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장에서 꺼낸 오래된 인
엄마, 잘 지내고 있었어?
나는 엊그제 오랜만에 이불장 정리를 좀 했어.
한 겨울에 무슨 이불장 정리냐고? 겨울 이불을 꺼낼 때 쓰던 이불 정리를 다 못했었거든.^^* 조만간 빨아야지 하고 작은 방에 뒀던 이불들을 드디어 전부 세탁기와 건조기에 돌렸어. 포근한 냄새가 나는 이불을 만지니까 기분이 좋더라. 깨끗한 이불을 예쁘게 개서 넣으려고 이불장을 호기롭게 열었는데, 잠시 당황하고 말았어. 왜냐하면 초롱초롱한 눈망울과 마주쳤거든. 한 쌍도 아니고 무려 다섯 쌍씩이나 말이야.
혹시 정체가 뭔지 눈치챘어? ㅎㅎ
지난 여름날의 이불 위에는 다섯 마리의 인형이 옹기종기 앉아 있었어. 생김새가 모두 다른 그 인형들에게는 모두 저마다 이름이 있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성에게 선물 받았던 똘이, 낚시 카페에서 물고기 잡은 경품으로 얻게 된 바비, 게임에서 제일 좋아했던 캐릭터인 좀비 쿠키, 다이소에서 포근한 느낌에 데려온 양이. 그리고 엄마도 잘 알고 있는 곰돌이까지. 이름만큼이나 사연이 가득한 녀석들이야. 그런데 놀랄 정도로 잊고 살고 있었어.
빨아둔 이불을 잠시 내려놓고, 생각에 잠겼어. 이대로 두는 게 맞는걸까라는 의문이 자꾸 들었거든. 이불장에서 모두 꺼내서 거실 한가운데 앉혀봤어. 모두 세월의 흔적이 가득하더라. 빨래해도 그 자국은 지워지지 않더라고. 몇몇은 보내줘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 특히나 곰돌이랑은 진짜 이별해야 할까 봐.
이별을 생각하니 이상하게 만남이 떠오르더라.
엄마 집에서 가져온 어렸을 때 앨범을 열었어. 크고 두꺼운 앨범은 보기만 해도 세월의 흔적이 가득해. 아이보리색 표지에도 세월의 떼가 고스란히 쌓여 있네. 나는 깨끗한 색감보다 어쩐지 그 모습이 좋아. 왠지 이 앨범은 이런 겉모습이 어울리는 것 같아. 매번 사진을 먼저 보느라 몰랐는데, 앨범 앞에 아빠가 적어놓은 기록이 꽤 많더라. 출생증부터 뒤집기, 걸음마, 엄마라는 말은 언제 했는지도 있더라고. 백일에는 뭘 했고, 돌잡이에는 연필을 잡았고, 음식을 마련하느라 엄마가 고생했다는 이야기까지- 그 짧은 기록에 기억에도 없는 풍경을 상상해 보게 돼. 그럼 왠지 몽글하고 기분 좋은 기분이 들어. 사진을 들여다보면 더 그래. ‘나’라고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자그마한 모습의 존재가 가득하거든. 이상하게 봐도 봐도 안 질려. ㅋㅋ 아주 가끔 열어봐서 그렇겠지?
한참을 넘겨보다 원하던 사진을 찾았네. 사진에는 이불 위에 앉아 활짝 웃는 꼬맹이와 그 꼬맹이만 한 인형이 담겨 있어. 기억에도 없는 풍경이 아련한 이유는 그때의 꼬맹이는 서른을 훌쩍 넘겨서 다시 만날 수 없고, 손에 쥔 장난감의 행방을 알 수도 없고, 사진을 찍었던 방은 사라졌을지도 모르기 때문이겠지? 멈춰있는 사진 속에서 유일하게 그대로 남아있는 딱 하나가 바로 곰돌이 인형이었어.
사진에 찍힌 날짜로만 봐도 삼십여 년이 넘었네. 하얗고 짧은 털이 온몸에 뒤덮인 곰돌이는 길쭉하고 납작한 타원형으로 생겼어. 넓은 면에는 한 뼘 길이의 짧은 지느러미가 양쪽으로 달려있고, 좁은 면 한 쪽에 앙증맞은 눈코입이 있지. 반대쪽에는 또 한 뼘 크기의 작은 지느러미 두 개가 나란히 달려있어. 맞아, 엄마도 알다시피 곰돌이는 곰 인형이 아니야. 물개 모양의 인형이지. 어쩌다 이름이 그렇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부터 우리 집에서는 그 인형을 ‘곰돌이’라고 불렀어. 엄마가 한 번씩 “곰돌이 빨게 가져와”라고 했던 말이 기억나. ㅋㅋ 여튼 아주 어린 시절부터 곁에 있었고, 기억하는 순간부터는 언제나 곰돌이를 안고 잠이 들었어. 요즘도 그렇긴 해. 옆으로 누워서 허공에 뜬 팔다리를 인형 위에 내려놓는 게 편하게 느껴지거든. 그 역할을 가장 오랫동안 해줬던 게 곰돌이일 거야. 하얗고 납딱한 물개는 항상 내 침구 곁에 머물렀어. 땀띠가 날 것 같은 더위에도, 발끝이 서늘해서 좀처럼 잠이 오지 않는 이불 속에서도 오래도록 같이 있었네.
새로 빨고 나면 털이 좀 빳빳해지면서 섬유유연제 냄새가 가득했던 게 아직도 선명하게 떠올라. 버리지도 못하고 신혼집을 거쳐 지금까지도 이불장에 두고 있는 건 그 때문일 거야. 근데 너무 낡았어. 사진 속에서 새하얗던 털은 세월의 흔적으로 꾀죄죄하고, 군데군데 땜빵처럼 털이 잔뜩 빠져서 우둘투둘해. 새까만 눈동자는 긁히고 깨진 자국으로 가득하고, 눈 주변에 천이 헐거워져서 안에 있는 솜이 보였어. 몸통에 있는 솜은 제멋대로 엉겨 붙어서 포근한 느낌이 없어졌어. 그러다 보니 점점 멀어졌겠지. 인형에도 영혼이 있다면 무지하게 섭섭하게 생각할 것 같아.
사실 정리하겠다고 마음먹은 지는 무척 오래됐어. 인형을 고쳐주는 곳에 보낼까 하고 찾아봤는데, 너무 오래돼서 재생할 수 있는 부분이 없겠더라고. 기부하기엔 너무 낡아서 그럴 수 없고, 손수 화장해서 보내줄까 했는데- 개인이 그렇게 하기는 또 어려운 문제더라고. 그렇게 이별을 미루고 미루다 보니, 어느새 누더기처럼 변해버렸어. 미안하더라.
며칠 고민 끝에 20L 일반 종량제 봉투를 샀어. 녀석은 불에 탈 수 있으니까, 흘러 흘러 커다란 소각장에 닿을 거야. 그렇게 보내주려고. 마지막으로 짙은 회색빛 소파에 올려두고 사진을 몇 번 찍었어. 너무 납작해서 볼품없어진 곰돌이를 몇 번 쓰다듬다 20L 봉투에 넣고, 다른 쓰레기까지 꾹 눌러 채워서 쓰레기 함에 넣었어.
내내 아무렇지 않더라. 왜 진작하지 못했냐 싶을 만큼. 싱겁도록 건조한 이별이었어. 그래서 그런지 이렇게 흔적을 남겨두고 싶었어. 곰돌이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엄마라면, 어쩌면 나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을 엄마에게 남겨 놓는다면… 잘 보내준 거라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근데 이상하게 분명 보내줄 때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이렇게 글을 쓰다보니 오히려 마음이 안좋네.
좀 더 보듬어줄 걸, 같이 나란히 서서 사진이라도 찍을 걸 그랬나?
아니야, 그러다 또 버리지 못하고 또 어두운 이불장에 넣어뒀겠지.
라고 혼자서 생각해 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 어쩌면 내가 미련 때문에 버리지도 못할까봐 누더기 같은 모습으로 계속 곁에 있었던 건 아닐까 하고 말이야.
이젠 인형 함부로 안 사려고.
나를 위한 인형은 충분했던 것 같아.
이별이 예쁠 수는 없나봐.
오늘은 그냥 이렇게, 조금 헛헛하게 끝내볼게.
덧.
언젠가 이걸 읽게 되거든 엄마가 기억하는 곰돌이 이야기를 들려주라. 누가 준 선물인지, 언제부터 곰돌이를 안고 잤는지, 혹시 내가 모르는 이야기가 더 있는지도 궁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