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경의 국가유공자 수훈은 반드시 취소되어야!!
1948년 4.3 항쟁 당시 제주도민을 무참히 진압했던 박진경 대령에게 국가보훈부(장관 권오을)가 2025년 11월 4일 국가유공자 서훈을 수여하여 사회적 파장이 일었다.
노무현 정부 당시 발간된 <제주 4·3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박진경 대령은 1948년 5월, 국군 9연대장으로 부임한 43일 동안 약 6,000명의 도민을 체포했다. 이들 중에는 10대 소년에서부터 60살이 넘은 민간인 노인과 부녀자 다수 포함되었다고 한다.
또한 박진경 대령은 부대원들에게 도민의 체포를 독려하는 과정에서 “조선 민족 전체를 위해 30만 도민을 희생시켜도 된다”는 발언과 “양민을 막론하고 도피자는 3회 정지명령에 불응 시 총살하라”는 지시도 내린 것으로 증언자들은 말하고 있다. 박진경 대령이 스스로 자초한 무리수는 결국 불행한 파국으로 이어졌다. 1948년 6월 14일, 대령으로 진급한 당일 부하들에게 암살당한 것이다.
그런 문제적 인물이 지난 2025년 11월 4일, 이재명 정부하의 국가보훈부에서 국가유공자로 수훈을 받은 것이다.
이런 사실이 제주도민 사회에 알려지면서 급기야 제주도는 분노로 들끓게 된다.
국가보훈부 권오을 장관이 급히 오영훈 제주도지사를 찾아가 사과해야 했고 결국 이재명 대통령까지 나서 박진경 대령의 서훈 취소 방안을 검토하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여진은 여전히 남아 있다.
박진경 대령과 그를 암살한 이는 누구인지, 진실은 무엇인지 살펴보자.
아이히만과 박진경의 공통점
박진경 대령과 유사한 인물은 과거 ‘나치 시대’ 친위대 장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이 아닐까.
그는 6백 만명의 유대인을 학살했던 실무 총책임자로 악명을 떨쳤다. 박진경 대령이 제주도 9연대장으로 부임한 지 불과 43일 만에 도민 6천 여명을 체포 구금하고 그중 상당수를 학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 숫자만 다를 뿐, 둘 다 엄청난 학살 책임자인 것이다.
아이히만은 유대인을 학살한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집단 학살 행위에 대해 "공무 행위이며 국가를 위한 행위”라고 합리화해 버린 것으로 유명하다. 박진경 대령이 말했다는 “조선 민족 전체를 위해 30만 도민을 희생시켜도 된다”는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은 논리였다.
또한 직전까지 정유회사 외판원에 불과했던 아이히만이 나치 정권의 유대인 인종 청소 명령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여 권력욕을 이룬 것처럼, 박진경 역시 ‘전임이었던 김익렬 9연대장과 달리’ 제주도민을 잔혹하게 진압함으로서 그 성과로 불과 30세 나이에 육군 대령으로 빠르게 승진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박진경 대령이 이처럼 미군정청 시절에 잘 나갈 수 있었던 성공 비결에는 또 하나의 숨은 비결이 있었다.
그의 ‘친일 행적’ 덕분이었다.
박진경은 1918년 경남 남해에서 태어나 <일본 오사카 외국어학교>로 유학을 떠난다.
덕분에 영어에 능통할 수 있었다. 그 후 박진경은 일본군 소위로 임관하여 일제를 위해 복무하다가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일제와 함께 몰락해야 할 그는, 해방후 미군정 시대가 시작되면서 ‘영어를 할 줄 아는’ 조선인이 우대받는 시대에 다시 출세 길이 열리게 된다. 일본군 장교 출신 박진경이 미군정청 시대에 잘 나가게 된 이유였다.
암살범들의 최후 진술
그렇다면 ‘박진경 대령 암살 사건’의 실체적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오래전 사건이라 기록은 부족하지만, 암살범의 진심을 찾아볼 수 있는 단서는 확인할 수 있었다. 지난 2022년, 제주 4.3항쟁 74주기를 맞이하던 해에 <제주 작가회의>가 펴낸 ‘추념 시집’에 실린 글이었다.
해당 책자에는 1948년 6월 14일 박진경 대령을 암살한 혐의로 체포된 주범 문상길 중위를 비롯하여 직접 총을 쏜 손선호 하사, 그리고 사건을 공모한 혐의를 받는 이외 신상우(무기형), 배정호(무기형), 양회천(무기형), 강승규(징역 4년형)의 양형 결과 기록이 담겨 있었다.
군법 재판은 암살 사건이 발생하고 두 달 만인 8월 14일에 열렸다.
이날 암살범 손선호 하사가 남긴 최후 진술이다.
손 하사는 전임 연대장인 김익렬 중령과 달리 ‘무자비했던 박진경 대령의 명령’을 암살 배경으로 진술하고 있었다. 이념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박진경 대령의 30만 (제주)도민에 대한 무자비한 작전 공격은 전임 연대장 김익렬 중령의 선무 작전에 비하여 볼 때 불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그릇된 결과로 다음과 같은 사태가 벌어졌다.
우리가 하북이란 부락을 갔을 때 15세 가량 되는 아이가 그 아버지의 시체를 껴안고 있는 것을 보고 무조건 살해하였다. 또 5월 1일 오라리란 부락에 출동하였을 때 수많은 남녀 노소의 시체를 보았을 뿐인데 이들을 자세한 조사 결과 경찰의 비행임을 알게 되었다.
사격 연습을 한다 하고 부락의 소(牛) 기타 가축을 난살하였으며 폭도가 있는 곳을 안다고 안내한 양민을 안내처에 폭도가 없다고 총살하고 말았다. 또 매 한 사람이 한 사람의 폭도를 체포해야 한다는 등 부하에 대한 애정도 전혀 없었다.
박 대령을 암살하고 도망할 기회도 있었으나 30만 도민을 위한 일임으로 그럴 필요도 없었다.
나 하나의 생명이 30만의 도민을 위한 것이며 3천만 민족을 위한 것인 만큼 달게 처벌을 받겠다.”
암살범이었던 손선호 하사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언은 또 있었다.
훗날 군인으로서 최고인 태극무공훈장을 받았으며 당시에는 박진경 대령의 참모였던 임부택 대위의 증언이다. 임 대위는 암살 사건과 관련이 없는 군인이었는데 “조선 민족 전체를 위해 30만 도민을 희생시켜도 된다”는 발언과 “양민을 막론하고 도피자는 3회 정지 명령에 불응 시 총살하라”는 법정 증언이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이 무렵 비밀리에 작성된 미군 보고서에도 숫자의 차이는 있지만 박진경 대령 부임 후에 도민 ‘3,000 여 명이 체포’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한편 같은 날,
군법 재판에서 이 사건 주범인 문상길 중위가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최후 진술은 더욱 인상적이다.
"우리가 군인으로서 자기 직속상관을 살해하고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죽음을 결심하고 행동한 것이다. 재판장 이하 전 법관도 모두 우리 민족이기에 우리가 민족 반역자를 처형한 것에 대하여서는 공감을 가질 줄로 안다.
우리에게 총살형을 선고하는 데 대하여 민족적인 양심으로 대단히 고민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고민은 할 필요가 없다. 이 법정에 대하여 조금도 원한을 가지지 않는다. 안심하기 바란다.
박진경 연대장은 먼저 저 세상으로 갔고, 수일 후에는 우리가 간다.
그리고 재판장 이하 전원도 저 세상에 갈 것이다. 그러면 우리와 박진경 연대장과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저 세상 하느님 앞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인간의 법정은 공평하지 못해도 하느님의 법정은 절대적으로 공평하다.
그러니 재판장은 장차 하느님의 법정에서 다시 재판하기 주기를 부탁한다.”
1948년 9월 23일 낮 3시 35분.
문상길 중위와 손선호 하사는 단심으로 이뤄지는 군사법원의 사형 선고에 따라 서울 은평구 수색동에서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지금 보수매체 등에게 ‘남로당원’이라며 공격받고 있는 문상길 중위가 최후 진술에서 하느님 법정을 언급하는 대목이 이채롭다.
과연 그들은 문상길 중위의 최후 진술처럼 ‘죽어서 하느님의 법정에 다시 만나’ 재판을 받았을까?
그렇다면 그곳에서는 어떤 판결을 받았을까.
지금 박진경 대령을 지지하는 측에서는 제기되고 있는 이 모든 의혹이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부인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박진경 대령의 국가유공자 수훈은 반드시 취소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