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에서 마지막으로 만난 아이들
수년전 봄에 청년들과 함께 도원결의를 맺고 한참을 달려왔다. 그동안 무슨일이 있었는지, 킴도 잘 모르겠다.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체코로 해외자원봉사단을 띄우려 했었지만, 불발되었고, 대만 택시 여행 사업을 추진하던 중, 안 좋은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끝판왕 코로나가 왔다. 그렇지만 이렇게 안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비록 돈을 벌지 못하는 목적사업이지만, 우리는 남태평양부터 아이슬란드 레이카비크까지 자원봉사활동의 고속도로를 개척하여, 많은 한국청년들이 해외청년들과 어울릴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그리고 내부적으로는 자원봉사활동을 널리 보급시키기 위해 교육홍보 책을 만들었다. 또한 교육질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타로카드에서 영감을 얻은 여행점 카드를 개발하였다.
“눈을 떠보니 우리는 어느덧 호치민에 와 있었다.”
이렇게 시간이 훌쩍 지나갔는데, 어느덧 킴과 청년들은 베트남 호찌민에 와 있는 것이다.
이 사업 또한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먹고 살기가 점점 힘들어져 점점 아르바이트를 나가는 날이 모두들 많아졌다. 번역부터 단순 심부름까지 정말 불러만 주면 감사하다.
이곳에서 2주간 우리는 호찌민 빈민가에서 어린이 도서실을 설치하고, 한국어 및 영어 도서를 증정해주는 봉사활동을 펼친다. 또한 한국어 및 한국문화를 가르치는 봉사활동도 전개하게 된다. 한국의 날씨는 벌써 여름에 접어들어 매우 덥다고 한다. 이곳 호찌민은 한국만큼 덥고, 또 그만큼 더 더운 것 같다. 실내에서는 에어컨이 있으니깐 조금 상황이 괜찮지만, 도로나 길을 걸어다닐때는 등으로 땀이 비오듯이 흐른다.
“뜨거운 눈물”
해외봉사단 해단식을 할 때보다 더 슬픈 순간이 있다. 그것은 아동들과 현지에서 헤어지는 순간이다. 모든 활동을 완수하고, 이제는 짐을 내려놓는 순간이지만, 다시 만남을 기약할 수 없기에 모두들 눈물로 그 아쉬움을 대신한다.
인솔자인 우리는 감정 없는 로봇이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실제로 킴은 헤어지는 순간에 전혀 슬프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그 마지막 순간이 마지막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로봇같은 킴에게도 슬픈 순간이 두 번 있었다.
청년조합으로 시작한 우리이기에, 청년이라고 보기엔 부담스러운 내가 그림자가 되어야 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정말 슬펐다. 홍길동이 아버지께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한 심정이 이랬을까? 아니면, 이렇게 점점 이별을 해야 되는 것 같아서 슬펐을까?
두 번째는 완전히 떠나야 한다는 통보를 받았을 때 너무 슬펐다. 논리적으로는 수개월동안 나온 이야기 였으므로, 눈물을 흘렸어도 진즉에 몇 번은 흘렸을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킴의 이름이 지워지던날에는 뜨겁고도 슬픈 눈물이 점점 흘렀다.
우리는 세계정치 / 자유민주주의 / 시장경제의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지금껏 떠나리를 통하여 국제적인 활동과 자유를 만끽하였다면, 이제는 우리 스스로의 인생에 대하여 책임을 질 때가 되었다.
우스갯 소리로, 누군가가 우리의 이름을 잘 못 지었다고 불쑥 말했다. 술김에 한말이겠지만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떠나리 라고 지어서 떠나는 거야. 모이리 했으면 안 떠났을텐데..”
하나둘씩 떠나리를 떠나기 시작하였다.
이제 너무 힘들어진 우리가 우리의 조직을 떠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잡지 않았다. 그동안 달려온 것에 대한 재미도 있었지만, 힘이 들었던 것도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부모님을 만나서 왜 이것을 계속해야 하는지 논리를 만드는 것 또한 식상해졌고, 방향도 모른 체 달려온 이 길을, 언제까지 달려야 할지도 불투명해졌다.
“저 제가 이번에 해외에 선교를 가게 돼서요..”라고 떠나고,
“부모님이 아는 중소기업에 면접을 보라고 하셔서..”라고 떠나고,
“공채에 합격했어요.” 번듯하게 떠나고,
“창업했어요.(왜 이걸 놔두고 또 창업을..)” 라고 떠났다.
그리고,
이제는 킴의 차례가 된 듯하다.
킴도 거울속의 킴에게 말했다.
“떠나리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