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으로 피어나게 해 주니까

라휘- 검은 꽃, 붉은 흙

by 고필찬


운이 없던 건지, 흥미가 없던 건지. 최근 두 달간 읽는 BL 마다 하차를 피하지 못했다.

이대로 짧고 굵었던(!) BL 인생을 청산하는가, 싶었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줄거리



인적 드문 한 시골 마을. 주인수 김무영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의뢰인들에게 인계받은 사체를 처리하고 꽃을 납품하는, 기묘하면서도 고요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어느 비 오는 밤, 그의 운명을 바꿀 사건이 벌어진다.

무영은 집 앞에 예약되지 않은 시체 가방을 발견한다.

하는 수 없이 무영은 익숙한 절차대로 시체를 처리하려한다. 그 순간,


“여기는 어딥니까?”


시체라고만 여겼던 남자가 살아 움직이는 것을 발견한다. 남자는 자신의 이름도, 이곳에 온 이유도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사체를 처리할 뿐, 살인은 하지 않는 김무영. 남자를 이대로 놔주려 한다. 그러나 도망 가는 길에 그를 이곳으로 보낸 자들에게 공격 당해 진짜 죽게될 지도 모른다.

고민 끝에 무영은 남자를 거두기로 결심한다.


한편, 기억을 잃은 '척'하는 남자, 주인공 한건주. 주먹깨나 쓰는 사내로, 부친의 원수를 갚기 위해 무영을 찾아왔다.


기이한 직업답게 김무영이 냉혹한 살인자일 줄 알았던 예상과 달리, 무영은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아니, 사람이기보단 기계에 가까웠다. 감정의 기복도, 사소한 취미도 없었다. 식사는 버는 돈에 비해 매번 초라했고, 오랫동안 시청해 온 드라마 속 사건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건주는 이런 무영의 엉뚱한 무지와 순수함에 조금씩 빠져든다.


건주는 무영의 화원 일을 함께 돌보며 무영의 '아버지', 김흥석과의 관계, 무영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저지른 살인의 진실, 무영의 오랜 단골 장 회장의 진실 등을 하나하나 알게 되는데.



감상


소소한 반전의 연속으로 인해 여느 살인 추리 소설에서나 느꼈던 스릴감을 느낄 수 있던 소설이었다. 물론 사체를 처리하고 남은 분골로 꽃을 키운다는 무영의 기괴한 직업도 한몫한다.


초반에 보여준 건주의 기억 상실이 거짓이었음은 이 소설에서 반전 축에도 끼지 않는다. 마을에 새로 온 인부 최영복이 건주의 심복이라는 것 역시, 소설을 읽는 누구라도 예상 가능한 설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외로 쭉쭉 쏟아진 반전은 예상 밖이었다.


무엇보다 이 소설의 백미는 바로 장 회장의 존재.

식인을 하는 무영의 '아버지' 김흥석으로부터 무영을 지키기 위해 크는 내내 주시해 왔다는 설정이 너무나도 감동적이고 애틋했다.


흥석은 무영이 먹을 만해질 때를 기다리며 동물을 사육하듯 무심하게 무영을 거둬왔다. 무영의 운명을 안타깝게 여긴 장 회장은 꾸준히 어린 무영을 들여다봤다. 심지어 무영이 성인이 될 무렵엔 무영 부자와 동거하며 무영을 보살폈다. 이후에도 장 회장은 무영에게 양질의 고기와 옷가지 등을 꾸준히 챙겨주는 것으로 애정을 표현해 왔다.


그러나 무영과 장 회장의 관계는 단순한 보호자와 아이의 관계가 아니었다. 장 회장은 무영을 지키면서도 그의 진짜 속내를 쉽게 내비치지 않았다. 마치 마블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욘두와 스타로드처럼, 두 사람 사이에는 애증과 거리감이 동시에 존재했다. 무영 역시 장 회장을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고, 장 회장도 무영에게 자신이 아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장 회장은 무영을 위해 살인을 막았다. 무영이 살아갈 수 있도록 계속 지켜주었다. 무영에게 더는 자신이 필요로 하지 않는 순간이 오기를 바라면서도, 진정한 행복을 바랐다.


이러한 장 회장의 희생과 헌신은 이 소설의 제목인 "검은 꽃, 붉은 흙"을 떠올리게 한다. 피로 물든 어둠 속에서도 아름답게 피어나는 꽃처럼, 무영은 장 회장의 보살핌 아래에서 살아남았다. 태양과 물만이 꽃을 키우는가. 흙이 꽃을 품어야 위로 자라나는 법. 장 회장은 끝내 자신이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무영을 지켜냈다.


혈연이 아닌 인연이 때로는 더욱 강한 유대감을 형성할 수도 있다는 점, 그리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진정한 어른의 보살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닫는다.



욘두에게 핫셀호프처럼
말하는 차는 없지만 나는 화살이 있었어.
천사 같은 목소리로 노래하진 않았지만
휘파람소리는 천사 같았지.
욘두도 핫셀호프처럼 모험을 사랑했어.
그래.
우리 아버지는
정말 데이비드 핫셀호프였던 거야.

-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2 中 스타로드가
욘두를 회상하며



대부분의 BL 소설은 공이 멋있어야 하는데, 이 소설에서만큼은 한건주보다 평생 겁 많은 희생양, 김무영의 곁을 말없이 지켜준 장 회장이 훨씬 멋있더라.


얘, 무영아.

너 아무리 연애가 좋아도 장 회장한테 잘해라.

스타로드처럼 후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