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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코 Feb 05. 2024

착한 얼굴에 그렇지 못한 태도의 소매치기

<집순이의 첫 유럽여행기> 2편





바르셀로나행 비행기를 기다리며



비행기를 타기 위해 이른 아침 인천공항을 찾았다. 1월은 성수기가 아니기 때문에 공항은 한적했다. 티켓을 뽑고 캐리어를 맡기고 면세품을 찾는 과정은 익숙하지도 낯설지도 않았다. 살면서 국제선 비행기를 타본 것이 고작 세네 번에 불과한데도, 이런 경험은 몇 번만으로도 강렬한 인상이 남는 모양이었다.


면세품까지 찾고 나니 45분 정도 시간이 남아 있었다. 나는 곧장 라운지 위치를 검색했다. 비행기 타는 일이 적으니 라운지도 이용해 본 적이 없었고, 이번 기회에 해볼 건 다 해보자는 마음으로 스카이 허브 라운지를 이용할 수 있는 신용카드를 만들었다. '라운지? 음식도 별로 맛없고 그냥 그래!'라고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으나, 안 가본 사람 입장에서는 일단 가보고 난 뒤 '별로네.' 하고 싶은 법이다.



도착하니 혼자는 나뿐이었다. 조잘조잘 떠드는 사람들의 들뜬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닥쳐올 상황이 전혀 실감 나지 않았다. 1시간 후면 바르셀로나행 비행기에 탄다. 바르셀로나. 바르셀로나. 바르셀로나. 입안에 맴도는 다섯 글자를 꼭꼭 씹어봐도 아무런 맛과 향이 느껴지지 않았다. 유럽에 가본 적도 없고 바르셀로나를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경험한 적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한편, 라운지에 앉아 음악을 듣고 티켓과 여권을 확인하고 마지막 카톡을 보내며, 공항에서는 누군가와 함께 있는 편이 훨씬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에 있을 때는 혼자인 것을 아주 좋아하는 집순이인데도 말이다. 여행에 대한 설렘과 긴장이 아무렇게나 뭉쳐진 채 마음속을 굴러다녀서, 라운지에 있는 시간이 영 편하지 않았다. 이런 시간은 누군가와 어떤 말이든 주고받으며 흘려보내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기내식 맛있다,,

출국 전날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밤을 샜다. 덕분에 10시간이 넘는 긴 비행시간이 정말 쏜살같이 지났다. 첫 번째 기내식을 먹을 때까지는 나름 무언가 해보겠다며 책도 읽고 일기도 썼다. 하지만 비행기를 타면서부터 급격히 긴장이 풀렸고, 첫 기내식까지 먹고 나니 졸음이 쏟아졌다. 자다가 빵 주면 깨고 다시 밥 주면 깨고를 반복하니 왠지 사육당하는 느낌이었지만,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시간이 안 가 어쩔 줄 몰랐던 것과 비교하면 죽은 듯이 자는 게 훨씬 나았다.


항공편을 예약할 때 아시아나를 선택한 것은 단지 승무원과 영어로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영어가 편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다. 기내식으로 꼭 한식을 먹어야 된다는 생각은 없었는데, 막상 한식을 먹고 나니 아시아나든 대한항공이든 우리나라 비행기를 타는 것이 좋구나 싶었다. 10시간 넘게 앉아있느라 뻐근한 엉덩이 근육을 제외하면 불편함 하나 없는 비행이었다.




혼자 바르셀로나 공항에


비행기에서 정신없이 자다 내리고 나니 밖은 해가 지고 있었다. 오후 5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사람들이 우르르 나가는 쪽으로 이동하면서 바르셀로나에서 본 첫 풍경을 담았다. 



친구가 오기만을 기다린 카페

바르셀로나는 별다른 입국심사가 없어서 캐리어를 찾고 빠르게 빠져나왔다. 공항 안에 있는 카페에서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시켜놓고 친구를 기다렸다. 친구는 런던 히드로 공항에서 열심히 날아오는 중이었다. 커다란 캐리어를 옆에 두고 혼자 앉아있으니 인천공항에서보다 2배는 더 긴장이 됐다.


더군다나 비행기에서 내리기 직전에 유심칩을 갈아 끼웠는데, 설명서에 적힌 대로 열심히 문자를 보내도 Sorry 어쩌고 하는 영혼 없는 사과 문자만 되돌아와서 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공항 와이파이가 있어서 친구에게 위치는 알릴 수 있었지만,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는 것 자체가 당황스러웠다. 그래도 친구가 오면 뭔가 해결되지 않을까 기대를 하며 미어캣처럼 30초에 한 번씩 고개를 들었다.


출국날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가죽 워커를 신고 있었는데, 비행시간 내내 신발을 벗고 있었는데도 발이 꽤 부었다. 워커가 꽉 껴서 벗어 던지고 싶다 생각할 때쯤 친구가 도착했다.




착한 얼굴에 그렇지 못한 태도의 소매치기



여행 내내 숙소는 아파트 호텔을 예약했다. 나보다 여행을 많이 해본 친구의 의견이었고 이유는 간단한 아침이라도 해 먹기 위함이었다. 가격과 위치, 샤워기 생김새까지 따져가며 숙소를 골랐고 특히 바르셀로나는 저녁에 도착할 것을 고려해 24시간 체크인이 가능한 곳으로 예약했다. 하지만 한 가지 놓친 것이 있었다. 체크인을 하는 곳과 머무는 곳이 다른 건물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맙소사.


택시를 타고 호텔까지 찾아갔으나 로비는 잠겨있었고 문 너머로 보이는 카운터는 비어있었다. 호텔로 전화를 하니 15분 거리에 있는 다른 호텔로 와서 키를 받아가라고 했다. 호텔 두 개를 같이 운영하고 있는데 밤에는 한 호텔의 카운터만 열어두는 듯했다. 밖은 캄캄했고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어서 결국 다시 택시를 타기로 했다. 그리고 이때 말로만 듣던 유럽의 소매치기를 만났다.




키가 185cm는 되어 보이는 20대 중후반의 남성이 맞은편에서 에어팟을 끼고 걸어오고 있었고, 우리는 방해가 되지 않게 한쪽으로 피했다. 그는 그대로 지나갔고, 우리는 지도로 길을 확인하느라 멈췄다 걷기를 반복하며 큰길로 이동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캐리어 소리에 인기척을 숨긴 채 따라오던 그의 발소리를 들었다. 그는 우리를 지나쳐간 것이 아니라 내내 뒤를 쫓고 있었던 것이다. 텅 빈 밤거리에서 캐리어 끄는 소리는 민망할 정도로 또렷하게 들렸고, 캐리어 위에 가방을 얹어둔 상태였으니 타깃이 되기 좋았던 것 같다.


그때부터 소매치기는 산책하는 척, 우리가 안 보이는 척, 나라에서 허락한 유일한 마약인 음악에 심취한 척하며 쫓아왔다. 빠르게 걸을수록 캐리어 끄는 소리는 점점 커졌고 소매치기는 끈질기게 뒤따라왔다. 하지만 캐리어를 들고 뛸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를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며 가방을 앞으로 메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간신히 큰길에 도착해 택시를 불렀고, 기사님이 캐리어를 트렁크에 넣는 순간까지도 그는 호시탐탐 우리를 노렸다. 기사님도 그를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볼 정도. 택시에 타고나서 보니 가방 밖으로 아이폰 충전 줄이 빼꼼 나와있었는데, 이 줄을 당기면 끝에 휴대폰이 달려있을 것이라 기대하며 쫓아온 게 아닌가 싶다.


당시 유랑에는 스페인에서 소매치기를 당했다는 글이 많았다. 다음날에도 지도를 보느라 꺼낸 아이폰을 훔치러 왔다가 기종이 아이폰 4 임을 알고 그냥 가버린 소매치기도 있었고(지도 확인용으로 친구가 오래된 아이폰을 가져왔다), 가우디 투어를 다니며 지하철을 탔는데 현지 가이드가 있음에도 소매치기가 따라붙었다.


소매치기를 보며 놀라웠던 점은, 그들은 눈이 마주치면 세상 인자한 미소를 짓는다는 것이다. 바르셀로나의 어느 마트나 음식점을 가도 이런 인자한 미소를 가진 직원을 볼 수 없었는데. 호텔 직원보다 더 너그러운 미소를 띤 착한 얼굴로 물건을 훔친다니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도착하자마자 소매치기를 마주친 덕분에 다음날 바로 힙색을 샀고, 소매치기스러운 사람이 없는지 예의주시하면서 다닌 덕에 아무것도 훔침 당하지 않고(?) 돌아올 수 있었다.




먹태가 왜 거기서 나와..?



간신히 도착한 숙소는 비록 원룸에 화장실뿐인 공간이었지만 숙소에 오기까지 과정이 너무나 험난했던 탓에 집에 온 것처럼 느껴졌다. 짐을 정리할 기운조차 없어서 당장 입을 잠옷과 세면도구만 꺼내고 샤워를 했다. 지금도 사진을 보면 참 아늑했었지, 하는 착각이 든다. 하지만 조명과 벽면 색이 따뜻했을 뿐 여행을 하며 머문 그 어떤 숙소보다도 추웠다. 흡사 베란다에서 자는 느낌이었고, 바르셀로나에 도착하자마자 한국의 보일러가 그리워졌다. 결국 코트 안에 입으려고 가져온 패딩 조끼를 입고 야경을 볼 때 사용하려던 핫팩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씻고 나온 뒤 입은 옷을 정리하는데 친구가 캐리어에서 먹태를 꺼냈다. 런던에서 온 유학생 가방에서 먹태가 나오다니? 나도 한국에서 라면을 챙겨 오긴 했지만, 또 친구도 무언가 먹을 것을 가져오리라 예상은 했지만, 그것이 먹태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먹태는 여행 내내 아주 좋은 맥주 안주가 되었다.


어쩌다 보니 먹태는 한국의 맛이 아니라 바르셀로나의 맛이 됐다. 여행을 가기 전에는 일 년에 두세 번 먹을까 말까 한 안주였고, 되려 한국에 돌아온 뒤 마요네즈와 와사비가 섞인 소스에 먹태를 찍어 먹으며 '아무래도 바르셀로나 맛이네.' 하게 됐다.



여행은 시작됐다


한국에서는 암막 커튼으로 햇빛을 철저히 차단해서 늦잠을 잘 수 있지만, 이곳은 아니었다. 호텔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 덕에 아침 6시가 조금 넘었을 때 저절로 눈이 떠졌다. 커튼을 한 겹 벗겨내자 얇은 레이스 사이로 해가 뜨는 것이 보였다. 멍하니 창밖을 보는데 핫팩으로 드문드문 따뜻해진 매트리스의 딱딱함과 희미하게 락스 냄새가 나는 이불의 바스락거림이 생경했다. 코끝에는 찬 공기가 와 닿았다. 어젯밤의 피로가 가시지 않았지만 '집 밖에서 이 정도면 잘 잤지 뭐.'라고 생각하며 다시 눈을 감았다.



깜빡 잠이 들고 다시 깨어나 보니 완전히 해가 뜬 뒤였다. 나는 밤을 새우고 비행기에 탔고 친구는 졸업 시험을 마치고 곧바로 날아왔기 때문에, 둘 다 그야말로 기절했었다. 그 덕분에 추운 줄 모르고 잤는데 정신을 차리고 나니, 차라리 밖에서 걸어 다니는 것이 덜 춥겠다 싶었다. 부랴부랴 나갈 준비를 했다. 근처에는 크로와상으로 유명한 '호프만 베이커리'가 있었고, 아침은 간단히 빵을 먹기로 했다.



나갈 채비를 마치고 친구가 준비하기를 기다리며 일회용 필름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손톱만한 프레임 안에 흐릿하게 보이는 커튼과 그 너머의 창. 그리고 팅- 하고 어딘가 비어있는 듯한 스프링 소리와 함께 여행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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