 테이블에 앉았다. 이수진은 차를 내왔다.
"민우는... 어떻게 지내요?"
"그게..."
서린이 망설였다. 어디까지 말해야 할까?
"실종됐어요. 3년 전에. 우리는 그 사람을 찾고 있어요."
이수진의 눈이 커졌다.
"실종? 3년 전?"
"네. 그리고 그 사람을 찾으려면... 그 사람이 잃어버린 시간들을 찾아야 해요. 그중 하나가 당신과 관련된 시간인 것 같아요."
"무슨 소리예요?"
"민우 씨가 말했어요. 대학 때 첫사랑이 있었다고. 그런데 데이트를 한 번도 못 했다고."
이수진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녀는 닦지 않았다.
"그 사람이... 나를 기억하고 있었구나."
"무슨 일이 있었어요?"
이수진은 창밖을 봤다. 가을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왔다.
"2005년 봄이었어요. 졸업 직전. 민우가 용기 내서 나한테 말했어요. 좋아한다고. 데이트하자고."
그녀가 쓸쓸하게 웃었다.
"나도 그 사람 좋아했어요. 도서관에서 늘 봤거든요. 항상 혼자 공부하는 모습. 진지하고 성실한 사람 같았어요."
"그래서요?"
"데이트 날짜를 잡았어요. 일요일. 봄날. 한강 공원에서 만나기로 했죠. 나는 정말 기대했어요. 새 옷도 사고, 머리도 하고."
이수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근데 그날 아침. 문자가 왔어요. '미안해. 급한 일이 생겨서 못 갈 것 같아. 다음에 보자.' 그게 전부였어요."
"다음은 없었어요?"
"없었어요. 나는 기다렸어요. 한 달, 두 달. 근데 민우는 연락하지 않았어요. 졸업식 날도 안 왔어요. 나중에 친구한테 들었어요. 그 사람이 대기업에 입사했다고. 그날 최종 면접이 있었대요. 일요일인데도."
서린은 노트에 적었다. 2005년 봄. 일요일. 취소된 데이트.
"그 후로는요?"
"못 봤어요. 연락처도 지웠어요. 상처받았거든요. 내가 그 사람한테 면접보다 덜 중요했다는 게."
이수진이 눈물을 닦았다.
"근데 이상한 게 뭔지 알아요? 나는 그날을 잊지 못했어요. 20년이 지났는데도. 나는 계속 그날 한강 공원에 앉아 있는 것 같았어요. 아무도 안 오는 벤치에."
서린은 느꼈다. 공기의 변화를. 이수진 주변에서 무언가가 일렁이고 있었다.
"지금도요?"
"네. 지금도. 나는 가끔 꿈을 꿔요. 그날의 꿈을. 한강 공원. 벤치. 봄바람. 그리고 오지 않는 사람."
서린은 바이알을 꺼냈다.
"제가... 이상한 질문 하나 할게요. 그날 당신이 앉아 있던 벤치. 어디였어요?"
"여의도 한강 공원. 벚꽃나무 아래."
"지금도 있어요? 그 벤치?"
"있을 거예요. 20년 전 벤치인데."
서린은 준혁을 봤다. 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수진 씨. 우리 그 벤치에 가봐요. 같이."
6.
여의도 한강 공원. 해질녘.
벚꽃나무는 이미 꽃이 다 졌다. 가을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무와 그 아래 벤치는 거기 있었다.
이수진은 천천히 벤치에 다가갔다. 서린은 그녀의 뒤를 따랐다. 준혁은 조금 떨어져서 지켜봤다.
"여기요."
이수진이 벤치에 손을 댔다.
"20년 전, 나는 여기 앉아서 두 시간을 기다렸어요. 핸드폰만 보면서. 혹시 전화 올까봐, 문자 올까봐."
서린은 벤치 옆에 섰다. 눈을 감고 느꼈다.
시간이 고여 있었다.
20년 전의 시간. 기다림의 시간. 그것이 벤치에 스며들어 있었다. 나무에도 땅에도.
"여기 앉아봐도 돼요?"
서린이 물었다. 이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린은 이수진 옆에 벤치에 앉았다. 둘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강을 바라봤다. 해가 지고 있었다.
"보여요?"
이수진이 물었다.
"네?"
"당신, 뭔가 보는 사람이죠? 남들이 못 보는 걸."
서린은 놀라 이수진을 봤다.
"어떻게...?"
"느껴져요. 당신이 여기 앉았을 때, 뭔가 달라졌어요. 공기가."
이수진이 서린의 손을 잡았다.
"내가 여기 남겨둔 시간. 그걸 가져가도 돼요. 나는 이제... 놓아줘도 될 것 같아요."
"정말요?"
"네. 20년이면 충분히 기다렸어요. 이제 그만 기다리고 싶어요."
서린은 바이알을 꺼냈다. 마개를 열었다.
순간, 벤치에서 무언가가 피어올랐다. 봄날의 기억. 벚꽃 향기, 설렘 그리고 깊은 외로움.
그것들이 소용돌이치며 바이알 안으로 들어갔다. 이수진의 20년, 기다림의 20년, 그 밀도 높은 시간이 작은 유리병 안에 담겼다.
병이 가득 차자, 서린은 마개를 닫았다.
이수진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웃었다. 진짜로 웃었다.
"가벼워졌어요. 처음으로."
"힘들지 않았어요?"
"힘들었어요. 근데 이제 괜찮아요. 나는 그날을 기억하지만, 더 이상 그날에 갇혀 있지 않아요."
이수진이 일어나, 벤치를 한 번 쓰다듬었다.
"민우를 찾거든 전해줘요. 괜찮다고. 나는 행복하게 살았다고. 그 사람도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전할게요."
이수진은 그들에게 고개를 숙이고 걸어갔다. 석양 속으로. 그녀의 뒷모습은 가벼워 보였다. 정말로.
준혁이 다가왔다.
"채집했어요?"
"네. 20년치 기다림."
서린은 바이알을 빛에 비춰봤다. 병 속에서 봄날의 빛이 반짝였다. 벚꽃 같았다.
"이게... 민우 씨가 놓친 시간이에요. 그가 선택하지 않은 시간. 만약 그날 면접을 포기하고 데이트에 갔다면, 이런 시간을 살았을 거예요."
"아름답네요."
"슬프기도 해요."
서린이 병을 가방에 넣었다.
"가요. 민우 씨한테 가서 이것도 돌려줘야 해요."
7.
밤 9시. 동숭동 빌딩 지하.
서린과 준혁은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버튼을 누르니 문이 열렸다.
민우는 여전히 45초에 갇혀 거기 있었다.
"왔어요."
서린이 말했다. 민우의 눈이 천천히 그들을 봤다.
"두 분이서요?"
"네. 이 사람은 이준혁이에요. 당신을 돕고 싶어 하는 사람."
준혁은 민우를 똑바로 못봤다. 그의 얼굴에 죄책감이 가득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카페요. 예전에 자주 오셨잖아요."
민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다. 바리스타. 친절하던..."
"네. 저예요."
침묵이 흘렀다. 서린이 분위기를 깼다.
"오늘은 두 번째 시간을 가져왔어요."
그녀는 바이알을 꺼냈다. 봄날의 빛이 담긴 병.
"이수진이라는 사람. 기억나세요?"
민우의 눈이 흔들렸다.
"수진이..."
"네. 당신의 첫사랑이에요. 2005년 봄, 당신이 가지 않은 데이트, 그날 그녀가 벤치에서 기다렸던 시간, 20년간 간직했던 시간."
서린이 마개를 열었다.
봄날이 쏟아졌다.
벚꽃 향기, 따뜻한 바람, 설렘, 그리고 용서. 그것들이 민우를 감쌌다. 천천히, 부드럽게.
민우의 얼굴에서 무언가가 녹아내렸다. 얼어붙었던 감정들이. 그의 입술이 떨렸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눈물이 흘렀다. 물방울이 땅에 떨어지는 데 5초가 걸려 떨어졌다. 시간이 조금 더 빨라지고 있었다.
빛이 그의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 벤치에 앉아 기다리던 여자의 기억이, 20년의 기다림 그리고 용서가.
"그녀가 말했어요. 괜찮다고. 행복했다고."
서린이 말했다.
"당신도 행복했으면 좋겠대요."
민우는 한참을 울었다. 45초짜리 순간 안에서도 울음은 길었다.
빛이 다 스며들었다. 바이알이 비었다. 서린은 마개를 닫았다.
"고맙습니다..."
민우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조금 더 빨라졌다. 정상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직 더 있어요. 찾아야 할 시간들이."
"알아요. 하지만 이미... 많이 가벼워졌어요. 느껴져요. 조금씩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아요."
민우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아주 조금. 하지만 움직였다. 3년 만에 처음.
준혁이 앞으로 나섰다.
"민우 씨."
"네?"
"제가... 할 말이 있어요."
준혁의 목소리가 떨렸다. 서린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괜찮다는 듯이.
"저는... 당신의 시간을 훔쳤어요. 3개월 동안. 카페에서. 당신이 낭비하는 것처럼 보였던 시간들을."
민우는 준혁을 봤지만 표정은 읽기 힘들었다.
"그게... 당신을 여기 가둔 이유 중 하나였어요. 미안합니다. 정말로."
준혁이 고개를 숙였다. 90도로.
"용서해달라는 게 아니에요. 그냥... 알아야 할 것 같아서요."
침묵이 흘렀다. 긴 침묵. 민우는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
"당신이... 훔쳤다는 그 시간들. 그게 뭐였죠?"
"출근길 멍 때리던 시간, 점심시간 혼자 밥 먹던 시간, 잠들기 전 천장 보던 시간... 쓸모없어 보였던 시간들이요."
민우가 쓸쓸하게 웃었다.
"쓸모없었죠. 제게도. 저는... 모든 시간을 효율로만 생각했으니까. 의미 없는 시간은 낭비라고 생각했어요."
"..."
"근데 여기 갇혀서 알았어요. 그 시간들이 진짜로 중요했다는 걸. 쓸모없어 보였던 그 순간들에 제 삶이 있었다는 걸."
민우가 준혁을 봤다.
"당신은... 왜 훔쳤어요?"
"살고 싶어서요. 저는 죽어가고 있었어요. 그래서..."
"지금은요?"
"여전히 죽어가고 있어요. 곧."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는 비슷하네요. 저는 시간에 갇혔고, 당신은 시간이 없고."
"..."
"용서할게요."
준혁이 고개를 들었다. 민우가 미소 짓고 있었다.
"우리 둘 다 시간을 잘못 이해했던 거예요. 나는 너무 아껴서 쓰지 않았고, 당신은 급해서 훔쳤고. 둘 다 틀렸어요."
"민우 씨..."
"우리 같이 배워요. 시간을 어떻게 쓰는 건지. 당신이 저를 돕고, 저도 당신을 도울게요."
준혁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서린은 두 남자를 바라봤다. 시간에 갇힌 사람과 시간을 훔친 사람. 그들이 서로를 용서하고 있었다.
"가요."
서린이 말했다.
"아직 찾아야 할 시간이 많아요."
8.
엘리베이터를 나와 밖으로 걸으며, 준혁이 물었다.
"다음은 뭐예요?"
"어머니. 민우 씨 어머니의 생일."
"언제인데요?"
"모레예요."
서린이 노트를 봤다.
"10월 20일. 3년 전 민우 씨가 실종되기 이틀 전. 그날이 어머니 생일이었어요. 민우 씨는 회식 때문에 못 갔대요."
"어머니는 어디 계세요?"
"인천 요양원요. 치매가 오셨대요."
준혁은 한숨을 쉬었다.
"힘든 얘기네요."
"다 힘든 얘기예요. 사람의 후회는 다 힘들어요."
그들은 버스 정류장에 섰다. 밤이 깊었다.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서린 씨."
"네?"
"고마워요. 민우 씨한테... 저를 그렇게 소개해줘서."
"뭐라고 소개했는데요?"
"돕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고."
준혁이 하늘을 봤다. 별은 보이지 않았다.
"저는 그냥 죄책감 때문인 줄 알았어요. 근데 당신이 그렇게 말해주니까... 정말로 돕고 싶어지더라고요."
"원래 그런 거예요. 말이 사람을 만드는 거."
버스가 왔다. 그들은 탔다. 거의 빈 버스. 맨 뒷자리에 앉았다.
"서린 씨는요."
준혁이 창밖을 보며 물었다.
"왜 이렇게까지 해요? 민우 씨를 위해서?"
"모르겠어요. 그냥... 해야 할 것 같아서요."
"그것뿐이에요?"
서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 후에 말했다.
"10년 전에... 친구가 하나 있었어요. 유진이라고."
"네."
"그 친구가 제 앞에서 사고로 죽었어요. 근데 저는 그 순간을 채집하지 못했어요."
"왜요?"
"무서웠어요. 죽음의 시간은 너무 무거웠어요. 감당할 수 없었어요."
서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 후로 10년간 후회했어요. 그 순간을 잡지 못한 걸. 유진이의 마지막 시간을 지키지 못한 걸."
"그래서 민우 씨를...?"
"이번에는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도망치고 싶지 않아요."
준혁은 서린을 봤다. 그녀의 옆얼굴, 창밖 불빛에 반쯤 가려진.
"저도 도와줄게요. 끝까지."
"고마워요."
버스는 밤길을 달렸다. 두 사람은 말없이 창밖을 봤다. 서울의 밤, 수많은 불빛들. 각각의 불빛 뒤에는 사람이 있었다. 각자의 시간을 살고 있는.
어떤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어떤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어떤 시간은 잃어버리고, 어떤 시간은 도난당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