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된 사람
1.
박소미의 고물상은 낡은 주택가 골목 끝에 있었다. 간판도 없었다. 그냥 '고물'이라고 삐뚤빼뚤 쓴 종이가 문에 붙어 있을 뿐이었다. 서린은 녹슨 문을 밀고 들어갔다.
땡그랑—
오래된 종소리가 울렸다. 아니, 종소리가 울렸다가, 다시 울렸다가, 또 울렸다. 같은 소리가 시차를 두고 세 번 반복되었다. 서린은 익숙하다는 듯 신발을 벗었다.
"소미 언니?"
"안쪽이야."
목소리가 들렸다. 서린은 좁은 복도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고물상이라고 하기엔 이상한 물건들이 가득했다. 멈춰 있는 시계들, 녹슨 진자시계, 깨진 모래시계, 그리고... 시간의 잔향들. 서린의 눈에만 보이는, 투명하게 떠다니는 것들.
소미는 오래된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28살이지만 마치 오래전부터 여기 있었던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빈티지 블라우스에 여러 개의 시계를 찬 손목, 1950년대 스타일로 말아올린 머리. 그녀는 손에 든 회중시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1923년제 회중시계. 주인이 전쟁터에서 죽으면서 멈췄대. 근데 이상한 게 뭔지 알아?"
소미가 서린을 보지도 않고 물었다.
"뭔데요?"
"이 시계, 하루에 한 번씩 움직여. 정확히 오후 3시 42분에. 딱 1초만. 그 주인이 죽은 시간이래."
서린은 시계를 들여다봤다. 오래된 놋쇠 케이스, 금이 간 유리, 멈춰 있는 바늘. 하지만 그 주변으로 희미한 빛이 맴돌고 있었다. 죽은 사람의 시간.
"언니, 나... 이상한 사람을 봤어요."
소미가 고개를 들었다. 짙은 아이라이너를 그은 눈이 서린을 똑바로 바라봤다.
"이상한 사람? 너한테 이상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어?"
"엘리베이터 안에 갇힌 사람이요. 3년째 45초 안에 있대요."
소미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는 회중시계를 책상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서?"
"동숭동 옛날 빌딩. 지하 엘리베이터."
"이름은?"
"강민우. 35살. 시간 관리 컨설턴트였대요."
소미가 날카롭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녀는 책장으로 걸어가더니 오래된 파일철을 꺼냈다. 먼지가 풀썩 날렸다.
"강민우... 강민우..."
그녀가 중얼거리며 파일을 뒤적였다. 서린은 조용히 기다렸다. 소미는 그녀가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시간이 이상하게 흐르는 걸 볼 수 있는 다른 사람.
"있다."
소미가 낡은 신문 기사 스크랩을 꺼내 들었다. 2022년 3월 15일자. '유능한 컨설턴트, 실종 신고'라는 제목이 보였다.
"시간 정지자야."
소미가 말했다. 서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시간... 정지자요?"
"응. 시간의 빚을 너무 많이 진 사람들이 그렇게 돼. 그들은 한 순간에 완전히 멈춰버려.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지만, 살지도 못해."
소미는 서린을 의자에 앉히고 차를 내왔다. 오래된 찻잔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 김은 위로 올라가지 않고 공중에 떠 있었다. 이 집의 시간은 정상적으로 흐르지 않았다.
"언니, 그 사람 도와줄 수 있어요?"
"이론적으로는 가능해."
"어떻게요?"
소미가 서린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가 잃어버린 모든 시간을 찾아야 해. 그가 낭비한 시간, 소홀히 한 시간, 훔친 시간, 도둑맞은 시간... 모두 다. 그걸 찾아서 돌려줘야 시간의 빚이 청산돼."
"그게 무슨 소리예요?"
"사람들은 몰라. 시간은 빚이 되기도 한다는 걸. 누군가에게 줘야 할 시간을 주지 않으면, 함께 보내야 할 시간을 거부하면, 의미 있는 순간들을 무시하면... 그 시간들은 사라지지 않아. 어딘가에 떠돌아다니면서 빚이 되지."
서린은 찻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따뜻함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그럼 그 사람은... 엄청 많은 시간을 버린 거네요?"
"그렇겠지. 시간 관리 컨설턴트라며? 완벽하게 아이러니하네. 남들의 시간을 효율화하는 일을 하면서, 정작 자기 인생의 진짜 순간들은 다 놓쳤겠지."
소미가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이 공기 중에서 반짝이며 떠올랐다.
"근데 서린아, 너 진짜 그 사람 구하려고?"
"네."
"왜?"
서린은 대답하지 못했다. 왜일까? 그녀는 10년간 시간을 채집만 하고 살았다. 사람들을 돕는 건 그녀의 일이 아니었다. 그저 특별한 순간들을 모으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 민우를 봤을 때, 처음으로 다른 감정이 들었다.
두려움.
저게 언젠가 자기 모습일 수도 있다는 두려움.
"모르겠어요. 그냥... 도와주고 싶어요."
소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서랍에서 낡은 지도를 꺼냈다. 서울 지도였지만, 일반 지도가 아니었다. 곳곳에 이상한 표시들이 그려져 있었다.
"잃어버린 시간들은 현실 곳곳에 숨어 있어. 여기, 여기, 여기..."
소미가 지도 위 몇 곳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늦은 밤 편의점, 아무도 없는 공원, 멈춘 시계탑... 시간이 고이는 장소들이야. 거기서 찾아야 해."
"어떻게 찾아요?"
"너의 능력을 써. 넌 시간의 밀도를 감지할 수 있잖아. 그 사람과 연결된 시간들은 특별한 울림이 있을 거야. 마치 같은 주파수로 떨리는 것처럼."
서린은 지도를 받아 들었다. 손끝으로 종이의 질감이 느껴졌다. 오래되고 낡았지만, 이상하게 따뜻했다.
"언니는... 전에도 이런 일 해봤어요?"
소미의 얼굴이 굳었다. 그녀는 창밖을 바라봤다.
"응. 한 번."
"성공했어요?"
"아니."
소미의 목소리가 낮았다. 서린은 더 묻지 않았다.
그녀는 일어나 고물상을 나섰다.
3.
밤 11시. 서린은 다시 그 빌딩으로 갔다. 건물은 어두웠다. 대부분의 사무실이 비어 있었다. 경비실에는 졸고 있는 경비원만 있었다.
그녀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찾았다. 한 계단 한 계단 내려갈 때마다, 공기가 차갑고 무거워졌다. 지하 1층 복도. 형광등이 깜빡였다. 규칙적이지 않게. 마치 모르스 부호 같았다.
엘리베이터 앞.
민우는 여전히 거기 있었다. 정지된 채로. 하지만 서린이 가까이 가자, 그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돌아오셨군요."
"네. 방법을 알았어요."
서린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그 끈적한 감각. 그녀는 민우 앞에 섰다.
"당신이 잃어버린 시간들을 찾아야 해요. 모두 다."
"잃어버린 시간이요?"
"네. 당신이 낭비한 시간, 소홀히 한 시간, 놓쳐버린 순간들. 그게 빚이 되어 당신을 여기 가둔 거예요."
민우는 한동안 침묵했다. 45초짜리 순간 안에서도 침묵은 길게 느껴졌다.
"기억나지 않아요."
"뭐가요?"
"제가 뭘 잃어버렸는지. 저는 그냥... 일했어요. 열심히. 효율적으로. 5분 단위로 계획을 세우고, 낭비하는 시간 없이 살았어요. 그게 제 일이었으니까요."
서린은 그의 손목시계를 보았다. 45초에 멈춰 있는 초침.
"그게 문제였던 것 같아요. 시간을 살지 않고... 소비만 한 거요."
"무슨 차이죠?"
"차이요?"
서린은 주머니에서 작은 유리구슬 하나를 꺼냈다. 그녀가 어제 채집한 시간이었다. 지하철에서 만난 노부부가 손을 잡고 있던 3초.
"이걸 봐요."
그녀가 유리구슬을 민우 앞에 들어올렸다. 구슬 속에서 희미한 빛이 반짝였다. 두 사람의 손이 겹쳐지는 순간. 주름진 손가락들. 오래된 반지.
"이건 3초예요. 겨우 3초. 하지만 이 3초 안에는 50년이 들어 있어요. 두 사람이 함께한 50년의 무게가 이 3초를 채우고 있죠. 이게 '사는 것'이에요. 시간에 의미를 채우는 것."
민우는 유리구슬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저는... 그런 순간이 있었나요?"
"있었을 거예요. 모든 사람한테는 있으니까. 당신은 그걸 놓쳤을 뿐이죠."
서린은 노트를 펼쳤다.
"지금부터 말해줄래요? 당신 인생에서 중요했던 사람들. 기억나는 대로."
민우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버지... 어머니... 대학 때 친구들... 첫 회사 동료들... 그리고..."
그가 멈췄다.
"그리고요?"
"첫사랑. 이름이... 기억 안 나요. 근데 얼굴은 기억나요. 그 사람 웃을 때 눈이 초승달 모양이 됐어요."
서린은 적었다. 민우의 목소리에서 처음으로 따뜻함이 느껴졌다.
"더 있어요?"
"친구 하나. 대학 동기. 그 친구가 여행 가자고 했었는데... 저는..."
"안 갔죠?"
"네. 승진 기회가 있었거든요."
서린은 적었다. 노트가 차츰 채워졌다. 민우의 인생. 그가 놓친 순간들의 목록.
"이제 이걸 하나씩 찾아야 해요."
"어떻게요?"
"제가 찾아볼게요. 잃어버린 시간들은 세계 어딘가에 표류하고 있거든요. 저는 그걸 볼 수 있어요."
민우가 처음으로 미소 지었다. 아주 희미하게.
"고맙습니다."
"아직 고마워하긴 일러요. 얼마나 걸릴지 모르니까."
서린은 엘리베이터에서 나왔다. 뒤돌아보니 민우가 여전히 거기 서 있었다. 정지된 채로. 하지만 이제는 혼자가 아니었다. 누군가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복도를 걸어 나오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낯선 번호였다.
"여보세요?"
"한서린 씨? 저 이준혁이라고 해요. 건물에서 뵀던..."
서린은 기억했다. 바리스타. 친절하고 웃음이 많던 남자.
"아, 네. 기억나요."
"죄송한데, 지금 시간 되세요? 할 얘기가 있어서요."
"지금요? 밤 11시인데..."
"중요한 일이에요. 서린 씨가... 시간에 대해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들었거든요."
서린의 손이 굳었다.
"누구한테 들었는데요?"
"직접 만나서 얘기하면 안 될까요? 제발."
그의 목소리가 간절했다. 서린은 망설였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왜 하필 오늘? 왜 하필 민우를 만난 날?
"어디서요?"
"북한산 입구 24시간 카페. 아세요?"
"네. 30분 후에 봬요."
전화를 끊었다. 서린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밖으로 나갔다. 밤바람이 차갑게 얼굴을 스쳤다.
뭔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녀의 10년간의 채집 생활이 조용히 끝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진짜 시간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