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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치보이 richboy Sep 18. 2019

암중모책 癌中摸冊

어느 암환자의 어둠 속 책읽기


1. 거짓말처럼, 난 암환자가 되었다


“다 괜찮아요. 다 괜찮은데...”


침을 꼴딱 삼켰다.


“위내시경 상에서 역류성 식도염이 발견됐어요. 증상이 꽤 심하네요. 조심해야 해요.”


휴우~ 별 것 아니네. 담배 끊은 글쟁이가 새벽까지 책 읽고 글을 쓰면서 냉수만 마실 리 없다. 그렇다고 매일 밤 야식을 배불리 먹은 것은 아니지만, 바삭바삭한 소리가 나는 과자는 꽤 먹었다. 아니, 꽤나 먹었다. 아마 그 탓이리라. 대한민국 남자 열에 일곱은 걸리는 그거, 열심히 ‘요구르트 윌’을 마시면 낫겠지. 뭐 이 정도면...


“그리고 말이에요. 대장내시경에서는 말이죠....”


어, 그렇네. 대장내시경 결과가 또 남았구나. 뭐 별 거 있겠어? 혹시 용종?


“용종이 두 개가 발견되었고요. 그거야 떼어내면 되지만 대장 한참 아래쪽에 ‘종양’으로 의심되는 게 꽤 커요.”


그 말 이후로 잘 들리지 않았다. 의사는 더 큰 병원에 빨리 가서 검사 운운하는데 말소리가 서서히 줄어들더니 완전히 들리지 않았다. 의사는 입만 뻥긋거렸다. 배고픈 붕어처럼.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의사를 만나러 진료실에 들어오기 전에는 배도 꽤 고팠는데 지금은 아무 생각도,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내가... 암환자라고?’ 스스로에게 묻는 순간, 아내와 다섯 살짜리 아들이 생각났다. ‘내가 없으면 얘네 어떻게 하지?’ 고개를 돌려 아내를 쳐다보았다. 아내는 이미 나를 보고 있었다. 반쯤 넋이 나간 사람처럼.


여름 끝 무렵부터 설사가 잦았다. 살을 뺀다고 올리브 오일에 버터를 넣은 커피를 마시는 ‘방탄 커피’란 걸 한동안 마셨는데, 그 때문에 설사가 나는 거라 생각했다. 설사가 일주일이 넘도록 지속되자 ‘과민성 대장 증상’이 생길까 두려워 방탄 커피 마시기를 그만뒀다. 하지만 설사는 계속되었다. 어느 때부터 변에서 피 냄새 같은 비릿함이 느껴졌다. 변도 깨끗하지 못했다. 꽤 오래간다 생각했다. 하지만 곧 나아지겠지 생각했다. 별 일 있겠어? 생각했다. 벌써 두 달이 넘도록 설사를 하면서도 나아질 거라 생각하다니... 난 참 멍청했다.


 2017년 11월 말일, 바쁘다는 핑계로 그동안 미뤄뒀던 ‘건강검진’을 아내와 함께 받기로 했다. 올해에는 ‘위내시경’이 포함되어 있었다. 어차피 금식을 해야 한다면 추가 옵션으로 ‘대장내시경’도 받으라는 아내의 권유를 따랐다. 살짝 겁이 났던 설사의 원인을 알고 싶어서였다.


‘대장암 3기’. 어제 늦은 오후 소화기 내과 과장이 내린 진단은 이거였다. 내시경 사진을 보니 암세포가 대장 속에서 왕성하게 자라나 대장 벽을 거의 채울 만큼 가득 차 있었다. ‘내가 지금껏 불덩이를 뱃속에 품고 살았구나’ 보고 있기가 너무 끔찍해서 차마 눈을 감아버렸다. .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면 이런 말을 의사로부터 들으면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듯 눈앞이 캄캄해지고, 화가 나고 슬프고 억울한 마음이 들어 의사 멱살도 잡고 하던데...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오히려 기분이 더러울 만큼 담담했다.


함께 건강검진을 받았던 아내는 건강했다. 아내는 위내시경을 포함해 자궁경부암 검진도 받았는데 정상이라고 했다. 다행스러웠다. 나의 진단을 듣고 난 후 아내의 표정도 어색하리만치 담담했다. 오히려 그게 안쓰러웠다.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둘은 말이 없었다. 그걸 의식하는 순간 난 왼쪽 창가를, 아내는 오른쪽 창가를 보고 있었다. 하다못해 슬쩍 손이라도 잡고 갔다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들었다. 차마 하지 못했다.


글을 쓰는 동안 입이 무척 쓰다. 이틀째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탓인지, 위 내시경을 위해 마신 쓴 약 때문인지 알 수 없다. 이제 물도 마음대로 마시지 못하게 되었다. 어쩌면 새로 얻은 내 수식어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암환자다.




 거짓말처럼 암환자가 된 그날 밤, 난 잠을 들지 못했다. 아내의 숨이 고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거실로 나와 이 글을 썼다. 깊은 한숨을 쉬고, 애써 입술을 깨물며 흐느끼면서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오늘의 모든 순간을, 감정을 오래 기억하고 싶었다. 이렇게라도 해야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특별한 순간은 모두 글로 남기고 싶은 글쟁이의 못된 버릇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날의 이 글은 오늘까지 나를 붙들고 놓지 않았다. 시간이 날 때마다, 기억이 날 때마다 시간의 조각들을, 생각의 비늘들을 글로 내려놨다. 이 한 페이지가, 나를 브런치에 데리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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