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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ightbrain Lab Aug 02. 2021

24.민예론의창시자 야나기 무네요시

Design History 24

[디자인 히스토리 24] ‘민중적 공예’ 민예론의 창시자, 야나기 무네요시 이야기


예술의 아름다움은 언제나 국경을 넘는다.
그곳은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장소이자 사랑의 공회당이다.
- 야나기 무네요시


금주 아시아 기획 다섯 번째 이야기로 ‘민중적 공예’ 민예론의 창시자 야나기 무네요시의 이야기를 통해 예술을 일상의 차원으로 안착시키려 한 의도를 이해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예술이라는 단어를 머리에 떠올려 봅시다. 저는 고귀함, 숭고함, 아름다움 등의 단어들이 떠오르는군요.



이처럼 예술이라는 단어에는 한 가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아우라가 깃들어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일상에서 논리나 이성을 뛰어넘어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동을 주는 상황에서 ‘예술이다’라는 말을 종종 쓰기도 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쓰는 예술이라는 말이 함의하고 있는 것에는 보편성이라는 것이 조금은 결여되어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논점을 약간 바꿔서 문화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소위 대중문화(Main Culture)와 하위문화(Sub Culture)의 구별에는 서양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이 뿌리 깊게 박혀있습니다.
이분법이라고 하면 뚜렷한 선/악의 구별인데 선이라 함은 질서가 지어져 흐름이 원활한 상태를 뜻하며 이는 곧 어른의 상태를 뜻합니다.
악이라 함은 혼돈의 세계 즉, 모든 것이 무질서한 카오스의 세계를 뜻하며 아이의 상태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서브컬처란 대중문화의 반대 축이며 성숙한 어른이 되기를 포기한 불량한 아이들을 위한 문화라는 논리가 성립됩니다.
야나기 무네요시가 살았던 20세기 초에는 귀족들을 위한 문화들만이 예술로써 인정을 받았고 민간인들이 만들어 놓은 삶과 밀접한 일상의 소품들은 예술적 판단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었습니다.



20세기 초 일본의 지식인 야나기 무네요시는 일상을 예술의 차원에서 바라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유명한 예술가의 작품보다 한 이름 없는 개인이 만든 소박하지만 멋이 깃들어 있는 공예에 더 큰 가치를 두었습니다.
그는 그러한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일상적인 예술성이 느껴지는 공예제품들을 수집하였습니다.
그에게 수집은 단순히 물건을 모으는 행위가 아닌 예술적 행위인 셈이었습니다.



보통 한 예술가의 그림을 볼 때 생산미학적(작품에 대한 해석의 초점이 그림을 보는 ‘나’가 아닌 그림을 그린 화가와 시대적 배경에 맞춰진
상태) 관점에서 본다면 하나의 작품도 중요하지만 현재 보고 있는 작품의 전 작품과 전전 작품 혹은 그 후 작품 사이의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예술적 맥락을 읽어내는 것이 상당히 중요해집니다.
예를 들어 몬드리안의 경우 초창기의 나무 그림에서는 현실적인 나무를 거의 그대로 재현해 놓은데 반해 후기로 가면 갈수록 위의 그림 같은 추상적인 형태로 변해갑니다.
그러한 몬드리안 그림에서의 형태적 변화는 분명 그 시대를 살았던 여러 사회 문화적 요소와 그에 조응하는 예술가의 감정선이 버무려져 나온 결과물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생산미학적 관점에서 한 작가의 삶 전체를 조망하는 것은 그 작가의 작품 전체를 이해하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그러한 관점에서 자신이 물건을 수집하는 행위를 ‘창작적 수집’이라고 이름 짓습니다.
또한, 자신이 펼친 ‘민예론’을 바탕으로 민간 작품들을 모았으며 수집된 작품과 작품 사이에 얽힌 맥락들을 생각하며 그 사회문화를 읽어내려고 애썼습니다.
수집하는 행위 속에서 일상에서 만들어진 그 시대 문화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야나기 무네요시의 따스한 시선 또한 느낄 수 있습니다.



일본에는 미타테(見立て)라는 고유의 수사학이 있습니다.
미타테의 의미는 ‘다시 봄’입니다.
즉, 새롭게 봄을 뜻합니다.
사물을 처음 보듯 새롭게 보는 것이 미타테의 핵심 속성 가운데 하나입니다.
미타테는 습관, 관습 따위에 얽매이지 않고 지금 하는 일을 처음 하듯 하게 해주는 힘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다도의 정신’이 있을 듯합니다.
차를 끓이며 정성을 다해 한잔을 따라 내는 다도는 매번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처음이라는 마음가짐을 가지지 않고서는 좋은 차를 우려낼 수 없습니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민간 작품들의 소박한 외연 안에 잠재된 깊은 예술적 가능성을 찾아내기 위해 미타테의 관점으로 민중 예술들을 보지는 않았을까요?



야나기 무네요시가 살았던 시대는 조선이 일제의 침략을 받던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야나기 무네요시는 근대 한국미술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으며, 조선의 전통 미술과 공예품을 무척이나 사랑했습니다.
야나기 무네요시가 조선에 대해 쓴 글을 아래 인용해보겠습니다.

‘조선인들이여, 비록 내 나라의 지식인 전부가 그대들을 괴롭히는 일이 있더라도 그들 중에는 이 한 편의 글을 쓴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기 바란다……. 우리나라가 올바른 길을 걷고 있지 않다는 분명한 반성이 우리들 사이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기 바란다.
나는 이 짧은 한 편의 글로써 조금이라도 그대들에 대한 나의 정을 피력할 수 있다면 크나큰 기쁨이 되겠다.’

이 글은 야나기 무네요시가 조선에 대해 쓴 최초의 글이라고 합니다. 1919년에 썼으며 3.1 운동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언급하지 않고 회피하려 들 때, 결연히 쓴 글입니다.
요미우리신문에 게재되었고, 영역은 <The Japan Advertiser>에, 국역은 이듬해 동아일보에 실렸다고 합니다.
그의 글을 통해서 민족주의나 진영논리에 휘둘리지 않는 윤리적인 지식인의 자세를 볼 수 있습니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우리나라의 문화와 예술의 본질적 측면을 잘 이해했습니다.
그는 최대한 바닥부터 느끼고자 했습니다.
그는 예술을 통해 조선이라는 나라를 받아들였고 잘못된 일에 대해서는 서슴지 않고 반론을 내세웠습니다.
일본의 총칼 아래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이 숨을 죽이고 있을 때, 그가 일본인이었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조선총독부에서 광화문을 파괴하려고 할 때 모두가 할 말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습니다.
그때 야나기 무네요시는 정치가 예술에 대해서 무분별해서는 안 된다, 예술을 침해하지 말라는 글을 쓰면서 광화문 파괴를 앞장서서 막아냈습니다.

결국 광화문이 경복궁 동쪽으로 옮겨지는 시련은 겪었지만, 그의 이런 자세에서 예술을 대하는 숭고한 자세를 엿볼 수 있습니다.



‘특히 조선을 상기시키는 여러 관아를 좌우에 거느리고, 우뚝 솟은 북한산을 배경으로 멀리 대로를 향한 광화문을 우러러보는 광경이야말로 잊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자연과의 배치를 깊이 고려하여 계획된 그 건축에는 이중의 아름다움이 있다. 자연은 건축을 지키고, 건축은 자연을 장식하지 않는가. 우리는 이 사이에 있는 유기적 관계를 외람되게 깨뜨려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이제 천연과 인공의 멋진 조화가 몰이해한 자들 때문에 파괴되려 한다. 꿈에 지나지 않다면 다행이겠으나 그것이 무서운 현실임을 어쩌랴.’ (야나기 무네요시 저작 ‘아, 광화문이여!’ 중에서)

야나기 무네요시 혼자의 힘은 아니지만 이렇게 여론을 이끌면서 광화문이 파괴되는 것을 저지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에서만 야나기 무네요시의 시각이 돋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차분하게 바라보면서 조선의 예술품들을 음미하며 조선다운 미학이 무엇인가를 파악하고 이를 글로 옮겼습니다. 그는 중국과 일본, 조선, 극동 3국의 예술에 대한 차이를 설명합니다. 각 나라마다 추구하는 바가 달랐다고 저술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예술은 의지의 예술이며, 일본은 정취의 예술이었다. 그러나 이 사이에서 숙명적으로 비애를 짊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 조선의 예술인 것이다. 불안은 적막감을 낳고 적막감은 동경을 낳는다. 구원은 땅에 가득 찬 것이 아니고, 하늘이 갖고 있는 것이다. 슬퍼하는 자는 위로를 받는다. 예수는 말하지 않았던가. 비애란 신의 마음으로 지켜지는 것이다. 신은 위로하는 일을 잊지 않는다. 신의 마음은 슬퍼하는 자에게 이끌리는 것이다. 슬픔이 어찌하여 미를 낳는가. 또한 슬픔의 미가 어찌하여 그렇게도 사람을 매혹시키는가. 그것은 신이 생각하고 있는 슬픔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힘 있는 자는 자연에 산다. 그러나 슬퍼하는 자는 신에게 산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예술의 기조를 이루는 것에는 형태, 빛깔, 선이라는 세 가지가 있다고 봅니다.
극동 3국의 국민성이 다르고, 토양이 다르고, 기질이 다른 만큼 예술이 추구하는 바도 다릅니다.
중국은 형태, 일본은 빛깔, 조선은 선을 주조로 삼고 있다고 여깁니다.



‘직선이 아닌 곡선이 선의 마음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가늘고 긴 선은 곡선으로 대표된다. 선의 미는 실로 곡선의 미에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선의 내적인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형태와 정반대 되는 것처럼 보인다. 형태란 땅에 옆으로 드러누운 모습이다. 형태는 그 무게를 대지로 향하고 있다. 그러나 선은 어떠한 점에서 다른 방향으로 가려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땅에 옆으로 드러눕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떠나려고 하는 것이다. 돌아가는 마음이 아니라 떠나는 마음인 것이다. 동경하는 곳은 이 세상이 아니라 피안의 세계다. 형태에 강한 것이 있다면, 선에는 쓸쓸함이 있을 것이다. 가느다란 선이란 이미 그 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이 민족만큼 곡선을 사랑한 민족은 달리 없을 것이다. 마을에서, 자연에서, 건축에서, 조각에서, 음악에서, 기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는 선이 흐르고 있다.’
자신의 국가에 대한 깊은 반성 한가운데 독자적인 윤리와 미의식으로 어디에도 쏠리지 않고 균형 있는 길을 걸었던 야나기 무네요시를 보며 사라져 가는 공예적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으면 합니다.




– 가치디자인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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