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채집자 3화 : 첫 번째 시간

첫 번째 시간

by Rich and Growth

1.

새벽 4시.

한서린은 잠들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눈에는 보였다. 공기 중을 떠다니는 시간의 알갱이들. 희미하게 빛나는, 먼지 같은 것들.


민우의 휴대폰.

소미가 어떻게든 구해줬다. "철거 예정 건물이라 경비가 허술하더라. 지하 엘리베이터 옆 사물함에 있었어." 3년 전 그날, 민우가 마지막으로 들고 있던 것.


서린은 일어나 책상으로 갔다. 오래된 스마트폰이 거기 놓여 있었다. 화면은 깨져 있었지만 전원은 들어왔다. 배터리가 5%밖에 남지 않았다.

손가락이 떨렸다. 잠금 해제. 다행히 비밀번호가 없었다.

홈 화면.

깔끔하게 정리된 앱들.

폴더 이름들: 업무, 일정관리, 건강, 금융.

여가 같은 폴더는 없었다.


서린은 통화 기록을 열었다. 마지막 통화. 2022년 3월 15일 오전 8시 47분.

아버지 (휴대폰)통화 시간: 00:47

47초.

서린은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47초짜리 통화. 아버지와의 마지막 통화가 1분도 안 됐다.


그녀는 노트를 펼쳤다. 민우가 어제 말했던 것을 기억했다.

"아버지... 어머니... 대학 때 친구들..."

서린은 연락처를 뒤졌다. '아버지'라는 이름은 없었다. '아빠'도 없었다.

강태수 (부)

거기 있었다.


마지막 통화 시각 옆에 희미하 글씨들이 움직인다.

통화 중 끊김 - 회의 때문

서린은 눈을 감았다. 상상이 됐다. 바쁜 아침. 출근길. 아버지의 전화. "바빠서 나중에 할게요." 끊는 통화.

그리고 아버지는 그 후 다시 전화하지 않았다.

왜?

서린은 인터넷 검색을 열었다. '강태수'라는 이름과 날짜를 입력했다.

기사가 하나 나왔다.


'70대 남성,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 심근경색 추정'

2022년 3월 17일

2022년 3월 15일 통화. 3월 17일 사망.

이틀.


민우가 아버지와 47초 통화를 끊은 지 이틀 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서린의 손이 떨렸다. 핸드폰을 꽉 쥐었다. 화면이 흐려졌다. 눈물 때문이 아니었다. 시간의 잔향 때문이었다.


휴대폰에서 무언가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희미한 빛. 그것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가, 어딘가로 흘러갔다. 창문 밖으로.

서린은 창문을 열었다. 새벽 공기가 차갑게 들어왔다. 빛의 흔적은 도시 어딘가로 사라지고 있었다.

"찾아야 해..."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 통화의 나머지를."


2.

오전 9시. 서린은 소미의 고물상에 있었다.

"시간의 잔향은 물리적 장소에 남아."

소미가 오래된 지도를 펼쳤다. 서울 지도. 곳곳에 형광펜으로 표시가 되어 있었다.

"통화가 끊긴 곳을 찾아야 해. 민우가 전화를 끊은 바로 그 장소. 거기에 '하지 못한 대화'의 흔적이 남아 있을 거야."

"어떻게 찾죠?"

"휴대폰 GPS 기록. 확인해봤어?"

서린은 민우의 휴대폰을 꺼냈다. 소미가 받아들고 능숙하게 조작했다.

"있네. 위치 서비스. 2022년 3월 15일 오전 8시 47분..."

그녀가 주소를 적었다.

"광화문. 세종대로. 버스 정류장 근처네."

"거기 가면 뭐가 있을까요?"

"모르지. 3년이 지났으니까. 하지만 시간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아. 특히 강한 감정이 실린 시간은."


소미가 서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조심해. 다른 사람의 시간을 추적하는 건 위험해. 그 사람의 감정이 네게 전이될 수 있어. 후회, 죄책감, 고통... 그런 것들."

"괜찮아요."

서린이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3.

광화문. 세종대로.

서린은 버스 정류장 앞에 섰다. 출근 시간. 사람들이 바쁘게 오갔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사람들, 전화를 하며 걷는 사람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소음을 차단했다. 그리고 느꼈다. 시간의 흐름을.

대부분은 빠르게 흘렀다. 바쁜 아침의 시간. 하지만 한 곳만, 딱 한 곳만 공기가 달랐다.

버스 정류장 끝. 광고판 옆.

서린은 천천히 그곳으로 걸어갔다. 가까이 갈수록 공기가 무거워졌다. 3년 전의 시간이 그곳에 고여 있었다.

그녀는 멈춰 섰다. 광고판 앞. 그리고 봤다.

잔상.

희미한 형체. 정장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있었다. 얼굴은 흐릿했지만, 표정은 알 수 있었다.

초조함. 짜증. 그리고... 미안함.

잔상의 입이 움직였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서린은 입 모양을 읽을 수 있었다.


"아버지, 지금 바빠서요. 나중에 다시 전화드릴게요."

그리고 통화 종료.

잔상은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회사로. 회의로. 중요한 일로.

서린은 그 자리에 서서 공기를 느꼈다. 끊긴 대화. 하지 못한 말들. 그것들이 공기 중에 떠돌고 있었다.

그녀는 바이알을 꺼냈다. 마개를 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이상한데..."

서린이 중얼거렸다. 분명 시간의 잔향이 있었다. 하지만 채집되지 않았다. 왜?

그때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쳤다.

"실례합니다."


노인이었다. 70대쯤 되어 보였다. 낡은 코트를 입고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여기서 뭐 하세요?"

"아... 죄송합니다. 그냥..."

"보이나요? 당신한테도?"

노인의 목소리가 낮았다. 서린은 깜짝 놀라 노인을 똑바로 봤다. 노인의 눈. 흐린 눈동자. 하지만 그 속에 뭔가가 있었다.

"뭐가... 보인다는 거죠?"

"저 사람. 전화하던 사람. 3년 전부터 거기 서 있어요. 매일 아침 8시 47분이 되면 나타나서, 같은 통화를 하고, 사라져요."

서린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할아버지도... 보이세요?"

"보이죠. 저도 당신 같은 사람이었으니까."

노인이 쓸쓸하게 웃었다.

"예전에는요. 지금은 눈이 흐려서 잘 안 보여요. 하지만 저 사람은 너무 선명해서 아직도 보이죠."

"왜 저 사람은 계속 거기 있는 거죠?"


"끝나지 않은 대화니까요. 그 사람은 전화를 끊었지만, 아버지는 끝내지 않았어요. 할 말이 남아 있었으니까."

노인이 광고판을 가리켰다.

"진짜 시간은 저기 있어요. 이건 그냥 메아리일 뿐이에요."

"진짜 시간이요?"

"아버지가 하고 싶었던 말. 그게 어딘가에 있어요. 찾아야죠. 그걸 찾아서 그 사람한테 돌려줘야 해요."

서린은 노인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어떻게 찾아요?"


"아버지가 있던 곳으로 가야죠."

노인이 지팡이로 땅을 두드렸다.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죽은 사람의 시간은 그들이 마지막으로 있던 곳에 남아요. 집. 병원. 무덤. 어딘가에."


4.

오후 2시. 서린은 경기도 의정부에 있었다.

강태수의 집. 빈집이었다. 3년 전 주인이 세상을 떠난 후, 아들이 상속받았지만 처리하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었다. 민우가 실종된 것도 그 무렵이었으니까.

서린은 현관문 앞에 섰다. 잠겨 있었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도 없었다. 작은 동네. 조용한 주택가.

창문 하나가 살짝 열려 있었다. 서린은 담을 넘어 마당으로 들어갔다. 잡초가 무성했다. 우편함에는 3년치 광고 전단지가 쌓여 있었다.


창문으로 들어갔다. 먼지 냄새. 오래된 집 냄새.

거실.

가구들이 그대로 있었다. 낡은 소파, 오래된 TV, 식탁. 하지만 모든 게 회색빛이었다. 먼지가 쌓여서.

서린은 천천히 집 안을 둘러봤다. 시간의 흔적을 찾으며.

거실. 부엌. 화장실. 작은 방.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너무 많았다. 집 전체가 시간으로 가득했다. 한 사람이 평생 살았던 집. 수십 년의 시간이 벽에, 바닥에, 천장에 스며 있었다.


서린은 안방으로 갔다.

문을 열었다.

순간, 온도가 떨어졌다.

방 안은 다른 곳보다 차갑고 어두웠다. 침대. 옷장. 책상. 그리고...

창가에 의자 하나.


서린은 그 의자에 다가갔다. 가까이 갈수록 공기가 무거워졌다. 의자 위에 뭔가가 놓여 있었다.

오래된 휴대폰.

서린은 손을 뻗었다.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차갑고 무거웠다. 전원을 켰다. 배터리는 당연히 없었다.


하지만 서린의 손에서 무언가가 흘러나왔다. 그녀의 능력. 시간을 보는 능력. 그것이 휴대폰으로 전달되었다.

화면이 켜졌다. 아니, 화면이 아니었다. 환영이었다.

휴대폰 화면에 글자가 떠올랐다.


받지 않은 통화: 아들 (3)

서린은 통화 기록을 열었다. 그리고 봤다.


2022년 3월 15일 오전 8시 47분 - 통화 중 끊김

2022년 3월 15일 오후 7시 23분 - 부재중

2022년 3월 16일 오전 9시 15분 - 부재중


세 번.

아버지는 두 번 더 전화했었다.

민우는 받지 않았다.

서린은 휴대폰을 꽉 쥐었다. 그리고 느꼈다. 휴대폰에서 흘러나오는 감정을.

기다림. 외로움. 그리고... 용서.


"아들아..."

목소리가 들렸다. 휴대폰에서. 아니, 휴대폰 너머에서.

"괜찮아. 바쁜 거 아니까."

서린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는데. 뭐였더라..."

목소리가 흐려졌다. 멀어졌다.

"아, 그래. 사랑한다고. 그 말 하고 싶었어."


서린은 주저앉았다. 무릎을 꿇었다. 휴대폰을 두 손으로 감쌌다.

방 안의 공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희미한 빛들이 공중에서 모였다. 그것들이 서린의 손 안으로 모여들었다. 휴대폰으로.

그리고 휴대폰에서 작은 빛의 구슬이 떠올랐다.

투명하고 따뜻한 빛.

서린은 재빨리 바이알을 꺼냈다. 마개를 열었다. 빛의 구슬이 유리병 안으로 들어갔다.


아버지가 하고 싶었던 말.

"사랑한다."

서린은 바이알을 봤다. 병 속에서 빛이 따뜻하게 반짝였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마개를 닫았다.

"찾았어..."

그녀가 속삭였다.

"민우 씨의 첫 번째 시간."


5.

밤 10시. 동숭동 빌딩 지하.

서린은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손에는 바이알이 들려 있었다. 따뜻한 빛을 담은 병.

버튼을 눌렀다. 끼익— 문이 열렸다.

민우가 거기 있었다. 여전히 45초에 갇혀 있는.

"왔어요."

서린이 말했다. 민우의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여 그녀를 봤다.

"찾았어요. 당신 아버지가 하고 싶었던 말."

서린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끈적한 공기. 느린 시간. 그녀는 민우 앞에 섰다.

"이걸 돌려드릴게요."

바이알의 마개를 열었다.


순간, 빛이 쏟아져 나왔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빛. 그것이 민우를 감쌌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민우의 눈이 커졌다. 그의 입술이 떨렸다.

"아버지..."

목소리가 갈라졌다. 3년 만에 처음으로 감정이 실린 목소리였다.

빛이 민우의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의 주변을 감싸고 있던 시간의 알갱이들이 조금 풀어졌다. 아주 조금.


"사랑한다..."

민우가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에서 눈물이 흘렀다. 아주 천천히.


서린은 그를 지켜봤다. 빛이 다 스며들 때까지. 바이알이 다시 비었다.

"고맙습니다..."

민우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느렸지만, 전보다 조금 더 빨랐다. 시간이 조금 풀어졌다.

"아직 멀었어요."

서린이 말했다.

"이건 첫 번째 시간일 뿐이에요. 당신이 잃어버린 시간은 훨씬 많아요."

"알아요. 하지만..."

민우가 미소 지었다. 3년 만에 처음으로.


"시작은 된 것 같아요. 느껴져요. 조금 가벼워진 게."

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나왔다. 문이 닫혔다. 민우는 다시 그 안에 홀로 남았다.

하지만 이제는 혼자가 아니었다.

누군가 그를 찾고 있었다. 그의 시간을.


6.

서린은 빌딩 밖으로 나왔다. 밤바람이 시원하게 불었다.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별은 보이지 않았다. 서울의 밤하늘에는 별이 없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문자 메시지.


"서린 씨, 커피 한잔 어때요? 근처 카페에 있어요. - 준혁"

서린은 문자를 보며 멈춰 섰다. 준혁. 그는 왜 자꾸 나타나는 걸까? 왜 민우에 대해 그렇게 많이 아는 걸까?

그녀는 망설이다가 답장을 보냈다.

"어디세요?"

답장이 바로 왔다.

"빌딩 앞 24시간 카페. 창가 자리에 있어요."

서린는 주변을 둘러봤다. 빌딩 건너편에 작은 카페가 있었다. 불이 켜져 있었다. 창가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준혁이었다.

그는 손을 흔들었다.

서린은 긴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카페로 걸어갔다.

뭔가 시작되고 있었다.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피할 수 없었다.

민우를 구하려면, 준혁을 만나야 했다.

카페 문을 열었다. 종소리가 울렸다. 준혁이 미소 지으며 일어섰다.

"오셨네요. 주문 해드릴까요?"

"아메리카노요."

"알겠습니다."

준혁이 카운터로 갔다. 서린은 창가 자리에 앉았다. 빌딩이 보였다. 지하에 민우가 있었다. 아직도 45초 안에서.

"여기요."

준혁이 커피 두 잔을 가져왔다. 앉았다. 그리고 말했다.


"오늘 뭐 하셨어요? 광화문에 다녀오신 것 같던데."

서린의 손이 멈췄다. 컵을 들려던 손이.

"어떻게 알아요?"

"봤어요. 우연히."

준혁이 웃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웃지 않았다.

"서린 씨, 우리 솔직하게 얘기해요. 당신은 민우 씨를 구하려고 하고 있죠? 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으려고."

"..."

"저도 도와줄 수 있어요."

"왜요?"

서린이 날카롭게 물었다.

"왜 도와주려고 해요? 당신은 민우 씨랑 무슨 관계예요?"

준혁은 한동안 커피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그 사람을 알았어요. 예전에. 그리고..."

그가 머뭇거렸다.


"제 잘못 때문에 그 사람이 저렇게 된 것 같아서요."

서린은 준혁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의 주변 공기가 흐릿했다. 뭔가 숨기고 있었다.

"무슨 잘못이요?"

"지금은 말할 수 없어요. 하지만 언젠가... 말할게요."

준혁이 서린의 눈을 똑바로 봤다.


"일단 저를 믿어주세요. 저도 그 사람을 구하고 싶어요. 진심으로."

서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쓰고 뜨거웠다.

창밖으로 빌딩이 보였다. 어둠 속에 잠긴 건물. 그 지하에 갇힌 남자.

그리고 그 남자를 구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


시간 채집자. 시간 도둑. 그리고 시간 정지자.

이상한 조합.

이것이 시작이었다.


이전 02화시간 채집자 2화 : 정지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