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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을 Jun 20. 2023

가식

그는 나였다.

문득 떠오른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열등감에 시달리는 사람이다. 키가 큰 가족들 사이에서 작고 왜소한 체격을 가진 그는 언젠가는 그들처럼 자라날 거란 희망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거울을 보다 깨닫고 만다. 기대감에 맞췄던 헐렁한 교복 때문에 더 왜소해 보이는 자신의 모습을. 기다려도 원하는 모습은 오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가족들이 당연하게 가진 우월한 유전자를 자신은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그 후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어찌할  없는 외모 말고는 똑똑하고 무엇이든 잘하는 그들을 따라잡기 위해. 남들보다 몇 배의 시간을 들여 노력했다. 다행히도 타고나진 않았지만, 시간을 들인 만큼의 효과는 나왔다. 시험, 성적이란 것으로 자신을 증명해 왔던 그. 그렇게 서서히 열등감이라는 글자에서 멀어졌고, 어느새 그 단어를 떠올리지 않고 편안하게 지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 대학에서 거슬리는 동기 한 명을 만나게 된다. 커다란 키와 덩치를 가진 그 녀석은 멀리서 봐도 한눈에 띌 정도로 존재감이 컸다. 무서워야만 자연스러울 것 같은 그의 주변에는 어쩐 일인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는 특유의 서글서글한 눈매와 인상이 체격 차로 생길 수 있는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게 했다. 한눈에 봐도 우월하게 보이는 녀석은 그가 갖고 싶었던 체격, 사교성, 실력까지 몽땅 타고난 것처럼 보인다. 자신처럼 필사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원하는 바를 쉽게 손에 넣는 사람. 모른 척하려 했지만, 외면할 수 없는 상황이 자꾸만 생겨나고, 애써 숨겨뒀던 무언가를 자꾸만 건드린다. 발버둥 쳐도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패배감. 벗어나려 그 녀석과 마주할수록 오히려 내가 드러난다. 부단히 쌓아온 것은 열등감을 동력으로 부단히 노력해서 만들어진 것일 뿐이었다. 날 때부터 가진 자연스러움과는 다른 내 모습에 한 단어가 스친다.


가짜, 진짜인 것처럼 꾸민 것에 불과했다.


간단히 써보려던 이야기가 어느새 깊어졌다. '진짜인 것처럼 꾸민 것에 불과한 일'에 대해 떠올리면 학창 시절이 떠오른다. 그때 유독 '가식'이라는 말에 꽂혀있었다. 마음속에 스치는 수만 가지 생각 중에 진짜 내 생각이 뭔지 구별하기 쉽지 않았다. 감정은 늘 예측할 수 없는 날씨처럼 변했고, 눈앞에 사람을 대하는 모습도 천차만별이라 부를 정도로 달랐다. 일관성 없는 내 모습에 가식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여기저기 유리한 모습으로 살고 있었다. 그것을 말이나 행동 따위를 거짓으로 꾸미는 것과 구별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은 나를 가식적인 사람으로 만들었다. 가짜, 나는 진짜인 것처럼 꾸민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괴로웠다. 


어렸기에 할 수 있었던 고민이었다. 성격과 가치관이 단단하지 않아서 쉽게 영향을 받았다. 그러다 보니 폭풍같이 쏟아지는 정보에 휘둘려 나를 찾는 게 어려웠다. 나이를 먹고 좁은 학교에서 나와 경험을 쌓으며 세상을 알아갔다. 그만큼 나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덕분에 지금은 한 사람에게도 많은 성격이 존재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심지어 수십 년 모르던 성격을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되면서 깨닫게 되는 경우도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동시에 여러 모습을 갖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란 걸 다. 너무 단단해져 버린 지금의 나는 오히려 다양한 생각과 성격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가식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가식적인 모습이 필요한 공간이 있다. 사회생활이라든지, 언쟁이 불필요한 관계에는 가식이 필요하다. 싫어도 그렇지 않은 척, 미워도 좋은 척 웃어넘겨야 하는 상황을 부드럽게 넘기는 무기가 되곤 한다. 잘 이용한다면 타인과 나의 거리를 지키는 방법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어쩌다 그 단어에 묶여 스스로를 괴롭히게 되었을까?


그 물음에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다. 고등학교 국어 수업 시간, 키가 작고 안경을 낀 여자 선생님은 주로 학생들에게 지문을 입으로 소리 내 읽게 시켰다. 한 명씩 돌아가며 읽기도 하였고, 교실 전체가 한목소리처럼 읽기도 했다. 그날은 시를 배우고 있었다. 어떤 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시를 배웠고, 입으로 소리 내 읽었다. 모두가 한 소절씩 읽고 나면 선생님은 시에 쓰인 단어가 뜻하는 바에 대해 풀이했다. 나는 교과서에 동그라미를 치고 그 아래 불러주는 대로 받아 적었다. 한참을 말로 설명하던 선생님이 중요한 부분인 듯 칠판으로 다가가 커다랗게 썼다. 그리고 그곳에 '가식'이란 단어가 있었다. 칠판 위에 적힌 가식은 부정적인 의미 그 자체였다. 어떤 변명도 설명도 통할 것 같지 않은 답, 가식=나쁜 것. 커다란 글씨가 나를 꾸짖는 것 같아 괜히 혼자 먹먹해졌다.


문득 떠오른 에피소드는 사실 마음에 남았던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불쑥 그런 인물을 쓰고 싶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모를 일투성이지만, 괴로워하는 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있다. 그렇게 자신을 괴롭히지 않아도 된다고, 만들어 낸 모습도 자신의 일부라고, 조금만 다른 시선으로 본다면 좋고 나쁜 것을 떠나 다른 가치를 찾게 될 거라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다. 어떤 가면을 쓸지 고르는 나도 진짜지만, 가면을 쓰고 말하는 나도 진짜라고.


결국 그는 나였고, 과거의 나를 위해… 쓰고 있는 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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