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한 설렘
장르를 가리지 않고 만화책을 무수히 읽던 시절이 있었다. 용돈의 대부분을 한 권 대여료 300원에 썼던 청소년기. 시험이 끝나자마자 책방으로 달려갔고, 가방에 담기도 힘들 정도로 한가득 빌린 날이면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했다. 한 손에 들어오는 작은 책에는 로맨스, 추리, 스포츠, 판타지, 소년물까지 온갖 상상이 넘실거렸다. 그중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한 장르는 단연코 로맨스였으리라. 세상은 넓고 만화책 속에는 매력적인 주인공들로 넘쳐났다. 잘생기고 다정한 주인공에 반해 두근거리다, 매몰찬 성격에 숨겨진 따뜻함에 감동하다, 가슴 아픈 사연에 명치 부근이 저릿해서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손에 든 만화책을 놓지 않았던 소녀. 아이러니하게도 로맨스를 좋아했던 그 소녀는 비혼주의자였다.
가치관이라 불릴 만한 것이 자리 잡은 때부터 자신을 비혼주의자라고 여겼다. 그렇다고 연애하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결혼과 연애는 다른 것. 언제부터인지 자연스레 그렇게 생각했다. 아마도 그리 즐겨 읽던 만화책의 영향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수도 없이 읽은 로맨스 만화책에는 '결혼'이라는 비중이 얼마나 있었을까? 내가 읽었던 대부분의 만화에는 없었다. 마치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는 동화처럼 '결혼 후 그들은 행복하게 잘 살았더래요'라고 해피엔딩의 연장선을 위해 추가된 페이지에 불과해 보였다. 비혼주의자인 소녀는 언젠가 다가올 로맨스를 상상하며 남몰래 설렜다. 별다른 변화 없이 소녀는 이십 대가 되었다. 수도 없이 만화책을 읽었기에 알고 있었다. 만화는 현실과 다르다는 것을.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내 삶에 '로맨스'가 없을 줄은 몰랐다. 대학생이 되었는데 흔한 썸도 없었다. 누군가에게 호감을 느낄 때도 있었지만, 짝사랑은 더는 하고 싶지 않았다. 주고받는 사랑이 궁금했다. 혼자서 고민하다 친구들에게 SOS를 보냈다. 그들을 따라 머리카락을 어깨 너머까지 기르고(청소년기 대부분을 커트 머리로 지냈었다) 앞머리 냈다. 관심도 없던 화장품을 사고 거울에 바싹 붙어 아이라인 그리는 법을 배웠다. 옷장과 신발장에는 짧은 치마, 높은 구두까지 이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아이템이 추가되었다. 달라진 내 모습이 전신 거울 앞에 어색하지 않을 때쯤-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소개팅을 해달라고 말했다. 간절한 마음을 담아 장난기 하나 없이 진지하게! 그들이 농담으로 흘려 넘기지 못하도록. 다행히도 얼마 지나지 않아 첫 소개팅이 잡혔다. 초중고 같은 학교에 다녔던 친한 친구의 제안이었다. 상대는 친구 남친의 절친이라고 했다. 이런저런 부연 설명을 하려던 친구의 말을 자르고 무조건 하겠다고 했다. 당시 내게 필요한 것은 경험치였다. 최악의 소개팅이라 될지라도 그 경험이 필요했다. 외모 가꾸기가 '로맨스'에 닿기 위한 튜토리얼이었다면, 소개팅은 레벨업을 위한 첫 던전이었다.
겨울의 끝자락인 2월, 여전히 롱패딩이 간절한 날이었다. 나는 기모 스타킹에 짧은 치마, 코트를 걸치고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곱슬한 머리의 키가 큰 남자가 말을 걸어왔고 함께 파스타집으로 향했다. 어색할 줄로만 알았던 대화가 의외로 자연스러웠다. 공통점이 많았다는 게 한몫했다. 살고 있는 동네가 가까웠고, 같은 대학교를 다녔다. 남자는 졸업을 앞두고 있었고 나는 졸업까지 1년이 남아있었다. 이야기 소재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 눈앞의 남자가 대화를 잘 유도하는 듯했다. 그 자연스러움에 이끌려 2차로 비어마트에 갔다. 남자는 그곳에 있는 다트 게임기를 보고는 이마 딱밤 내기를 하자고 했다. 친구들과 다트 게임을 몇 번 해본 적이 있었던 나는 흔쾌히 내기를 받아들였다. 그때는 승부욕에 눈이 멀어 눈치채지 못했다. 그 게임에 키와 팔, 다리 길이가 엄청난 핸디캡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초반에 이길 것만 같던 게임은 정신 차려보니 나의 패배로 끝났다. 아쉬운 마음도 잠시 오랜만에 맞을 딱밤이 걱정스러웠다. 눈앞의 남자는 그런 상황이 즐거운지 요란하게 손가락을 풀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의 입꼬리가 얄미웠지만 원래 패자란 그런 것까지 받아들여야만 했다. 눈을 꼭 감고 이마를 내밀었다. 세게 때릴 거라는 으름장에 입술을 깨물려다 겨우 참았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이마에 뭉툭한 느낌이 톡-하고 스쳤다.
"농담이지, 진짜 할 줄 알았어요?"
눈을 떠보니 느릿하게 움직인 손가락 하나가 내 이마에 잠시 지문을 남기고 간 듯했다. 그리고 환하게 웃고 있는 낯선 남자의 얼굴. 어쩐지 순식간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내기에 목숨 걸고 진짜 딱밤을 서로 때리려 했던 남사친들과는 다르다는 게 갑자기 훅- 와닿아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두 번째 만남은 한정식집이었다. 돌솥밥을 주는 곳이었는데 낯선 남자는 누룽지를 좋아했다. 남아있는 누룽지 때문에 영화 보기를 포기할지 잠시 고민할 정도로 진심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동네는 가까웠지만 타는 버스는 달랐다. 남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우리 집으로 가는 버스 정류장에 나란히 섰다. 이런저런 말을 거는 남자의 코끝이 눈에 띄게 붉어져 있었다. 3월을 눈앞에 둔 그날에도 여전히 시린 칼바람이 불었다. 도착한 버스에 짤막한 인사를 건네고는 재빨리 올라탔다. 자리를 잡고 서서 창밖을 보는데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추웠을까. 내색 없이 기다려준 게 미안하고 또 고마웠다. 혹시라도 그 뒷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창밖을 다시 한번 바라봤다. 톡, 톡- 어깨에 가볍게 두드렸다. 뒷모습을 찾으려 했던 그 남자가 바로 곁에서 있었다. 그리고 딱밤으로 놀렸던 것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배웅하는 척하고는 살금살금 다가와 어깨를 두드릴 순간을 숨죽여 기다렸을 그 모습을 상상하니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우리는 함께 집 근처 버스 정류장에서 내렸다. 남자는 내게 잠시 걷자고 했고, 무심하게 무언가를 건넸다. 그가 건넨 것은 따뜻한 캔 커피였다. 내내 같이 있었는데 또 언제 이런 걸 갖고 있었던 건지- 커다란 키의 남자가 자꾸 몰래 무언가를 하는 상상에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주머니 속에 있었던 캔 커피는 마치 댈 듯이 뜨거웠다. 하지만 이상하게 손에서 놓고 싶지 않았다. 커피를 만지작거리는 내게 남자가 말했다.
"더 잘 챙겨주고 싶어. 그래서 사귀고 싶어."
예상치 못한 말에 나는 놀랐다. 그는 내게 여전히 낯선 남자였다. 이제 겨우 두 번을 만났을 뿐이었다. 첫 만남 이후에 얼굴 생김새가 기억나지 않아서 길을 지나다 알아보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했던 나였다. 그런데 연애를 시작하자고 하다니- 그가 더욱 낯설게 느껴졌다.
"좀...생각해 볼게."
한참을 머뭇거린 내가 뱉은 말. 내게 필요한 게 몇 시간인지 며칠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그 말을 들은 남자가 막연히 기다리겠다고 말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생각할 게 뭐있어, 이런 애매한 관계가 아니라면 더 잘해줄 수 있어, 뭘 고민하고 있는 거야, 너무 재는 것 같아- 의 말을 끊임없이 덧붙였다. 깊어진 밤, 바람은 더욱 시리게 얼굴에 닿았다. 하지만 걸음을 멈출 수 없어 계속해서 앞으로 걸었다. 낯선 남자도 내가 걷는 속도에 맞춰 함께 나란히 걸었다. 결국 나는 그날 밤,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견딜 수 없이 차가운 칼바람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어르고 달래던 그의 끈질김 때문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손바닥을 끊임없이 데워주고 있던 그 캔 커피 때문이었을까.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정신없이 다가온 나의 로맨스는 그렇게 얼떨결에 시작되었다. 백수와 졸업을 앞둔 대학생은 로망이 가득했던 연애를 하기에 충분한 직업이었다. 날이 따뜻해지면 돗자리 하나 챙겨서 어린이 대공원으로 향했다. 시원한 계곡 옆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그가 준비한 도시락을 먹었다. 매일 밤 잠드는 게 아쉬울 정도로 통화를 하고 싶었다. 잠을 좀처럼 참지 못하는 그는 늦은 밤이 되면 잠꼬대 같은 말을 했다. 꿈과 현실을 왔다 갔다 하면서도 어떻게든 전화를 붙들고 있어 주는 모습이 나를 향한 애정 같아서 더 오랫동안 붙들고 있었다. 더블데이트, 놀이동산, 아쿠아리움 그리고 여행까지 알고 있던 것들이 새로운 것으로 변하는 마법이 내게도 왔다.
그렇게 로맨스를 위해 뛰어들었던 첫 던전에서 레벨업도 모자라 무려 7년을 눌러앉았다. 그리고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결혼을 했다. 결혼 8년 차인 지금, 나는 여전히 로맨스 만화, 웹툰에 빠져있다. 종이가 아닌 디지털 화면으로 자주 만나게 되는 주인공들은 눈동자 색까지 화려하다. 매력적인 모습으로 사랑에 대해 말하는 그들을 보다 가슴이 아릿해져서 혼자 발을 동동 구르곤 한다. 뒷이야기가 궁금해 일주일이 괴롭게 느껴지는 건 소녀였던 때와 다를 바 없다. 여전히 만화는 현실에서 부족한 '로맨스력'을 충전하는 장소였다. 그 어떤 새로운 일을 도전한다 해도 10년 넘게 함께 지내온 남편에게서 두근거리는 로맨스를 얻을 수는 없으니까. 그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변화가 의외로 서글프지는 않다. 그 이유는 7년을 첫 던전에 눌러앉아 깨달은 사실 때문이다. 가슴 뛰는 로맨스는 현실보다 만화로 보는 것이 더 즐겁다는 것. 만화로는 알 수 있다. 주인공들의 진짜 속내와 무의식중에 움직인 몸짓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 수밖에 없다. 작가의 의도대로 멈춰진 장면들에는 명확한 사인이 담겨있다. 늦게 알아차렸다 해도 앞으로 돌아가 다시 읽으면서 찾아낼 수도 있다. 그렇게 서로 좋아하지만, 자꾸만 엇갈리는 그들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감질나 기다림이 힘들어지는 순간들도 결국엔 한순간에 도파민으로 바뀌게 될 테니까.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상대의 속마음을 들여다볼 수도, 몸짓의 의도를 거짓 없이 알아내는 것도 불가능하다. 하물며 시시각각 변하는 내 마음을 장담하기도 어렵다. 그러니 현실판 로맨스란 불안한 마음 위에 아슬하게 얹어진 강렬한 감정이었다. 뜨겁게 사랑을 말하다가도 한순간에 남이 될 수 있기에 그토록 두근거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는 많은 순간을 넘어 더는 불안하지 않은 현재까지 왔다.
낯선 남자는 지금도 여전히 장난기가 많고, 함부로 이길 수 없을 정도로 말이 많다. 돌솥밥의 누룽지를 좋아하고, 캔 커피처럼 따뜻한 손을 가졌다. 우리는 함께 기꺼이 유치한 게임을 하고, 날이 좋을 때면 한적한 곳으로 나들이 간다. 집에서 누룽지를 해 먹을 수 있는 돌솥이 있고, 잠들기 아쉬운 밤이면 서로를 흔들어 깨워 괴롭히고, 나란히 걸을 때면 따뜻한 그의 손을 잡는다. 그의 손을 잡을 때 더는 떨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 두근거림보다 확실한 애정의 시선에 편안함을 느낀다. 사라진 것 같은 로맨스는 하루하루에 녹아, 이제는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었다. 마치 오랜 시간 동안 뭉근하게 끓여낸 국물의 깊은 맛처럼- 예상치 못한 다른 형태의 사랑이 단단하게 나를 잡아주고 있다.
가끔 느끼고 싶은 설렘이야 만화로 채워주면 그만이다. 추운 겨울, 열어둔 창문에서 넘어오는 상쾌한 냉기를 느끼며 따뜻한 전기장판의 온기 속에 있는 사치랄까? 그 안전한 설렘이 주는 기분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지금이 꽤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