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화 사랑이 날 버리고 떠나 버릴때.
나는 다시 서울로 돌아와, 회사를 출근했다.
음악을 계속하고 있었지만, 서른이 될 때까지 제대로 된 기획사를 만나지 못했다.
생활비는 벌어야 했고, 음악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사운드 회사에 엔지니어로 취업했다.
음악과 병행할 수 있을 거란 기대도 있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출근은 오전 10시. 퇴근은 오후 7시.
하지만 연달아 이어지는 프로젝트 때문에 철야는 기본이었고,
월화수목금금금, 일주일 내내 회사에 갇혀 지내야 했다.
월급도 형편없었다. 알바보다 못받는 정도였고, 빠듯한 생활이 이어졌다.
점심시간, 간단히 밥을 먹고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있었다.
그때 유진이에게 카톡이 왔다.
– 오늘 저녁에 시간 돼?
– 응, 오늘은 야근 없을 것 같아.
– 그럼 잠깐 봤으면 좋겠어.
– 그래, 퇴근 10분 전에 톡 줄게.
간단한 대화를 마치고 오후 업무에 들어갔다.
성우 녹음을 받고, 서류 작업을 마무리했다.
퇴근 시간쯤, 유진에게 메시지를 보냈고 약속 장소를 받았다.
회사 실장님과 팀장님에게 퇴근 인사를 하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
“먼저 와 있었네?”
유진이의 표정에서 어딘가 어색함이 느껴졌다.
“준혁아… 오늘은 만나서 얘기해야 할 것 같아서.”
“응. 오늘은 야근도 없어서 이렇게 달려왔잖아. 커피 마시고, 삼겹살에 소주 콜?”
유진은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만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와는 다른 낯선 분위기.
며칠 전, 수진이가 갑순이 출산 앞둬 도우러 내려가기 전에 크게 싸웠었는데,
나는 아직 그 감정이 풀리지 않은 줄로만 생각했다.
“우리… 여기까지 하자.”
“무슨 말이야?”
“그만 만났으면 해. 이 말하려고 오늘 보자고 한 거야.”
유진의 말투는 조용하고 침착했다.
하지만 그 침착함이 이상하게 차가웠다.
우리는 2년 가까이 만나오며 싸우기도 많이 싸우고, 화해도 많이 했지만
이렇게 낯설 정도로 차분한 유진은 처음이었다.
“얼마 전에 싸운 거 때문에 아직 화난 거야? 그러지 마… 오늘 내가 소맥 기깔나게 섞어줄게.”
“…….”
지금껏 본 적 없는 차분한 태도, 내 말에 반응조차 없는 표정.
내가 정말 놓치고 있었던 게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그만해. 이제 진짜 그만하자.”
“…정말이야?”
“응.”
내 머릿속은 하얘졌고,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뇌정지가 온 것 같았다.
“준혁아… 니가 밉거나, 서운해서가 아니야.”
“그런 정치인 같은 말 말고, 그냥 이유를 말해줘.”
유진은 여전히 차가운 표정으로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무슨 말을 하는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자리가 너무 낯설었고, 이 상황이 현실 같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이별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눈치채지 못했을 뿐.
“다시 생각해줄 수는 없어?”
“그러고 싶지 않아…”
“그래… 알겠어.”
카페를 나왔고, 유진은 등을 돌려 걸어갔다.
나는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천천히 지하철역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뒤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유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유진은 어느새 다시 내 앞에 서 있었다.
눈물이 맺힌 채,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준혁아… 음악 계속해. 꼭 잘돼서… 니가 좋아하는 타이거제이케이랑 스컬이랑 음악 했으면 좋겠어… 정말 응원할게.”
“……”
그 말이 미안함에서 나온 건지, 진심인지,
그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낯선 유진과 이별했다는 사실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유진은 다시 돌아섰고, 그대로 사라졌다.
“…타이거제이케이랑 스컬이 왜 나 같은 놈이랑 음악을 하겠냐.
너 하나 지키지 못한 놈인데…”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말없이 가고 있었다.
가방에서 아이팟을 꺼내 이어폰을 꽂았다.
귀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들.
하나같이 슬픈 가사들인데, 마치 전부 내 얘기 같았다.
“다음 역은 이수역입니다.”
지하철 안내방송이 나왔고, 나는 버스로 갈아타기 위해 7번 출구로 나왔다.
정류장으로 가는 대신, 담배 한 대가 간절해져 사람이 없는 골목으로 향했다.
골목 끝에 메가박스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괜히 발걸음을 그쪽으로 돌렸다.
개봉작 포스터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 중 하나, 내가 좋아하는 하정우가 나오는 《범죄와의 전쟁》 포스터가 눈에 띄었다.
아무 생각 없이 성인 1인 티켓을 끊고 상영관 안으로 들어갔다.
상영이 이미 시작된 상태였고, 관객은 드문드문 앉아 있었다.
사람들은 웃긴 장면에서 웃었지만, 나는 그저 멍하니 스크린만 바라봤다.
장면은 바뀌고, 대사도 오갔지만… 머릿속은 엉망이었다.
영화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영화가 끝난 뒤,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정류장에서 내렸을 때, 문득 GS25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습관처럼 안으로 들어가 담배 한 갑, 캔맥주 네 개, 그리고 과자 한 봉지를 집어 들었다.
집에 도착해 맥주를 한꺼번에 들이켰다.
목이 말라서였는지, 마음이 메말라서였는지, 순식간에 네 캔을 비웠다.
금세 취기가 올라왔고, 나는 휴대폰을 들었다.
그리고… 유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길게 이어졌고, 안 받을 줄 알았는데—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차갑고 담담한 목소리.
“여보세요…”
나는 혀가 약간 꼬인 상태로 말을 뱉기 시작했다.
“야… 나, 너랑 헤어지고… 집에 오는 길에 영화 봤다. 하정우 나온 거.”
“…그래? 개봉한 건 알고 있었어.”
“영화가… 재밌더라.”
“너 하정우 좋아하잖아. 나도 그 영화 평점 봤어. 재밌긴 하겠다 싶었지.”
“근데… 하정우가 재밌는 게 아니라, 너 없이 혼자 봐서 재밌었어.”
“…….”
“나… 너랑 같이 봤던 영화들, 사실 별로 재미 없었어.”
“…….”
“야… 나 너 없이 살게 되니까 앞으로 재밌을 것 같아서 전화한 거야.”
나는 마치 술김에라도 뭔가를 붙잡고 싶었던 것 같았다.
그 말들이 진심이었는지, 아니면 그냥 취한 김에 내뱉은 건지…
지금 생각하면 나도 잘 모르겠다.
“너 경주 최씨가 다 같은 대구빡인 거 모르지?”
“취했어… 그만 자...”
“충렬공파 알아? 남천동에, 어? 경찰서장 사는데, 어? 같이 밥 먹고 술도 한잔하고, 어? 사우나도 같이 간다, 어?”
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술기운에 얹어 계속 쏟아내다, 그대로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떴다.
시계를 보니 시침은 정확히 9를, 분침은 8을 가리키고 있었다.
큰일이다.
지금 씻고 나가도 택시 타고 지각이다.
세수는 물만 대충 묻히고, 양치만 하고, 뛰쳐나왔다.
택시를 탔지만 결국 20분 지각.
도착하자마자 팀장의 눈빛이 날 꿰뚫었다.
음향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그 팀장은 성격도 거칠기로 유명했다.
그는 말 대신 눈빛으로 나를 찌르기 시작했다.
“송기사… 그냥 내일 출근하지 그랬어?”
“죄송합니다…”
“아니 큐시트 정리는 송기사가 하는 거 아니냐?”
“아… 네, 죄송합니다. 지금 하겠습니다.”
“내가 최대리랑 다 해놨는데?”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내일 출근하라니까?”
나는 그저 죄송합니다만 반복했다.
그의 말은 칼처럼 날아왔고, 나는 무력하게 맞기만 했다.
오전 근무는 그냥 기억이 없다.
정신이 나가 있었던 것 같다.
점심시간도 지나고, 프로젝트 건으로 야근까지 해야 했다.
해가 저물 무렵, 팀장은 또 내게 말을 걸었다.
“송기사, 와… 패치베이도 내가 해야 되지?”
순간, 뭔가 끊어졌다.
어제 유진이와의 이별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 말을 견딜 수 있었을까?
“…씨발. 그만 좀 해라.”
사무실이 얼어붙었다.
팀장은 놀란 눈으로 나를 봤고, 주위 대리와 기사들도 숨을 멈췄다.
“방금 뭐라고 했냐?”
“귓구멍에 좆박았냐, 씨발아. 그만하라고.”
“…너 미쳤냐?”
팀장이 내 앞까지 성큼 다가왔다.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였다.
주변 사람들이 급히 말리기 시작했다.
“송기사, 진정 좀 하고, 나랑 담배 한 대 피우자.”
“씨발 놔. 허기사... 지훈이 형은 빠져 있어. 뒈지기 싫으면.”
나는 허지훈 기사의 팔을 뿌리치고, 팀장에게 다가갔다.
“야, 이 좆만아. 너, 니가 그렇게 잘났냐?”
팀장은 살짝 뒷걸음질쳤다.
나는 더 가까이 다가갔다.
“씨발… 좆도 모르는 새끼가… 나레이션 성우 녹음은 -3에서 -6db로 받아야 돼.
근데 여기 못 배운 새끼들은 다들 0db 가까이 처받더라?
광고 놈들 음향이 그렇지, 개새야.”
“야, 너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 퇴사야. 너 짤렸어, 이 새끼야.”
“내가 그렇게 좆같이 말해놓고도 다닐 줄 알았냐?
너 어디서 음향 배웠냐? 오래 버텼다고 팀장 된 새끼가.
회사에서 제네릭 모니터 써봤자 뭐해?
집에서 니어필드 05 쓰는 나보다 모르는 새끼가, 이 개새야.”
나는 팀장을 쏘아붙였다.
평사원들 앞에서 체면이 구겨진 팀장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나마 친하게 지내던 허지훈 기사가 내 팔을 잡아끌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 광경을 실장은 종이컵을 든 채, 무표정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이 업계에선 그런 일이 낯설지 않다.
밤샘작업과 감정노동에 찌든 사람들의 얼굴은, 늘 그런 식으로 마르고, 무표정해진다.
하지만 나는… 더는 못 버티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대로, 퇴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