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우리 부녀 사이
회사를 나와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아직도 분이 가시지 않은 채, 갈 곳도 없이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저녁 7시를 조금 넘긴 시각.
강남의 거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휴대폰을 꺼내 저장된 연락처를 천천히 내려봤다.
이런 날 연락할 만한 사람이 있을까 싶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하지만 결국, 누구에게도 연락할 수 없었다.
오늘처럼 부끄럽고 엉망인 하루를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다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향했다.
반지하 월세방.
이 현실조차, 오늘따라 더 초라하게 느껴졌다.
아무도 없는, 쓸쓸한 집.
그래도 괜찮았다. 비바람은 막아주니까.
가방을 내려놓고 식탁에 앉았다.
테이블 위엔 3년째 복용 중인 약봉지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2010년 4월부터 매일 밤 자기 전에 먹던, 정신과 약이었다.
시계를 보니 밤 9시.
원래라면 이 시간, 유진이와 통화를 하던 시간이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럴 수 없다.
그 사실이 공허하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이 약을 삼키면 어느새 기절하듯 잠들게 된다.
잠에 든다기보다, 정말 ‘기절’이라는 표현이 더 맞다.
유진이와의 이별도, 회사에서의 일도,
도무지 감당하기 힘든 것들뿐이다.
그냥 다 잊고 싶었다.
약봉지를 들고 한참을 바라보다,
조용히 하나를 꺼내 입에 털어 넣고 물을 마셨다.
그 뒤 담배 하나를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두어 번 연기를 깊게 들이켰다가 내뱉으니,
몸이 서서히 나른해졌다.
기절하기 전, 마지막 의식을 붙든 채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나는…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한참이 지났다.
눈을 뜬 채, 나는 멍하니 누워 있었다.
몸을 움직이기엔 너무 무기력했고,
어제의 일은 약기운 탓인지
머릿속 어딘가에 잠겨 꺼내지지 않았다.
느리게 손을 뻗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시간은 아침 7시.
아직은 너무 이른 시각이었다.
다시 눈을 감았다.
무거운 눈꺼풀 아래로, 또 한 시간이 흘렀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냉장고를 열었다.
묵은 탄산 냄새가 나는 콜라 한 캔을 꺼내
입에 털어 넣었다.
텅 빈 속에 차가운 탄산이 들어가니,
위장이 찢어질 듯 찌릿했다.
배도 고팠고, 마침 담배도 떨어졌다.
슬리퍼를 질질 끌며 문을 나섰다.
아직 이른 시간,
습기 찬 아스팔트가 다리 밑 바람처럼 축축했다.
집 앞 CU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말보로 골드 하나만 주세요.”
카운터 너머 익숙한 얼굴.
나를 보자, 그는 담배를 건네며 말했다.
“자, 여기… 담배 좀 줄여라, 젊은 놈이.”
편의점 사장님과는 꽤 오래된 인연이다.
대학 시절, 잠깐 주말 알바를 하며 알게 됐는데
그 뒤로 말도 편하게 놓고, 가끔 안부도 주고받는 사이가 됐다.
“출근하는 거냐?”
“네… 아 뭐, 좀 쉬고 있어요.”
“백수네?”
“사람을 뭘로 보고 그러세요? 지금 타이거 JK랑 작업 얘기 중이라 집에 있는 거거든요.”
“야, 그 허세 좀 그만 떨어. 타이거 JK가 시간이 남아돈다고?”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면서도, 마음 한켠이 텅 비어 있었다. 어제 회사에서 퇴사한 일이 부끄러워서였을까, 아직 약기운이 덜 빠져서였을까, 아니면 유진이와의 이별이 계속 아려서였을까. 생각해 보니, 이 모든 일이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더라.
“그러지 말고, 할 일 없으면 여기서 일이나 해라.”
“여기서요?”
“여기 말고, 방배동 서래마을에 편의점 하나 더 열었거든. 이제 막 오픈 전인데 사람이 없어.”
“와~ 사장님, 여기서 벌어도 모자라서 또 여셨어요? 축하축하~”
“벌긴 뭘 벌어… 힘들어 죽겠다. 어쨌든 할 거냐, 말 거냐?”
서른 살에 알바라니… 조금 망설여졌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 딱히 다른 방법도 없었다. 어제 막 퇴사했고, 당장 카드값도 급했다.
“에휴, 사장님… 제가 도와드리는 거 아시죠? 언제부터 출근하면 돼요?”
“그놈의 허세는… 수요일 오픈이니까 그날 밤10시까지 오면 된다.”
“열흘 뒤네요? 오케이, 갈게요.”
“주소 문자로 보낼게. 늦지 마라!”
“넵~”
담배 사러 나갔다가, 곧바로 알바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열흘의 여유가 생겼지만… 혼자가 된 지금, 딱히 뭘 할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띵–
편의점 사장이 보낸 문자였다. 열흘 뒤 출근할 편의점 주소.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려다, 동생이 보낸 카톡을 봤다.
이제 막 눈을 뜬 갑순이의 사진.
할 일이 생겼다.
집으로 돌아와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가방에 필요한 물건들을 챙긴 뒤, 강남 터미널로 향했다. 대전행 버스표를 끊고, 버스에 몸을 실었다. 한 시간 넘게 달려 도착한 대전종합터미널. 다시 시내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해 초인종을 눌렀다. 잠시 후, 동생이 문을 열어줬다.
“갑자기 웬일이야?”
“어… 타이거 JK랑 작업 들어가기 전에, 그냥 들렀지.”
“그놈의 타이거 JK는 가수에서 백수로 이직했대?”
“야, 오빠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냐? 확 마~”
여동생과 대충 인사를 나눈 뒤, 나는 곧바로 갑순이를 찾았다.
사진보다 더 통통하게 살이 오른 갑순이. 눈이 너무 예뻤다.
“야, 사진보다 훨씬 컸네?”
“애기들은 금방 크지.”
“아직 사료는 안 먹지?”
“응, 아직 멀었어.”
너무 예뻤다. 아직은 걸음도 어설픈 아장아장.
손바닥 위에 살짝 올려봤더니, 한 손 안에 쏙 들어왔다. 손바닥보다도 작은 꼬마 녀석.
수진이가 다니는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언제쯤 데려와도 될까요?”
의사는 아직은 어미 젖을 충분히 먹여야 한다고, 3월 중순은 넘겨야 건강하게 키울 수 있다고 했다.
한 달 동안… 어떻게 기다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