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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키 Mar 10. 2024

마음이 가볍고 상쾌한 밤

(2022.06)

“상기는 집에 홈 바 같은 거 안 차려 놨어?”

술을 좋아하며 혼자 살기까지 하는 내가 자주 듣곤 하는 질문이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과 달리 홈 바는 물론 홈 바에 대한 로망도 없고, 집에 술도 구비해두지 않는다. 나는 술 그 자체를 좋아하기보다는 술자리의 분위기를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혼자 집에서 마시는 술은 맛도 별로거니와 더 빨리 취하는 느낌이 들어서 싫다. 대신 사람들과 술잔을 주고받으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그 순간을 공유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그래서 개인적인 스케줄(춤, PT, 영어 과외 등)이 없는 날엔 자주 술자리를 갖고자 한다. 별다른 스케줄도 없는데 약속도 없는 날엔 술 한잔하자고 불러낼 사람은 없나 하고 카카오톡이나 인스타그램을 뒤지곤 한다. 하지만 가로수길에서 후암동으로 다시 돌아온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 나의 단골집이자, 와인 바라고 하기엔 어딘가 푸근한 가게, 사장님의 이름을 딴 가게, ‘가든한밤’이 있기 때문이다.

가든한밤을 처음 방문한 때는 3년 전이다. 회사 동기이자 후암동 동네 주민이었던 A와 치맥을 하다 뜬금없이 와인이 마시고 싶어졌다. ‘숙대 입구에는 왠지 오늘 와인 한 잔이 있을 것 같아.’라는 생각에 네이버 검색도 해보지 않고 숙대 입구까지 약 10여 분을 걸어갔다. 그러나 이게 웬걸. 숙대 입구 앞에는 와인을 파는 가게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제서야 뒤늦은 네이버 검색을 하게 되었고, 괜찮아 보이는 와인 바 두 곳을 찾아냈다. 한 곳은 5분 거리, 그리고 다른 한 곳은 15분 거리에 있었다. 우리는 가까운 곳을 먼저 염탐한 후 최종 목적지를 결정하기로 했다. 5분 거리에 위치한 와인 바로 가는 길은 영 좋지 않았다. 부동산과 미용실로 채워진 후암동 특유의 조금 지저분해 보이는 거리, 굳게 닫힌 철문 안에서 개가 짖어 대는 집뿐인 골목에 와인 바가 있다고? 간판도 잘 보이지 않는 그곳에 도착했을 때 이미 마음은 10분 더 걸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반전으로 가게가 괜찮아 보였다. 와인 바라고 하면 떠올리곤 했던 어두운 조명이 아닌 푸근함이 느껴지는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따뜻한 조명, 4인 테이블 3개와 2인 바 테이블 2개가 전부인 아늑한 공간, 사장님 홀로 요리하는 모습이 나름 오픈 키친, 자꾸 노래를 찾아보게 만드는 플레이리스트, 그리고 향과 감성을 다 잡은 이솝 핸드 워시까지. 그리고 주문한 치즈 플레이트로 게임 끝. 그렇게 마음이 홀린 나는 바로 다음날도 그곳을 방문하게 되었고, 지금은 사장님 다음으로 가든한밤을 제일 많이 방문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후에 알았지만 동기 A도 바로 다음 날 가든한밤을 방문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있는 모습에 민망해서 다른 곳으로 갔다고.)

가든한밤의 모든 메뉴를 다 먹어본 사람으로서 추천하는 세 가지 메뉴는 치즈 플레이트와 떡볶이, 그리고 사심을 조금 담아 냉파스타이다. 우선 나를 가든한밤 단골의 길로 인도했던 그 문제의 치즈 플레이트. 가든한밤의 치즈 플레이트는 여타 생각하는 치즈 플레이트의 모습과는 조금 다르다. 브라운 치즈(상황에 따라 종류가 바뀐다)와 스모크 치즈 그 옆에 소시송 햄이 놓이고, 크래커와 사과를 지나 꿀과 호두를 덮어쓴 마스카포네 치즈까지. 치즈의 종류가 이렇게 적어도 되나 싶지만, 가짓수는 중요치 않다. 크래커 위에 얇게 썰린 사과를 한 조각 올리고, 그 위에 꿀호두와 마스카포네 치즈를 올리면 게임은 끝난다. 꿀의 달콤함과 사과의 상큼함이, 마스카포네 치즈의 말랑거림과 크래커의 바삭거림이 화합을 이룬다. 다른 곳에서 1차를 한 후 방문한 것이라면 치즈 플레이트만 한 것이 없다.

두 번째 추천 메뉴는 대패 삼겹살 떡볶이. 가든한밤의 떡볶이는 떡국 떡으로 만든다. 개인적으로는 일반 떡볶이 떡보다 떡국 떡의 얇음에서 오는 쫄깃함을 좋아한다. 유퀴즈에 출연한 한 떡볶이 전문가는 떡볶이에는 고추장을 넣으면 안 된다고, 떡의 전분과 고추장의 전분이 만나 텁텁해진다고 말했다. 이곳의 떡볶이에는 고추장이 들어가지만 전혀 텁텁하지 않다. 시중에서 파는 비슷비슷한 떡볶이의 맛이 아닌 집에서 만들어 먹는 떡볶이의 맛이 난다. (내가 집에서 만들어 먹는다고 이런 맛이 날리는 없지만) 정신을 놓고 먹다 보면 떡볶이 안의 파까지 다 긁어먹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참, 라면 사리 반 개 추가는 필수.

마지막 추천 메뉴는 사심을 담은 냉파스타이다. 사심을 담았다는 이유는 정식 메뉴 출시 전 테이스팅을 하며 조리법에 ‘조금’ 관여했기 때문이다. 토마토소스 베이스에 바질로 향을 돋우고 새우로 식감을 살린 후 소면처럼 얇은 면과 함께 시원하게 먹는 이 냉파스타는 사전 테이스팅 당시에는 마늘 향이 너무 강했다. 다진 생마늘이 들어가는데 양이 너무 많았던 탓이다. 물론 다진 생마늘의 톡 쏘는 맛이 묘미이긴 했으나 와인 한잔하며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기엔 입에서 마늘 냄새가 나지 않을지 부담스러운 정도였다. 그리하여 마늘의 양이 대폭 줄여 출시된 냉파스타는 내 입맛에 어딘지 밍밍했다. 나는 내가 냉파스타를 주문할 때는 마늘의 양을 3g이 아닌 4g으로 늘려줄 것을 부탁했고, 이것이 내 입맛에 딱 맞았다. 생마늘을 먹지 않는 내가 이와 같은 주문을 한 이후 사장님은 냉파스타에 들어가는 마늘의 양을 4g으로 변경했고 현재의 레시피가 완성되었다.

여느 가게나 마찬가지겠지만 와인 바를 방문하면 사장님의 취향을 발견할 수 있다. 가든한밤 사장님의 취향은 화이트 와인. 그래서 와인 리스트엔 레드 와인보다 화이트 와인이 더 많으며, 화이트 와인의 라인업이 가격도 저렴하고 맛도 좋다. 나도 처음엔 와인은 무조건 레드 와인만 마시는, 그래서 가게의 레드 와인을 사장님보다 더 많이 마신 사람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시나브로 화이트 와인에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더위가 기분 좋게 밀려올 때는 첫 병으로 상큼한 바하우 그뤼너 벨트리너 셀렉션을, 그냥 부드럽게 목을 축이고 싶을 때는 에세이 슈냉 블랑, 1차에서 소맥을 마시고 왔다면 맛이 강한 카보 다 로카 비뉴베르드를 마신다. 컨디션이 좋을 때는 위 세 병을 순서대로 다 마시기도 한다.

사장님의 취향을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부분은 가게의 플레이리스트이다. 처음 A와 가든한밤을 방문했을 때 둘 다 연신 핸드폰으로 음악을 검색하고 있을 정도로 플레이리스트가 좋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가든한밤의 사장님은 플레이리스트에 진심이다. 가게를 마감하고 두 시간씩 플레이리스트를 정리할 때도 있다고 한다. 플레이리스트에 오르는 기준이 나에게는 참 오묘한데, 사장님 말로는 뿅뿅 거리는 기계음이 들어가면 탈락이라고 한다. The volunteers의 앨범이 나왔을 때 Summer라는 곡을 추천한 적이 있는데 후반부의 뿅뿅 거리는 느낌 때문에 가게 리스트에는 넣을 수 없다고 했다. 반면 샘 김이 부른 프라이머리의 노래 Bless you의 발매 소식을 알렸을 땐 청음 후 바로 플레이리스트로 직행했다. 내가 그렇게 보아 노래 한 곡 넣자고 가게 분위기와 맞는 숨은 명곡들을 추천해도 보아의 목소리는 가게 분위기에 맞지 않는다며 거절당하곤 한다.

생각해 보면 참 신기하다. 그저 와인이 마시고 싶어서 찾아갔던 가게가 단골 가게가 되고, 처음엔 형식적인 말만 하던 고객과 사장의 사이가 이젠 술에 취해 아무 말이나 뱉곤 하는 술친구가 되었다. 늘어가는 뱃살과 비어가는 통장을 만회하기 위해선 가든한밤을 1순위로 끊어야 하겠으나, 개가 똥을 끊지.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 밤도 가든한밤을 들리지나 않으면 다행이려나. 그저 바라는 것은 하나다. 사장님, 제가 이 동네를 떠나기 전엔 부디 망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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