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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키 Jul 28. 2022

시작의 턱

2022년 2월의 어느 날에

난 시작하는 건 쉬워. 그냥 하고 싶은 건 다 해보는 거지 뭐.


헬스, 필라테스, 보컬, 영어 과외, 독서 모임 등 다양한 활동을 하는 내게 주변인들은 묻곤 한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것들을 할 수 있냐고. 그럴 때마다 난 그냥 관심이 생긴 건 해봐야 된다고, 난 시작은 쉬운(지속력은 조금 약하지만) 사람이라고 답하곤 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나도 처음부터 시작이 쉬웠던 사람은 아니다. 내가 가장 애정하고 있는 춤에 있어서도, 그 시작까진 꽤나 지지부진했다.


춤은 어려서부터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언제부터 어떤 계기로 좋아하게 됐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기억의 시작점부터 춤을 좋아했고 춤을 추고 있었다. 춤에 대해 전문적으로 배워본 적은 없었고, TV나 영상을 보며 따라 추는 것이 전부였지만 그래도 친구들 사이에서는 춤으로 이름 좀 날리곤 했다.

춤을 본격적으로 배워 보고 싶다고 생각한 건 군대 후임이자 이제는 친한 S와의 만남에서부터였다. S와의 대화 중 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S는 춤을 배워보고 싶다고 했다. 나 역시 춤을 배워보고 싶다고 이야기했으나 그때 그 답은 실천 의지가 없는 그저 공허한 지향점일 뿐이었다. 그랬으니까 S가 갑자기 주변의 댄스 학원을 찾아보고, 당장 상담받으러 가보자는 말에 오늘은 너무 갑작스럽다고 대답했지. 그렇게 하루 이틀 시간이 흘렀으나, 춤에 대한 생각은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왜 예전부터 배워보고 싶다고 생각했으면서 S처럼 행동으로 옮기진 않았을까? 그렇게 댄스 학원 정보를 더 찾아보던 나는 또 시작을 미루고 말았다. 여기저기 학원은 찾아봤지만 내가 가서 잘할 수 있을까, 남자는 나밖에 없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들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반년 정도 흘렀을까? 대학 졸업 후 생각보다 길어지는 취준 시기에, 나날이 늘어가는 몸무게에 삶이 우울해지던 순간 운명처럼 그 문구를 마주하게 되었다.


“지금 네이버에서 OOO을 검색하세요.”


빨간 신호에 잠시 멈춘 버스 창밖으로 댄스 학원의 작은 간판이 보였고, 그 간판에는 학원 이름과 함께 딱 이렇게 쓰여있었다. 초록 신호에 버스는 출발했고, 내 핸드폰에는 네이버 검색 결과가 나와 있었다. “그냥 해보자. 하고 걱정하자.”


댄스 학원에는 어린 학생들이 많았다. 다행히 내가 등록한 반은 취미 반이어서 내 또래의 사람들도 있었지만 남자는 역시나 나 혼자였다. 수업 시작 전까지 너무 뻘쭘해서 어디 구석에라도 숨고 싶었으나 춤을 추기 시작하니 내 나이, 내 성별은 딱히 신경 쓰이지 않았다. 춤을 추는 그 자체가 즐거웠고, 사실 춤을 배우는 동안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선생님이 알려주는 동작을 보고, 따라 하고, 익히는데 온 집중을 다했기 때문이다. 인터넷에서 자주 보던 김혜자 배우님의 짤이 떠오르던 순간이었다. “내가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었구나...”


내가 속한 취미반에는 초등학생 정도의 아이를 두신 것 같은 40대 중반의 어머님도 계셨다. 화려한 스타일의 옷에 춤에도 열정적이신 분이어서 항상 멋있다고 생각하던 분이었다. 어느 날은 잠깐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그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실 어리고 젊은 친구들이 오는 곳인데 내가 와도 되나 고민을 많이 했는데, 그 턱을 넘지 못하면 아무것도 못 하겠더라구요.”


그랬다. 그 시작의 턱을 넘는 것. 그건 시작하기 전에는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지만 턱을 한 번 넘고 나니 매일 넘어 다니는 방 문 턱만큼 낮은 것이었다.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니구나 생각했다.


첫 시작의 턱을 넘고 나니 두 번째 턱을 넘는 것은 쉬웠다. 취업 후 서울에 터를 잡은 뒤 새롭게 춤을 배울 곳을 찾아보았다. 이제는 K-pop 안무에서 벗어나 새로운 스타일을 배워보고 싶었고, 평소 인스타그램으로 팔로우하던 댄서의 클래스를 신청했다. 방송에도 나오는 유명한 댄서의 춤을 잘 따라갈 수 있을까, 또 턱을 만났지만 그 턱을 넘는 것은 이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그 클래스에서도 남자 수강생은 나뿐이었고, 클래스를 수강 중인 다른 어린 친구들은 춤을 무지무지 잘 추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클래스에 직장인 수강생도 내가 최초였다.) 즐겁게 춤을 추다 보니 지금까지도 매주 수요일 저녁 춤을 배우고 있다.


2022년 춤에 있어서 세 번째 시작을 앞두고 있다. 새로운 스타일의 춤을 배워보는 것이 올해 목표 중 하나다. 그 방식에 대해서 고민을 하고 있는 상태이긴 하지만, 나는 조만간 또 새로운 턱을 넘을 것이고 잘 배워 나갈 것이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 시작의 턱도 넘어본 사람이 넘는다. 시작의 턱을 넘고 넘고 넘다 보면 세상에 시작 못 할 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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