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ign History 22
금주는 아시아 기획 편 세 번째로 아시아를 대표하는 패션 디자이너 ‘요지 야마모토’에 대해 포스팅하겠습니다. 디자인사 읽기의 아시아 기획 편들은 대개 서구 주류 디자인과 예술적 담론 사이에서 아시아 예술가들이 어떻게 정체성을 지키며 그 좁은 틈으로 비집고 들어가는가에 관한 방법론입니다.
오늘 소개할 요지 야마모토(Yohji Yamamoto)는 1943년 도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2차 대전 중에 징집되어 전쟁터에서 사망하였기 때문에, 편모슬하에서 성장하였습니다.
야마모토는 어머니의 바람에 따라 일본 명문 사립대학인 게이오기주쿠 대학에서 법학사를 취득하였으나, 의상실을 운영하던 어머니의 영향 때문인지 패션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로부터 디자이너로서 정식 트레이닝을 받을 것을 권유받은 야마모토는 다시 일본 문화복장학원에 진학하였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의상실 일을 도우며 1969년 문화복장학원을 졸업하였고, 동시에 일본 신진 디자이너 등용 콘테스트상인 ‘소엔상’을 수상하여 주목받기 시작하였습니다.
1972년 자신의 의류회사인 <Y’s>를 설립하였고, 1977년에 도쿄에서 첫 패션쇼를 열었으며, 1981년 ‘꼼데 가르송’으로 유명한 레이 가와쿠보와 공동으로 파리에서 첫 컬렉션을 선보이면서 Yohji Yamamoto 여성 기성복 라인을 론칭하였습니다.
야마모토와 가와쿠보의 1981년 첫 파리 컬렉션은 패션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당시 여성의 몸매를 한껏 드러내던 서구의 유행 스타일과는 대조적으로 검은색 일색의 헐렁하고 거대한 의상들을 가리켜 혹자는 ‘홀로코스트 시크(Holocaust chic)’ 또는 ‘포스트 히로시마 스타일(post-Hiroshima Style)’ 등과 같이 전쟁 후의 부정적 인식들을 패션으로 표현했다고 지적한 반면,
혹자는 이들 일본 디자이너들이 제시한 새로운 스타일의 지적이고 탈중심주의(하위문화)적 특성에 찬사를 보냈습니다.
이들의 디자인은 밑단이나 봉합 선의 처리가 제대로 되지 않거나 찢긴 듯한 미완성인 모습이었고, 깃과 포켓은 일반적인 크기나 위치에서 벗어나 있었으며, 의상의 구조는 해체되어 불규칙하고 비대칭적으로 재구성된 모습이었습니다.
완벽함을 거부하고 잡동사니를 모아놓은 듯한 이러한 스타일은 “빈곤한 룩(poverty look)”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1980년대 당시의 경제적 불황을 상징적으로 구현하였다고도 해석됩니다.
특히, 런웨이 위의 모델들은 시체와 같은 창백한 얼굴에 빗질하지 않은 머리와 퍼렇게 멍든듯한 입술로 충격을 더했습니다.
실제로 야마모토는 독일의 유명한 사진작가 아우구스트 잔더(August Sander)가 렌즈 안에 담은 빈곤층의 모습에서 디자인의 영감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아래는 아우구스트 잔더의 몇몇 작품들입니다.
야마모토와 가와쿠보는 몇 해 앞서 파리에 진출해 있던 이세이 미야케(Issey Miyake)와 함께 일본을 대표하는 아방가르드 패션 디자이너 3인방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인체 곡선의 실루엣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일상적인 코트의 비대칭적 변형을 보여주는 중성적 모습과 검은색을 사랑한 마니아들은 야마모토의 의류를 입은 사람들을 일컬어 ‘까마귀족(crows)’이라 불렀습니다.
야마모토의 컬렉션에서는 대부분 검은색이 주를 이룹니다. 그는 검은색을 겸손하면서도 거만하고, 게으르면서 편안하며 동시에 신비롭다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는 불필요한 의미나 감정을 담고 있지 않은 검은색의 단순함을 사랑하는데, 이는 불필요한 장식이나 액세서리를 거부하는 그의 디자인 성향과도 맥을 같이 합니다.
또한, 야마모토는 착용자의 나이나 유행에 구애받지 않는 디자인을 지향하는데, 검은색은 이러한 디자인에 최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야마모토가 제안한 검은색의 해체적 디자인들은 암울한 사회현실에 대한 좌절과 반항을 찢어짐과 폭력으로 표현했던 펑크스타일과도 기존 질서에 반기를 들었다는 측면에서 유사성을 지닙니다.
야마모토의 디자인은 또한 중성적입니다.
그의 작품들은 대개 헐렁한 실루엣으로 인해 여성의 인체 곡선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스타일은 그의 성장 배경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운영하던 의상실은 도쿄 신주쿠에 위치한 환락가인 가부키초에 있었기 때문에, 그는 어린 시절부터 남성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꾸민 여성들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여성들은 어린 야마모토에게 유년기의 트라우마로 자리 잡고, 남자의 시각적 유희로 여겨질 만한 여성의 모습을 연출하는 의상은 디자인하지 않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여성의 성적 특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거부합니다.
따라서 그는 남성과 여성이 동시에 착용하기에 손색이 없어 보이는 의상들을 발표해 왔습니다.
페미니스트 이론에서 여성과 남성을 나누는 사회적 기준은 생식기가 아닌 사회적인 역할(Gender)로서 구분 짓습니다.
즉, 생물학적 여성이라고 해도 남성우월주의 세계에 몸담은 남성인체 하는 명예 여성은 사회적으로는 남성으로 구별됩니다.
그러한 구별에 있어서 야마모토는 의복으로 적극적인 페미니즘 운동을 전개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야마모토는 1984년 파리에서 첫 남성복 컬렉션을 선보였습니다.
그는 이후 순차적인 컬렉션을 통해 새로운 남성복 스타일의 대중화를 가져왔습니다.
야마모토는 기존의 남성 재킷의 어깨를 좁고 둥글게 변형시켰고, 패드와 안감을 제거해 가볍게 제작하였습니다.
소매는 길고 라펠은 좁게 디자인하였으며, 바지 역시 좁고 짧아지기도 했다가 다시 주름을 잡아 헐렁하게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좌우 불균형한 깃과 일상적인 위치에서 벗어난 주머니들이 부착된 의상들은 몸에 잘 맞지 않는 중고의류와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또한 2002년에는 남성 정장용 긴 스커트를 선보이기도 하였습니다.
야마모토는 자신의 분노가 창의적 디자인의 원동력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디자이너가 창의적이기 위해서는 기존의 상황에 반발하고 바꾸고자 하는 분노가 커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삶과 디자인 세계에 대해 집필한 자서전의 부제를 ‘나의 소중한 폭탄(My dear bomb)’으로 붙여 창의성의 활력을 자신 안에 내재한 폭탄으로 비유한 바 있습니다.
그의 분노는 다양한 디자인 영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야마모토는 과거의 전통 복식에서 영감을 얻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첫 파리 컬렉션에 일본적 요소가 표현되었다는 평을 매우 싫어하였는데, 이는 그가 파리에서 컬렉션을 연 목적이 일본을 해외에 알리기 위해서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단지 자신의 디자인 세계를 파리 패션 시스템에 소개해 가치를 평가받고 싶었던 것입니다.
야마모토의 이러한 태도에서 서구의 외곽에 자리잡은 아시아 디자이너가 서구에서 소비되는 아시아의 오리엔탈리즘을 활용하지 않고 서구 디자인계의 중심부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강한 욕망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1995 봄/여름 컬렉션에서는 기존의 담론을 폐기하고 기모노의 형태와 일본의 전통 홀치기 염색법인 시보리(shivori)를 활용한 적극적인 일본식 디자인을 선보였습니다.
그의 디자인 세계를 들어가 보지 않아서 알 수는 없지만 야마모토의 후기 행보에서는 초기의 강한 탈아시아주의들이 사라져 버려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야마모토는 다양한 콜라보레이션 작업도 진행했는데, 대표적인 예가 아디다스와의 공동작업을 통한 스포츠 캐주얼웨어 디자인입니다.
그는 아디다스 Y-3 브랜드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면서 2000년대 초 컬렉션에서 아디다스의 스트라이프를 활용한 해체적 디자인들을 처음 선보였습니다.
지금 까지도 야마모토는 끝없이 도전 중이며 내년에는 또 다른 컬렉션을 준비한다고 합니다. 까마귀족을 데리고 말이죠.
시각 디자인 분야에 비해 복식을 다루는 패션 디자인 분야는 아시아 디자이너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기가 조금은 수월해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렇게 생각한 이유인즉슨, 재료라는 측면 때문입니다.
옷감이라는 것은 대체로 그 지역에서 나는 가장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로 구성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여기서 그 지역의 문화적 습속 즉, 하비투스(habitus)가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이 하비투스 안에는 계층 간의 소득 격차나 문화적인 위계 등이 복잡 미묘하게 포함되어 있는데 패션에서는 이런 것들이 즉각적으로 반영됩니다.
가령 강남 스타일이니 강북 스타일이니 하는 패션의 위계를 자본주의적으로 구분 짓는 것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패션을 전공한 제 친구는 인도에 가서 패션을 포기했다고 합니다.
인도를 여행 가기 전, 친구에게 패션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은 다름 아닌 장식이었습니다.
하지만 갠지스 강에서 인도 사람들이 물에 젖은 천 하나로 몸을 감는 모습을 보고 그 소박한 아름다움에 숭고함을 느꼈다고 합니다.
저 역시 친구의 일화를 듣고 감동했는데, 장식을 넘어서는 문화적인 측면에서의 복식은 언제나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먼지 쌓인 어머니의 처녀시절 옷가지들이나 자신이 갓난아기 때 입었던 옷들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야마모토가 초기에 주창했던 포스트모던적 해체주의들이 후기에 들어서면서 점차 일본식으로 변화되며 색감들이 따뜻해지는 경향들은 야마모토가 휴머니스트로 점차 변해 간다는 징조로 봐도 될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초기의 격렬한 야마모토가 좋지만 온화한 인상의 산신령 아저씨도 나쁘진 않은 것 같습니다.
– 가치디자인그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