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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코 May 01. 2024

브런치에 들어오지 않은 봄에

3월, 4월 월말정산




꽃이 졌다

브런치에 들어오지 않는 동안 봄이 지났다. 지나간 시간은 외면하고 5월 월말정산 글부터 다시 시작할까 했지만, 올해 목표 중 하나는 브런치에 꼬박꼬박 월별 기록을 남기는 것이기도 했으니 기억을 더듬어보려고 한다.


우선 3월엔 생일이 있었다. 눈 깜짝할 새 서른셋이 되었고 어쩌면, 아주 재수가 없으면 살아온 날보다 살 날이 적게 남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는 새 어떤 분기점을 넘은 것이라 생각하면 기분이 이상하다. 특별히 부지런하지도 게으르지도 않았는데 한 살 더 먹는다는 게 상과 벌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


4월엔 취업을 했다. 작년 여름 퇴사해 다시 경제활동인구로 돌아오기까지 꼬박 8개월이 걸렸다. 예상보다 길어지는 취준 생활에 이래저래 치인 마음 구석구석을 살펴서 닦고 회복하는 시간을 가졌고, 여행을 다녀왔고, 다음 달 출근을 앞두고 있다.


생일이라고 특별한 일은 없었던 3월, 취업과 취업 이후의 삶을 솎아내기 바빴던 4월의 <장소/사람/글/영화/음악>을 갈무리하려는데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꽃이 다 져서 그런걸까? 이 글을 마무리지을 때쯤엔 조금은 기분이 나아지기를 바라며 쌓아온 말들을 적어 내려가본다.







기억에 남는 장소 <일본 교토 료안지>

#일본여행 #교토여행





4일 내내 비가 온다는 예보와 달리, 이 날은 비가 안 왔다. 예상을 빗나가는 일이 이렇게 즐거울 수가.

새로운 회사로의 출근을 앞두고 잠깐이나마 여행을 다녀오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급하게 준비해서 가야 했고 여행 앞뒤로 이런저런 일들이 끼어있는 데다 또 금전적인 문제도 따라서 가까운 일본을 택했다. 긴 백수 기간의 마침표이면서 얼마나 길어질지 모를 도전의 시작인 따옴표와도 같았던 4일. 다녀온 후 벌써 여러 번 곱씹고 있는 장소는 바로 료안지의 정원이다. 


어느 곳에서 보아도 15개의 돌을 전부 볼 수는 없다는 료안지의 돌 정원. 특별히 체험할 것도 없고 그저 마룻바닥에 앉아 멍하니 돌과 자갈을 바라볼 뿐인 이곳은 나에게는 꽤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처음 료안지에 온 건 거의 10년 전 일이다. 눈이 잔뜩 내렸던 겨울, 마루에 앉아 햇살을 받는 동안 주변 소음이 잦아들고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을 느꼈던 그 5분 남짓한 시간을 참 오래도록 간직했다. 


정반대의 계절에 다시 본 료안지의 풍경은 기억과 사뭇 달랐다. 여기저기서 새소리가 들리고 생명이 움트는 생기 가득한 정원에 앉아있으니 정신은 점점 더 말똥해졌고 얼른 주변을 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꿈틀거려서 가만히 앉아있기가 힘들었다. 여름의 료안지는 이렇게 다른 모습을 하고 있구나, 또 한 번 이곳이 좋아지는 순간이었다. 





계절과 무관한 이 평화로움이 좋다


일본 여행을 떠나겠다고 결심한 뒤 고민하지도 않고 교토에 4일 머무는 일정을 계획했다. 이유는 교토에 다녀와서 마무리해야 하는 글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짐대로 여행을 다녀온 후 기존 글에 약간의 수정을 더하고 비어있던 반 장 분량을 채웠다. 이것이 좋은 글, 대단한 글인가 하면 0.001초도 고민하지 않고 단연코 아니라 말하겠다. 하지만 이만큼의 완성도를 위해 여름의 료안지를 봐야만 했고, 다녀왔으며, 1차로 마무리 지었다. 


나는 이런 경험이 지금의 나에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곧 죽어도 완성하는 것. 다시 읽기에도 수치스러운 소설일지라도 마침표를 찍고 다음 스텝으로 넘어가는 것. 쓰는 사람으로서 조금이라도 더 나아가기 위함이다.








기억에 남는 사람 <모인츠>

#MOINTZ #기록하는사람들



햇살이 잘 드는 모인츠 하우스. 오른쪽은 마지막 시간에 진행했던 콜라주 작업

언젠가 한 번은 브런치에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던 <모인츠>. 올봄 기억에 남는 사람으로 <모인츠>에서 만난 사람들을 꼽아본다. <모인츠>는 CGV에서 주최하는 영화 기반의 모임으로 '경험의 순간을 나누는 취향 커뮤니티'를 표방한다. 나는 낯선 사람을 만나는 자리에 자발적으로는 잘 가지 않는 편이지만, 새해니까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모임을 알아봤다.


평소 영화를 자주 접하는 편은 아니라 어떤 곳에 가야 잘 적응할 수 있을까 고민했었는데,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기록을 주제로 한 '기록하는 사람들'이라는 모임이 있어 망설임 없이 선택했고 다행히 모든 회차에 빠지지 않고 전부 나갔다. 상반기의 뿌듯한 일 중 하나.




마지막날엔 감사하게도 선물을 받았다

리코라는 닉네임도 이곳에서 얻었다. 첫날, 모임에서 부를 닉네임을 정하는 시간이 되자 나도 모르게 가방에 있던 리코 카메라가 떠올랐다. 첫 월급으로 큰맘 먹고 사 소중한 날마다 기록을 남겨주는 고마운 카메라. 모임 내내 리코로 불린 것이 맘에 들어서 내친김에 브런치 이름까지 바꿨다. 


여전히 잘 모르는 것 투성이인 관계고 또 이렇게 지나가는 인연일 수 있지만, 함께 보낸 시간을 떠올렸을 때 모나게 찔리는 것 하나 없으니 낯선 사람들이 한데 모여 다분히 노력한 덕이라는 생각이 든다.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








기억에 남는 글 <그러니까 시는>

#씨네21 #김소영 #어린이라는세계




버추얼 휴먼에 대해 알아보고 싶은데 영 정보가 없던 차에 <씨네 21>에 버추얼 아이돌에 대한 기사가 있는 걸 발견하고 고민 없이 결제했다. 아마도 봉준호 감독과 관련한 기사를 읽으려 샀던 이후로 두 번째 구매. 영화 잡지를 사는 것도 읽는 것도 손에 익지 않은 사람이고 더욱이 버추얼 아이돌에 대한 내용은 읽을수록 더 먼 행성처럼 느껴져서 넘기는 내내 종이 질감마저 어색했는데, 마지막 페이지를 보고 반가움에 아! 소리를 냈다.

그러니까, 저도 시를 좋아하거든요.


언제부턴가 내 연애관은 나보다 시를 잘 알지 않으면서 시 읽기에 빠져드는 사람을 찾는 심보로 요약된다. 나는 이게 제법 웃기다 생각한다. 누가 나보고 시를 많이 읽냐 묻는다면, 보통 사람들이 시를 읽는 것보단 시를 많이 읽고, 책을 읽는 사람들의 평균치만큼 시를 읽고, 책장에 시집이 10권 이상 있는 사람보단 시를 덜 읽는다고 답하겠다. 그러니까 많이 읽는 건지 적게 읽는 건지 나도 모르겠다는 소리다. 그렇지만 시를 좋아하는 건 분명하다. 남몰래 인스타그램 한 귀퉁이에 다시 읽고 싶은 시를 모아두기도 했다. 


시를 읽을 때면 늘 이해보다 감상이 앞선다. 미술관에서 그림을 보듯 시를 본다. 그게 시를 읽는 적확한 방식인지는 모른다. 다만 그렇게 보면 머리를 댕-하니 얻어맞은 것 같은 순간이 자주 오고 그때마다 기분이 좋다. 그래서 자꾸만 뒤통수를 얼얼하게 할 문장을 찾으려 시집을 편다. 올해는 더 자주 시를 읽으려고 노력 중이다. 자꾸만 줄어드는 상상력을 길러보고 싶은 마음!








기억에 남는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마구치류스케 #오르페오한남




지나가듯 본 포스터가 내내 생각나 보고 온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평범한 영화관에서 봤더라면 조금은 지루했을지도 모르지만 처음 방문한 <오르페오 한남>에서 보아 다행이었다. <오르페오 한남>은 사운즈 한남에 위치한 사운드에 특화된 영화관이다. 인스타 DM이나 카카오톡으로 예약해야 하고 2만 5천 원이라는 가격 압박까지 따름에도 불구하고 궁금한 건 못 참기 때문에 방문했다. 상영관은 하나였고 자리도 많지 않은 데다 지정석이 아니라서 상영 전에 미리 자리를 잡는 것이 좋다. 나는 평일 낮에 간 덕에 중앙에 앉아 볼 수 있었다. 




영화는 한 시골 마을에 글램핑장이 들어선다는 소식이 들리며 시작된다.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설명회를 하는 담당자들. 하지만 코로나 지원금을 노렸을 뿐인 엉터리 글램핑장 계획은 마을 사람들 눈에는 허점 투성이었다. 더욱이 그들이 내세운 계획대로라면 글램핑장에서 나올 오염수는 마을을 망가뜨릴 위험까지 있다. 마을 사람들이 이에 어떻게 대응할까 궁금해지는 시점에 주인공의 딸이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하고, 온 마을이 어린 딸을 찾아 헤맨다. 그리고 마침내 주인공이 맞닥뜨린 마지막 장면 속에서 그의 행동은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내내 관객들이 충격으로 앉아있게 만든다.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펼쳐지는 자연의 소리와 정적 사이로 음산한 분위기를 만드는 사운드 트랙을 귀담아들을 수 있었던, 오르페오의 첫 영화로 좋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이었다. 롱테이크로 시작하는 도입부가 가장 좋았고, 정말 시골 마을 사람을 데려다 놓은 듯한 주인공의 어색한 연기가 맘에 들었는데 실제로 그는 영화 스태프 출신으로 감독에게 캐스팅당한 것이었다. 세상에. 하마구치 류스케의 다른 작품을 접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했던 영화였다.








기억에 남는 음악 <It's just a burning memory>

#TheCaretaker



https://www.youtube.com/watch?v=wJWksPWDKOc


무려 6시간 반짜리 노래를 찾았다. 3천만이 넘는 조회수를 보아하니 또 나만 몰랐나 싶다. <Everywhere At The End Of Time - Stages 1-6> 중 Stage 1의 도입부 음악인 <It's just a burning memory>를 4월 내 한곡 반복하며 자주 들었다. 제목처럼 알 수 없는 미래의 어느 시점에 편안한 의자에 앉아 지금의 힘듦을 추억하며 들을 것만 같은 노래다. 


현실이 불안하고 마음이 옹졸해질 때마다 먼 미래에서 현재를 바라보는 상상을 한다. 화살을 쏘기 위해 과녁을 겨눌 수조차 없을 정도로 멀어진 거리에서 현실을 가늠해 본다. 조금 틀어지고 달라져도 아직은 안심해도 된다. 갈 길이 머니까 약간 휘어진 궤도는 금방 바로잡을 수 있다. 이처럼 미래의 내가 오늘의 나를 위로하는 듯한 노래를 발견해 설레는 기분. 물론 뒤이어 오는 음악들도 좋다. 아직 6시간 반을 꼬박 듣진 못했지만 하루를 통으로 시간을 내 온종일 들어보고 싶다.





5월 중에 국내 여행을 혼자 다녀오려고 한다. 여행지에서 읽을 시집을 2권 샀다. 아마 단출한 1박 2일 여행이 되겠지. 어디로 떠날지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떠난다는 마음과 보내야 할 5월과 그 속의 텍스트만이 있다. 


5월엔 이런저런 기다리는 일들이 있다. 상상하면 설렘과 긴장으로 기분이 오락가락하는 새로운 도전. 어떻게 펼쳐질지 기대가 된다. 다만 그전에, 오랜만에 남기는 브런치의 글과 함께 올봄을 마무리 지어본다. 

다음달에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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