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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을 Jul 13. 2023

분홍색 수국

소년의 꿈

사방이 초록빛으로 물들어 있는 숲.

커다란 나무들이 어깨동무하고 서 있다. 빛 한줄기 제대로 들어올 것 같지 않은 그 아래, 키는 작지만 넓고 길쭉한 잎을 가진 잡초가 하늘을 향해 있다. 나무의 빼곡함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발 디디기 힘들 정도로 잔뜩 돋아나 있다.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한 숲에 낯선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리드미컬하게 들려오는 소리의 정체는 소년. 잡초보다도 작은 키의 소년이 울창한 숲 가운데 홀로 있다. 그는 자기 몸보다 커다란 잎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지켜보는 누군가가 있었다면, 분명 버겁고 힘든 일이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소년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그는 누구보다도 숲을 좋아했고, 숲속에 있는 것을 사랑했다.


누군가에겐 똑같은 모양의 풀과 나무만이 존재하는 숲.


하지만 소년에겐 달랐다. 바나나잎처럼 무성하게 피어난 잡초의 잎은 다채롭기 그지없었다. 파릇파릇한 연녹색부터 검푸른색까지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했다. 크기도 모양도 같은 것이 하나 없었다. 소년은 알고 있었다. 그들이 만들어 내는 화려함은 끝을 알 수 없이 높은 나무 아래에서 생존하기 위해 발버둥 친 결과물이라는 것을, 저마다의 자리에서 빛을 향해 뻗어낸 필사의 몸부림이라는 것을.


뿐만이 아니었다.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해의 위치, 하늘의 색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을 띠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다가왔다. 맨발에는 날씨에 따라 전혀 다른 감촉이 느껴졌다. 때로는 서늘하게 때로는 따스하게 폭신한 흙이 발바닥을 안아주었다. 특히 지금처럼 비가 오는 날이면 그 신비는 더욱 짙어졌다. 저마다 다른 높이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음악과 같이 들렸다. 커다란 잎사귀 밑에서 바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을 때면 커다란 북소리처럼 심장을 마구 두드려 댔다.


소년은 언제나 이 아름다운 풍경에 넋을 잃고 숲을 헤멜 수밖에 없었다. 목적 없이 걷고 있는 그에게 방향은 중요치 않았다. 그저 걸음마다 숲을 맛볼 뿐이었다.


퐁당퐁당. 젖은 흙을 밟자 또 다른 소리가 생겼다. 소년이 남긴 발자국에 빗물이 고였고, 비어있던 음색을 채운다. 새로운 음악에 맞춰 숲을 뛰어다니던 소년의 눈앞에 커다란 나무에 만들어진 구멍 하나가 나타났다. 바닥에 쪼그려 앉아 소년은 안을 바라봤다. 그곳에서는 시원한 바람을 타고 달큰한 냄새가 날아왔다. 킁킁거리며 몇 번 냄새를 맡던 소년은 엎드려 몸을 밀어 넣었다. 구멍은 나무에서 시작됐다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마치 동굴처럼 길게 이어졌다.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지만 따뜻했다. 비에 젖은 몸을 감싸 안아주는 것만 같았다. 앞으로 나갈수록 달큰한 향은 짙어졌다. 그 냄새를 가까이할수록 소년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가 찾는 냄새가 바로 이 냄새였다는 것을. 자신은 이 냄새를 찾기 위해 이 숲에 왔다는 것을!


그런 확신이 들자, 소년의 몸짓이 더 빨라졌다. 빨리, 조금 더 빨리 그 냄새의 정체를 알고 싶었다. 아니 그저 자세히 맡고 싶었다. 동굴은 점점 더 어두워졌고, 마치 불에 델 듯이 뜨겁기도 했다. 소년은 멈추지 않았다. 엎드린 자세가 힘들었지만 견딜 수 있었다.


마침내 그곳에 닿았다. 동굴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높고 넓은 공간에 섰다. 소년이 찾던 달큰한 향이 가득했다. 눈을 감고 천천히 공기를 마셨다. 그리고 다시 내뱉었다. 가슴 가득 냄새가 들어와 온몸에 퍼져나갔다. 황홀함에 취한 소년의 앞에 작은 빛이 하나 반짝이고 있었다. 천천히 빛을 향해 다가갔다. 자신을 이끈 냄새는 분명 저 빛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쪼그려 앉아 가만히 들여다본 곳에는 가련할 정도로 아름다운 분홍색 수국이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우우웅- 우우웅-


가슴 부근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화들짝 놀랐다. 진동은 쉴 새 없이 울렸고, 고요한 공간을 순식간에 뒤덮었다. 허둥지둥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그리고 비몽사몽인 기운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영감! 언제 올 거예요? 저녁 먹으려면 지금은 출발해야 하잖아요."


"안- 크흠! 안 그래도 나서려고 했어."


"흐음…. 꼭 이예요. 곧장 집으로 와요."


"알겠어. 그만 끊어."


통화를 끝낸 노인이 잠겨 있는 목을 몇 번 가다듬었다. 눈치 빠른 할멈이 모를 리 없었다. 노인이 선잠을 자다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는 사실을. 평소라면 잔소리했을 텐데 웬일인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시간을 보아하니 저녁 시간까지 아직 여유가 있었다.


'성질도 급하기는….'


노인은 앉아있던 곳으로 향했다. 그곳은 자주 들르는 도서관에서 노인이 제일 좋아하는 자리였다. 무더운 여름에도 적절히 에어컨 바람이 들고, 일인용 소파가 한적하게 떨어져 있었다. 푹신한 소파에 앉으면 혼자만의 공간이 생긴 것만 같아 좋았다. 물론 이렇게 낮잠에 들 정도로 편안하다는 게 단점이긴 했지만. 소파 앞 테이블에는 시집 몇 권과 자그마한 노트가 있다. 노트에는 노인이 남겨둔 흔적으로 가득했다. 이렇게 도서관에서 와서 홀로 시를 쓰는 것이 어느새 일상이 되어버렸다. 잠들기 전에 적어둔 시구를 다시 읽어 보았다. 왠지 간질간질한 기분에 수염 부근을 긁었다. 그러다 문득 장면 하나가 떠올랐다. 어두운 동굴에 자그마한 빛 그리고 분홍색…


우웅


가슴 부근에 짧은 진동이 느껴졌다.


-오는 길에 콩나물 사 와요.


할멈이 보낸 문자였다. 재촉하는 듯한 문자에 간질간질한 기분과 장면은 사라져 버렸다. 노인은 손에 든 노트를 가방 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빼둔 몇 권의 시집을 제자리에 맞춰 넣으며, 마음에 들었던 시를 다시 한번 읽었다. 쓰다듬듯 훑어 내리는 그의 눈빛에- 숲속에 있던 키 작은 소년이 겹쳐진다.






도서관에서 편안한 소파에 졸고 있는 할아버지를 봤다. 한 분이 아니라 두 분이 나란히 주무시고 있던 모습이 왠지 귀엽게 느껴졌다. 어떤 꿈을 꾸고 계실까? 라는 생각에 문득 이런저런 장면이 떠올랐다.


분홍색 수국의 꽃말은 소녀의 꿈이다. 뭐- 소년의 꿈과 같은 말이 아닐까?


쓰면서 내내 들었던 음악을 덧붙여본다.


제목 : 遇晴 (만날 우, 갤 청)


https://youtu.be/T3DnKu8aFf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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