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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ightbrain Lab Jul 05. 2021

20. 중국 대표 현대 작가 장샤오강

Design History 20

[디자인 히스토리 20] 중국 대표 현대 작가 장샤오강의 역사를 보담은 성숙한 예술



금주부터 기획적으로 아시아권의 예술과 디자인에 관련해 몇 주간 포스팅을 해 볼 생각입니다. 저희가 공부하고 있는 디자인사는 사실, 근대 디자인이라는 최초 발생원리 자체를 서구 산업화에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아시아는 문화계에서 변방 취급받기 쉬운 구조에 놓여 있습니다.

하지만 주류 디자인의 중심이 서구에 있다고 해서 아시아 디자인 및 예술의 질적 수준이 서구에 비해 한참이나 떨어지냐는 질문에는 쉽게 대답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통약 불가능한 질량을 가진 것들의 비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주류 서구 예술권에서는 아시아 및 제3세계 지역의 예술적 성과들을 비주류로 취급하며 일종의 취향적 잣대를 들이대고 있습니다.
특히 아시아의 예술에 관해서는 오리엔탈리즘으로 소비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오리엔탈리즘이란 원래 유럽의 문화와 예술에서 나타난 이국적인 취미의 하나입니다. 그렇기에 동양은 오래전부터 유럽인에게 이국적인 세계로서 체험담이나 로맨스 등의 무대로 이용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동양과 서양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여 동양에 대한 서양의 우월성이나 동양에 대한 서양의 지배를 정당화하는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서양이 보는 동양에 대한 고정되고 왜곡된 인식과 태도 등을 총체적으로 나타내는 말로 악용되는 경향이 많습니다.
아시아와 서구가 향유하는 문화가 서로 다르며 (맥도널드와 스타벅스가 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퍼져있다고는 하지만) 역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생기는 변곡점들에서 파생된 각기 다른 이데올로기(같은 자본주의라고 해도 서구와 아시아의 생성 과정이 다르기 때문에)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의 이야기를 조금 더 생산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모더니즘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수반되어야 합니다. 조금 깊이 들어가 보기 위해 문학계에서 사용하는 모더니즘의 정의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문학계에서 정의하는 모더니즘의 시대란 앞서 말씀드린 바가 있는 러시아 혁명(1917년)에서부터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는 시기(1991년)까지로 보고 있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모더니즘이란 용어는 깔끔하고 현대적인 양식적 차원의 모던이 아니라 시대를 구성하는 하나의 사고방식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주제인데 하나의 세계를 이루는 사고방식의 모더니즘과 양식적 차원의 모더니즘은 구별해 놓으면 좋은 사항입니다. 이는 다른 듯 비슷한 문제입니다.)
이러한 모더니즘이 존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서구 중심의 자본주의를 견제할 수 있는 러시아 사회주의 체제의 견제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견고함은 그 대척점에 놓여 있는 러시아로 대표되는 사회주의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까지 하나의 체제로 결집하지 못할 가능성이 컸습니다. 결국 세월이 지나 냉전이 끝나고 남은 하나의 자리는 서구 자본주의의 차지였고, 1991년 이후부터의 세계를 문학계에서는 ‘포스트 모던’으로 규정합니다.
(제가 문학계를 굳이 이유로 든 이유는 비교적 다른 분야에 비해 이념적 반영이 투명한 분야이기 때문입니다.)

문학계에서의 ‘포스트모던’의 규정은 곧 ‘정치성의 상실’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새누리당이 있고 민주당이 있는데 왜 정치성이 없다고 하지?라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의 정치성이라는 말은 자본주의를 견제할 세력을 상실했다는 말과 같습니다. 즉 러시아를 비롯한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를 뜻합니다.
이른바 ‘신자유주의’ 시대라고 통칭하는 지금을 문학계에서는 ‘탈정치화된 사회’라고 규정짓습니다.
‘신자유주의’를 구성하는 세계의 공통된 현상에는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앞서 말한 모더니즘의 시대에 중요한 정치적 구실을 하던 문화와 예술이 ‘신자유주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정치와 이념에 대해 논할 때 급격히 수동적이고 보수적인 태도를 보이며 생존을 훨씬 중요한 과제로 삼습니다. (현재 대학가에서 시위 문화가 사라진 것도 중요한 증거가 됩니다.)


<가라타니 고진, 근대문학의 종언>


더 이상 시와 문학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회가 됐으며 급기야 이웃 나라인 일본의 석학 ‘가라타니 고진’은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유명한 책을 편찬하기에 이릅니다.
여기서 쓰인 ‘문학의 종언’이라는 말은 소설이나 시와 같은 특정 장르에 국한되지는 않습니다. 문화 예술 전반 즉, 더는 정치와 예술의 긴장관계라는 것이 지금 이 세상을 이루는 주요한 에피스테메(특정한 시대를 지배하는 인식의 무의식적 체계, 혹은 특정한 방식으로 사물들에 질서를 부여하는 무의식적인 기초)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리얼리즘 문학가들을 예로 들어 봅시다.
예를 들어 70~80년대 문학 ‘바리데기’를 쓴 황석영 작가와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쓴 조세희 작가는 그 당시 지금의 100분 토론 같은 프로그램에 나와 종종 발언을 하곤 했고 신문 사설에는 정치에 관한 논평도 실었습니다.
사실 두 분의 소설은 정치적 텍스트로 읽힐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주인공이 광주 민주화 운동의 한 복판에 있었던 경험이 있었다든지 하는 설정)
이러한 사실적인 설정을 이용해 문학적 구성을 펼치는 장르를 ‘리얼리즘’이라고 합니다. 미술이나 디자인에서 펼쳐지는 리얼리즘도 이와 거의 같은 맥락이며 리얼리즘으로 칭해지는 예술적 행위들은 대부분 정치적인 메타포를 담지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시대의 작가와 예술가가 그 자리를 메꾸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현시대 최고의 문학가로 불리는 ‘김연수’나 ‘김영하’를 100분 토론에서 볼 일은 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그 공석은 누가 차지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각종 분야의 전문가들이 패널로 앉아 있습니다. 더 이상 이 시대의 이념과 사상에 대해 예술가나 인문학자가 아닌 각 분야의 전문가들, 예로 들면 ‘애널리스트’나 ‘경제 전문가’들의 입에서 나온 담론들이 훨씬 더 생산적이라는 판단이 선 것입니다.
이들은 삶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지금 인문학의 죽음이라든지 철학의 위기라는 말들이 더 자주 주위에서 들리는 것 같습니다. 예술가나 인문학자가 이념의 변방으로 밀려나면 날수록 사회적으로 사유하는 시간은 더욱 줄어드는 결과를 낳습니다.



이러한 복잡한 정세 속에서도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인 중국의 집권정당은 공산당입니다. 모두 알다시피 지금 중국이 사용하고 있는 자본주의는 기간이 정해진 채택된 역사에 불과합니다. 언제 중국이 자본주의를 모두 걷어낼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중국을 대표하는 현대 작가인 장샤오강을 비롯한 수많은 중국 작가들이 공유하고 있는 커다란 에피스테메는 바로 마오쩌둥이라는 커다란 사회주의적 표상에 대한 예술적 태도입니다. 그럼 장샤오강의 그림을 보기 전에 마오쩌둥이라는 인물과 그가 일으킨 <문화 대혁명>이라는 현대 중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오쩌둥(모택동), 1893- 1976>


마오쩌둥은 중국의 정치가입니다. 마오쩌둥은 모택동으로 불리며 중국 공산당의 요직에서 활동하다가 중앙 제7차 전국 대표대회에서 연합 정부론을 발표하였으며, 장제스와의 내전에 승리하고 베이징에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세웠습니다.
국가주석 및 혁명 군사위원회 주석(1949~1959)으로서 제2차 5개년 계획의 개시와 더불어 3면 홍기 운동을 폈고 ‘문화 대혁명’을 일으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였습니다.




‘문화 대혁명’은 표면적으로는 마오쩌둥에 의해 주도된 사회주의에서 계급투쟁을 강조하는 대중운동이었지만, 그 힘을 빌어 중국 공산당 내부의 반대파들을 숙청하기 위한 권력투쟁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농업국가인 중국에서 과도한 중공업 정책을 펼쳐 국민경제가 몰락하는 실패를 가져왔습니다. 에 중국 공산당은 민생경제를 회복하기 위해 자본주의 정책의 일부를 채용한 정책이 실효를 거두면서 정치가 ‘류사오치’와 ‘등소평’이 새로운 권력의 실세로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1976년 상하이, (윗줄) 피와 목숨으로 당 중앙을 보위하자! (아랫줄) 피와 목숨으로 마오 주석을 보위하자!>


권력의 위기를 느낀 마오쩌둥은 부르주아(전통적 상류층이 아닌 상공업으로 졸부가 된 무리) 세력의 타파와 자본주의 타도를 외치면서 이를 위해 청소년이 나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전국 각지마다 청소년으로 구성된 홍위병이 조직되었고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전국을 휩쓸어 중국은 일시에 경직된 사회로 전락하게 됩니다. 마오쩌둥에 반대되는 세력은 모두 실각하거나 숙청되었고 마오쩌둥 사망 후 중국 공산당은 문화대혁명에 대해 ‘극좌파적인 오류’였다는 공식적 평가와 함께 문화대혁명의 광기는 급속히 소멸하였습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장샤오강을 비롯한 중국을 대표하는 작가들은 문화대혁명의 영향 아래서 혼란스러운 유년기를 보낸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쉽게 말해 사회주의 체제에서 평범한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눈앞에서 모든 것이 급작스럽게 바뀌어 나가는 것들을 넋 놓고 봐야만 했던 것입니다.
문화대혁명의 커다란 슬로건이었던 네 가지 낡은 것의 파괴에는 낡은 사상, 문화, 풍속, 습관 등이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수많은 문화재가 손실되었고 개인과 집단의 끝없는 괴리에서 벌어지던 분열된 자아와 파괴된 집단의식은 분명, 중국 근현대사에서 씻을 수 없는 아픔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이는 지금의 중국을 이루는 커다란 사고방식의 어느 한 부분에 일정 부분 기여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저는 장샤오강의 그림을 볼 때마다 작품을 예술가 본인의 내면적 아픔으로 단순화시키지 않고 서두에 말했던 중국 근현대사의 아픔 즉, 집단에 대한 애도의 정신으로 환원시켜보려는 장샤오강의 성숙한 예술적 태도에서 가끔 숭고함을 느낍니다.
그 성숙함의 증거는 의외로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장샤오강의 그림에서 발견되는 두 가지 콘텍스트에서 입니다. 그것은 눈물을 가득 머금은 눈동자와 핏줄처럼 가는 여러 개의 선으로 이루어진 상흔 같은 것입니다.
작품을 보기 이전에 장샤오강에 대해 간략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장샤오강, 1958~>


장샤오강은 1958년 생(저희 어머니랑 동갑이시네요. 58년 개띠)으로 후난성 출신이고, 1980년대 중국 아방가르드 작가 중 한 명으로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이때의 중국 아방가르드로 대표되는 작가들은 위에 민준, 팡리준, 쩡판즈 등이 있습니다.
장샤오강을 포함한 이 네 명이 지금 중국 현대미술계를 이끌어 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이 네 명의 공통점은 역시나 앞서 말한 문화대혁명에 의해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피카소와 살바도르 달리, 파울 클레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알려진 장 샤오강은 우연히 자기 어머니의 젊었을 때 사진을 발견하면서 위의 ‘혈통’ 시리즈를 그리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림 속에서 마치 마스크를 쓴 듯이 고요하고 정지된 인물들의 얼굴 속에서 느껴지는 묘한 감정과 역사적 흔적은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개인과 독립된 개체로서 개인 사이의 갈등과 거리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가족과 친족이라는 유가적 사회와 급격한 산업화의 물결(문화 대혁명) 사이에서 사는 현대 중국인들의 집단적 표상이 각각의 가짜 증명사진 같은 그림 속에서 더없이 강렬하게 드러납니다.



무엇보다도 그림 전반을 관통하는 얼룩이랄까 상흔 같은 흔적이 눈물을 가득 머금은 각 인물의 눈과 함께 강하게 들어옵니다. 몇 번이고 자세히 보고 있노라면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안경에 묻어 있는 얼룩처럼, 엉덩이에 난 종기처럼, 손가락 끝에 찔린 가시처럼 별 게 아닌듯한데 답답하고 사소한 게 은근히 아파서 제대로 자리에 앉아 있기가 힘든 그런 것처럼 얼룩이 따라다닙니다.



사진에 묻은 얼룩은 오히려 화가 자신의 내면으로 내려앉고, 각 사진 속 인물들의 초롱초롱한 눈은 그 내면에 내려앉은 얼룩을 응시합니다. 그래서 그 얼룩은 눈망울처럼 선명하게 잊어버리고 털어져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닌 근원적인 아픔인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겪었을 대가족 사회 속에 각 가족 구성원들의 말 못 할 곡절 같은, 가족이니깐 더욱 상처 받고 가족이지만 더욱더 격렬한 상호 간의 인정을 둘러싼 투쟁에 대한 생채기처럼 보입니다.
혈통을 공유하는 천륜이 맺어준, 그러나 사실 거대한 가족이라는 제도 안에서 살아가고 살아남은, 아련하지만 그 내밀한 고통의 흔적을 장샤오강은 매끈하게 그려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답답함이 잔잔하면서 점점 명쾌한 고통스러움으로 다가옵니다.
끝으로 장샤오강의 작품들을 보면서 아시아 기획의 첫 번째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 라이트브레인 가치디자인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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