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금과 을목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
엄마, 날이 갑자기 무척 추워졌다. 그치?
나는 날이 추워도 뽈뽈거리며 잘 돌아다니고 있어. 아, 추운데 돌아다닌다고 걱정하려나? 내복 위에 얇은 옷을 겹겹이 입었고, 롱패딩까지 챙겨 입었으니 걱정하지 마.
그보다 25년 마지막 날 밤에 엄마가 전화했던 거 기억나?ㅎㅎ
9시쯤 전화가 왔길래 무슨 일이 있는 줄 알았어. 그때 나는 엄마 사위랑 모둠전에 달달한 막걸리를 한잔하고 있었거든. 받자마자 어디냐고 묻길래 나는 밖이라고 했지. 그랬더니 엄마가 다급하게 용건을 말하더라.
- 오늘 밤에 잘 때, 금색 옷을 입거나 금을 끼고 자면 좋대. 내년 네 띠에는 금이 좋다고 하더라.
어디선가 고급 정보를 들을 첩보원처럼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목소리에 웃음이 났어. 하지만 웃음을 꾹 참고, 진지하게 들었지. 금색 좀 두루고 자는 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전화해 준 게 좋아서 그러겠다고 했어. 곧 새해가 되니까 엄마 알고리즘에 그런 영상이 나왔나보다 했어.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엄마 띠는 연두색이 좋다는데, 집에 연두색 옷이 없다고 고민했잖아. 나도 잠시 고민하다가 상추나 깻잎을 주머니에 넣으면 되겠다고 농담처럼 말했어. 근데 그렇게 말하고 나니 완벽한 연두색이 떠오른 거야.
"엄마, 만 원짜리 있어? 그걸 품에 안고 자면 되겠다!"
역시- 자본주의에서 가슴 설레는 연두색 하면, 세종대왕님이 계신 만 원짜리 현금 아니겠어?ㅎㅎ 그러고 보니 진짜 만원을 품고 잤는지는 아직 후기를 못 들었네. 다음 전화할 때 물어봐야겠다.ㅋㅋ
그런 걸 미신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지, 사주나 손금을 보면 통계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여튼 뭐 그런 것들, 요즘따라 그런 걸 찾아보는 게 나도 재미있더라. 그래서 가끔 생년월일을 넣고 찾아보기도 해. 태어난 때에 따라서 한 사람의 성격이나 과거, 미래까지 알 수 있다니- 너무 신기하잖아. 얼마 전까지 MBTI라고 사람 성격을 네 글자로 표현해서 말하는 게 유행했거든. 근데 사주팔자에는 무려 여덟 글자가 있어. 거기에 다가오는 연월일에도 글자들이 있으니까, 훨씬 더 복잡하고 거대한 이야기가 숨겨져 있는 거지. 맞고 안 맞고를 떠나서 사람과의 관계나 운을 예측하는 그 이야기가 엄청 흥미진진 하다는 거야!
엄마랑 나에 관한 이야기도 발견했는데, 한번 들어볼래?
그럼, 먼저 말해둘 게 좀 있어. 나는 공부를 제대로 한 것도 아니고, 아주 극히 일부만 가져와서 설명하는 거야. 그러니 그냥 재미로만 들어!ㅋㅋ
우선 사주에는 오행이라는 게 있어. 사람마다 목(나무), 화(불), 토(흙), 금(쇠), 수(물)이라는 속성으로 크게 나눠서 구분해. 그중에서 엄마는 나무고, 나는 쇠로 태어났어. 원래 나무와 쇠는 상극이래. 쉽게 말하자면 쇠로 만들어진 도끼가 나무를 내리치면, 나무가 꺾이잖아? 그래서 안 좋다고 하는 거지.
근데 좀 재미난 반전이 있어. 엄마는 그냥 나무가 아니고 '을목'이고, 나는 '경금'이라는 거야. 을목은 나무 덩굴을 뜻해. 왜 커다란 나무나 건물을 휘감아 오르면서 자라는 덩굴 있잖아? 그렇게 구불구불 뻗어나가 꽃을 피우기도 하는 나무 덩굴인 거지. 경금은 아주 크고 단단한 쇳덩어리 또는 무언가를 가르는데 거침이 없는 잘 갈린 칼 같은 거래. 나는 처음에 그 말을 듣고, 나무와 도끼가 덩굴과 쇳덩어리가 된다고 뭐가 달라질까 싶었어. 근데 사주에는 몇 가지 합이라는 게 있고, 을목과 경금도 좋은 합이라고 해. 그 둘에 관한 재미난 비유가 있어. 마치 전장을 거칠게 누비고 다니던 무사가 가냘픈 꽃을 봤을 때, 휘둘러 베어버리는 게 아니라 지켜줘야겠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는 거지. 커다란 나무에 비하면 나무 덩굴은 작고 약해 보이니까, 그런 비유가 있나 보다 했어.
근데 진짜 그런가? 생각해 보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 같아.
확실히 멀리서 보면 엄마랑 나는 많이 다르지. 어렸을 땐 내가 더 강하다고 느낄 때도 많았어. 나는 남한테 싫은 소리를 하는 것도, 부탁을 거절하는 것도 어렵지 않거든. 근데 엄마는 속내를 드러내기보다는 남에게 잘 맞춰주는 것 같았어. 두루두루 관계는 좋은 것 같은데, 나는 자꾸 엄마가 손해 보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야. 그게 답답할 때도 있었고, 속상해했던 적도 좀 있었어. 그래서 딴에는 엄마를 지켜줘야지 하면서 지내기도 했는데, 그 마음이 엄마한테 닿았는지는 모르겠다.
여튼 그러다 나이를 좀 더 먹고, 직장을 갖게 되고, 또 혼자도 살아보고, 어찌저찌 결혼도 했지. 어느새 엄마가 나를 낳았던 나이를 훌쩍 넘기고 나니까, 자꾸자꾸 다르게 보이더라.
속내를 다 드러내고 지내는 게 결코 좋기만 한 게 아니구나, 수도 없이 이사를 다니면서 가는 곳마다 새로 직장을 잡았던 엄마는 어떻게 적응했던 걸까. 퇴근하면 진짜 아무것도 하기 싫은데, 네 식구가 사는 집이 어떻게 하면 그렇게 깨끗했을까. 나는 내 몸 하나 건사하며 지내기도 힘든데, 엄마는 어떻게 그 많은 식구를 보듬어 온 걸까.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란 사람과 한집에 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더라. 엄마는 어떻게 아빠랑 헤어지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온 걸까.
게다가 우리는 가족이 여섯 명일 때도 있었잖아?
그렇게 혼자서 질문을 마구 늘어놓다 보면, 언제나 같은 답변 앞에 서 있어. 저마다 개성이 강한 사람들이 '우리 집'에서 무사히 살아갈 수 있었던 건, 모두 엄마 덕분이야. 쇳덩어리는 감히 상상도 못 할, 어디에서든 뻗어나가 꽃을 피울 수 있는 나무 덩굴 같은 엄마가 있었기에 가능했어.
이제는 알아. 나무를 쓰러뜨리는 단단함보다 모두를 감쌀 수 있는 유연함이 더 강할 수 있다는 걸, 엄마가 나의 단단함을 지켜주고 있었다는 걸 말이야. 따뜻한 보금자리로 남아줘서 고마워.
그나저나 집으로 돌아와 보니, 우리 집에는 금색이 없더라. 예물로 샀던 반지는 화이트로 도금된 거고, 목걸이는 그때 유행하던 홍금이더라고. 고민하다가 그냥 홍금 목걸이를 했어. 홍금도 금이니까 괜찮지 않을까?ㅋㅋ 좋은 기운이 엄마처럼 부드럽고 유연해서 봐주면 좋겠다.
새해 복 많이 받고, 좋은 기운도 많이 많이 받고, 26년에 행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