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4월 30일, 중국 전자상거래업체 알리바바가 입주해있던 중국 항저우 화싱커지 빌딩의 모습은 마치 전쟁터와 같았습니다. 500여 명에 달하는 알리바바 직원들 모두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각자 자신의 컴퓨터 본체와 모니터, 키보드, 서류 뭉치들을 품에 안고 빠른 걸음으로 건물 밖을 빠져나갔습니다.
알리바바 본사 사무실이 있던 9층짜리 건물에 들어와 있던 다른 입주사 직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가득 짐을 안고 떠나는 모습은 알리바바 직원이나 다른 입주사 직원들 모두 마찬가지였는데요. 하지만 누가 알리바바 직원이고 누가 다른 회사 직원인 줄을 구별하는 건 어렵지 않았습니다.
알리바바 직원들의 얼굴엔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는 죄책감이 가득했고요. 다른 회사 직원들의 표정은 누군가를 향한 원망과 분노로 가득했기 때문이죠.
이날 화싱커지 빌딩 전체가 소란에 휩싸였던 건 항저우 시정부가 당분간 건물을 폐쇄하고 누구도 출입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지시를 내렸기 때문인데요. 이 같은 지시가 내려온 건 이 건물에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확진자가 며칠 동안 출근해 일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20대 초반의 알리바바 직원이었는데요.
그는 인구 800여만 명의 항저우에서 네 번째로 사스 의심 환자로 판정된 인물이었습니다. 정밀 검사를 통해서 결국 사스에 걸렸다는 사실이 확인됐죠.
마윈과 그의 부인이자 동료인 장잉
마윈과 알리바바가 '공공의 적'이 됐던 이유
2003년 4월은 당시 중국에서 사스에 대한 공포가 극에 달했던 시기였는데요. 중국 정부는 사스 바이러스의 발원지로 지목된 광저우를 전염‧재난 지역으로 지정하고 이곳에서 ‘사스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중국 다른 지역들 역시 광저우만큼 상황이 심각하지는 않았지만 어떻게든 사스 바이러스가 자기네 지역으로 확산되는 걸 막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이 같은 시기에 알리바바 본사에 근무하는 직원 중 한 명이 사스 확진 판결을 받자 건물이 폐쇄된 건 당연한 일이었는데요.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알리바바 직원들 중 한 명이 사스에 걸렸다고 하더라도 같은 건물에 입주해있던 타사 직원들은 물론, 다른 항저우 시민들이 마윈과 알리바바에 대해 보이는 적대감이 도를 지나칠 정도로 강했기 때문이죠.
중국 무협 소설의 거장 김용과 함께 사진을 찍은 마윈
같은 건물에서 근무하던 사람이 사스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건강을 걱정하는 건 분명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마윈과 알리바바에 대한 분노는 단순한 원망 수준을 훨씬 뛰어넘었는데요.
알리바바 직원 중에 사스 의심 환자가 있다는 소문이 처음 전해졌던 며칠 전에는 다른 입주사 직원들이 알리바바 사무실로 뛰어들어 물건을 던지면서 욕설을 내뱉기도 했습니다.
마윈이 다른 입주사 사무실을 찾아가 사과하고 다른 회사들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하겠다고 말하려 했을 때도 대부분의 회사들이 마윈을 사무실에 들여보내지도 않고 문 앞에서 쫓아냈죠.
이번 글을 쓰기 위해 참고한 마윈 평전 <마윈>
아무리 알리바바 직원이 사스에 걸렸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하는 건 분명 정도를 벗어난 일이었는데요. 도대체 그들은 왜 이렇게까지 큰 적대감과 분노를 드러낸 걸까요?
사실 다른 입주사 직원들과 항저우 시민들이 마윈과 알리바바를 사스 바이러스를 퍼뜨린 주범으로 여기며 분노를 터뜨린 데에는 조금은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마윈이 ‘굳이 직원을 보내지 않아도 됐었던’ 광저우 박람회에 직원들을 참가시켰고, 마윈의 결정에 따라 박람회에 참가했던 직원들 중 한 명이 사스에 걸려 돌아온 뒤 사무실에서 며칠 동안이나 근무했기 때문인데요.
밖에서 봤을 때는 ‘마윈과 알리바바가 자기 회사의 이익만 생각하다 사스라는 전염병을 불러들인 것’으로 보기 쉬운 상황이긴 했습니다.
마윈 입장에서는 ‘박람회에 참가하는 게 알리바바에 홍보‧수출 지원 업무를 맡긴 고객사들에 대한 약속을 지키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며칠 동안 잠도 못 자고 고민하다가 내린 결단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장 사스 환자가 나타났다는 사실 때문에 공포에 떨어야 했던 항저우 사람들 입장에선 마윈의 고민을 이해줄 여유도, 이유도, 필요도 없었던 것이죠.
마윈 알리바바 창업자와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
고객들과의 '약속' 때문에 직원을 광저우에 보낸 마윈
마윈이 사스와의 전쟁이 벌어지던 중국 광저우로 직원들을 보낸 건 <중국공급상>이라는 알리바바의 수출 지원 서비스를 이용하는 고객들과의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1년 연회비가 700만~1100만 원에 달했던 <중국공급상> 서비스의 고객들은 대부분 해외 수출을 원하는 중소기업들이었는데요.
알리바바가 고객들에게 제공하는 수출 지원 프로그램 중 하나는 알리바바 직원들이 중국과 해외에서 열리는 각종 박람회에 참가해 회원사들의 제품을 알리고 판로 개척을 돕는 일이었습니다. 박람회장에 부스를 차린 뒤 고객사들의 제품과 카탈로그를 진열해놓고 해외 바이어들에게 제품들에 대해서 알리는 방식이었죠.
특정 제품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바이어가 있다면 이 제품을 만든 회사와 바이어를 연결시켜 수출 계약이 이뤄질 수 있도록 도왔고요.
2003년 4월 중순에 광저우에서 열렸던 행사는 광교회라는 중국 최대 규모의 박람회였는데요. 상반기와 하반기에 각각 한 번씩 일 년에 두 차례 열리는 행사였습니다. 한때 이곳 광교회를 통해 계약이 이뤄진 수출 금액이 중국 연간 총수출액의 3분의 1에 달했던 적이 있었을 정도로 굉장히 큰 박람회였습니다.
이렇게 큰 행사에 참가하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돈을 내고 <중국공급상> 서비스를 이용하는 고객들을 볼 면목이 없다는 게 마윈의 생각이었죠.
“가자, 가야 한다! 어떤 상황이라도 일단 길이 존재한다면 가야 한다. 박람회 참가는 <중국 공급상> 회원에 대한 알리바바의 의무다”, 마윈이 긴 마라톤 회의 끝에 광교회 참석을 결정하며 내뱉은 말이었는데요.
2000년 포브스 표지에 나온 마윈
하지만 이 같은 선택에 대한 결과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악몽으로 돌아왔습니다. 그의 지시에 따라 박람회에 참석했던 직원 중 한 명이 사스에 걸리면서 마윈과 알리바바는 회사의 이익만 생각하다 항저우에 사스를 끌어들인 ‘공공의 적’이 돼버렸던 거죠.
‘광저우가 사스 발원지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 왜 직원들을 사지에 보냈느냐?’는 세상 사람들의 분노와 비난, 원망, 손가락질이 마윈에게 인정사정없이 쏟아졌습니다. 다른 알리바바 직원들도 마윈만큼은 아니지만 이 같은 비난을 견뎌야만 했죠.
본사 건물이 폐쇄된 것은 그 뒤로 알리바바에 닥친 여러 시련들 중 하나에 불과했는데요. 건물 폐쇄와 동시에 모든 알리바바 직원들은 자택에 격리 조치됐습니다. 알리바바와 다른 입주사 직원들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사스 의심 환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며칠 전에 알리바바 본사를 방문했던 마오린성 당시 항저우 시장 역시 자택에 머물 수밖에 없었는데요.
'알리바바의 전자상거래 시스템을 활용해서 사스 사태 때문에 어려움에 처해있는 항저우 중소기업들을 돕자’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회사를 방문했던 마오린성 시장이 알리바바 때문에 집안에 꼼짝없이 머물러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었습니다.
사스 바이러스를 항저우에 끌어들인 데다 사스 확산이라는 큰 위기를 막아내야만 하는 책임자인 항저우 시장까지 집에 격리시켜버렸으니 마윈과 알리바바에게 쏟아졌던 비난이 얼마나 거셌을지 쉽게 상상하실 수 있을 텐데요.
사스 위기 당시 직원들 앞에서 상황을 설명하는 마윈
모든 직원이 격리 조치된 창사 이래 최대의 위기
항저우에 돌봐줄 가족이 없는 타향 출신 직원들의 경우에는 항저우시가 제공한 시내 교외에 있는 허름한 주택에서 격리 기간 동안 지내야만 했습니다. 경찰이 문 앞에서 24시간 보초를 서고 있었죠.
이렇게 교외 주택에 격리됐던 직원들의 경우에는 다른 직원의 가족들이 창문 틈으로 넣어주는 음식으로 끼니를 때워야만 했었죠.
그렇다면 마윈과 알리바바는 어떻게 이 같은 큰 위기를 이겨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을까요? 만약 알리바바가 이 위기를 잘 이겨내지 못했다면 오늘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알리바바란 회사는 존재하지 못했을 텐데요.
빌딩 폐쇄 지시가 떨어질 것을 예상하고 있던 마윈과 알리바바 직원들은 미리 이에 대한 조치를 하나하나 취해놨습니다. 직원들 모두가 집에서도 어려움 없이 인터넷에 접속해 업무를 볼 수 있도록 전화국에 연락해 모든 직원의 집에 광대역 고속 인터넷 통신을 설치했고요.
회사 사무실로 전화가 걸려오면 직원들의 집 전화나 휴대전화로 자동으로 연결되도록 발신 전환 서비스를 신청했습니다.
덕분에 알리바바에 전화를 건 고객이나 해외 바이어들은 뉴스를 통해서 소식을 접하지 않은 이상 알리바바 직원들 모두가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집안에 격리돼 있다는 걸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직원들끼리 의견을 나눠야 할 때는 온라인 메신저와 이메일을 사용했고요. 다른 일상적인 업무들도 모두 집으로 가지고 간 회사 컴퓨터를 통해 처리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놨습니다.
어린 시절의 마윈
사실 알리바바가 내놨던 이 같은 대책들은 지금 봤을 때는 너무나 당연한 조치로만 여겨지는 데요. 다만 이때는 지금으로부터 17년 전인 2003년이었고 그때만 하더라도 중국의 인터넷‧통신 환경이 지금처럼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이 같은 대책들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더욱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회사 직원들 중에서 사스 환자가 발생한 급박한 상항 속에서도 허둥대지 않고 모든 직원들이 격리되더라도 업무가 차질 없이 돌아갈 수 있도록 발 빠르게 움직였던 게 알리바바가 자산들에게 닥친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었던 비결이었는데요.
전자상거래 플랫폼 운영을 전문으로 하는 IT(정보통신) 회사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업무를 재택근무를 통해서 처리할 수 있었다는 점도 알리바바를 도왔습니다.
방금 설명드린 노력들 덕분에 사스 문제는 알리바바에 상처를 남기지 않고 잘 해결될 수 있었는데요. 사스에 걸렸던 직원 역시 무사히 치료를 잘 마치고 건강한 모습으로 회사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2003년 전 세계를 떨게 했던 사스 위기 당시 ‘개인의 이익을 챙기려다 사스 바이러스를 퍼뜨렸다’는 이유로 중국 사회의 거센 비판, 원망, 손가락질과 마주해야만 했던 마윈과 알리바바가 어떻게 이 같은 위기를 이겨냈는지에 대해서 간략히 살펴봤는데요.
"우리는 어떤 두려움 앞에서도 움츠러들거나 도망치지 않는 용기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2020년 3월 1일, 최근 한국 사회는 코로나 19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결코 작지 않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다만 한국의 뛰어난 의료 수준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부의 노력, 그리고 우리 한국인들의 높은 시민의식을 생각해보면 지금의 어려움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해결될 수 있을 거라고 강하게 믿고 있습니다.
마윈과 알리바바가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을 견뎌내면서 자칫 회사가 문을 닫을 수도 있었던 큰 위기를 해결해나갔던 과정을 살펴봤던 이 글이 지금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는 지혜와 용기를 독자분들께 조금이나마 전해드렸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직원이 격리됐을 당시 마윈이 알리바바 직원들에게 보냈던 이메일의 한 문단을 소개하면서 이번 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7년 전 마윈이 썼던 이 메일이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마음가짐과 자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알리바바라는 단어를 한국으로 바꿔 읽으신다면 훨씬 더 많은 걸 느끼실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이번 일을 통해 저는 알리바바에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수많은 약점이 존재하며, 그중 상당수는 문제가 발생한 후에야 개선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총책임자로서 가능하다면 알리바바의 모든 일을 책임질 것입니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현실을 생각해 보면 지금은 비난과 원망에 빠져있을 때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다 함께 힘을 모아 난관을 극복하고 위기에 도전해야 합니다. 알리바바는 직원도 회사도 경험이 많지 않은 젊은 회사이지만, 이번 위기를 이겨 냄으로써 한층 성숙해질 것입니다.
지난 며칠 깊은 괴로움 속에서 한 줄기 희망과 감동을 느꼈습니다. 수많은 알리바바 동료들이 여전히 강한 의지와 긍정의 에너지를 잃지 않고 서로를 배려하고 지지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알리바바의 책임과 사명감을 위해 다 함께 힘을 모아 사스에 도전해야 합니다. 모든 불행은 지나가기 마련이고 삶은 계속 이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재앙에 맞서는 동시에 변함없이 일에 열정과 에너지를 쏟아야 합니다.
저는 알리바바의 젊은이들이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일하는 것은 저에게 큰 영광입니다. 저는 알리바바 직원의 가족과 친구들이 우리 젊은이들의 도전과 용기에 큰 박수와 격려를 보내 주길 바랍니다.
알리바바의 젊은이들은 어떤 두려움 앞에서도 움츠러들거나 도망치지 않는 용기있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알리바바 정신입니다. 알리바바 동료들은 모두 알고 있을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