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전통시장의 비밀

by 골목길 경제학자

베를린 전통시장의 비밀


지난주 친구의 추천으로 베를린의 한 전통시장을 방문했다. 크로이츠베르그에 위치한 마르크트할레 노인(Markthalle Neun)이다. 친구는 이곳이 베를린 로컬 문화와 브랜드를 경험하기 위한 최적의 장소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시장에서 베를린에서 처음으로 '로컬'이라는 단어를 접했다. 로컬 음식점 'Markt Lokal'이었다. 다른 곳에서는 로컬숍을 보통 베를린 브랜드 또는 메이드 인 베를린으로 표현한다.


더 인상 깊은 것은 시장 자체다. 전통시장도 이렇게 활기차고 세련될 수 있다는 사실을 체감하게 만든다. 가게마다 뿜어져 나오는 개성과 향기, 높고 시원한 천장에서 퍼지는 빛, 매대 하나하나가 짧은 블록 단위로 짜임새 있게 배치된 구조, 청결하고 쾌적한 실내 환경, 시장과 푸드코트의 경계가 무너진 구성까지—모든 요소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음식점과 가게가 적절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었다. 음식점의 활발한 진입에도 불구하고 시장의 기본 기능인 일상 소비재 유통이 무너지지 않고 유지되고 있었으며, 다양한 이용자 층이 공간을 공유하면서도 충돌하지 않는 질서가 형성되어 있었다.


시장 홈페이지는 시장을 커뮤니티 공간으로 소개한다. 베이커와 브루어, 정육사들이 자신의 기술을 펼치는 공방이자, 노인들이 함께 식사하고 학생들이 치즈 만드는 법을 배우는 교육 공간, 그리고 다양한 커뮤니티가 음식을 중심으로 만나고 성장하는 교류의 장이었다.


한국 전통시장의 위기에 대해 고민하는 나로서는 이 질문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마르크트할레 노인은 무엇이 다른 것일까?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지만, 현장에서 직감적으로 찾은 차이점은 건축환경이었다. 시장 활기는 우연히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건축구조에서 비롯된 질서, 그 질서 속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역동이 만든 결과다.



마르크트할레 노인의 구조적 특징

마르크트할레 노인은 1891년 베를린 시가 도시 위생과 유통 질서를 확보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건설한 실내 전통시장으로, 철골 구조와 유리 채광, 높은 천장 등 기능성과 공공성을 갖춘 산업 건축의 전형적인 사례였다. 당시 독일 주요 도시에 지어진 여러 실내 시장들처럼 ‘마르크트할레’라는 이름 아래 유사한 구조와 목적을 공유했으며, 이는 19세기말 도시 근대화 정책의 일환이었다.


2차 세계대전의 피해와 도시 변화 속에 점차 쇠퇴한 이 시장은 2011년, 세 명의 민간 기업인들이 인수하여 ‘지속 가능한 식문화 시장’이라는 새로운 비전으로 재탄생했다. 이들은 지역 생산자와 식문화 창업자를 유치하고, 음식 교육과 커뮤니티 이벤트를 결합해 시장을 다시 시민들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마르크트할레 노인의 부활은 단지 물리적 복원이 아니라, 통합된 건축 환경과 실험적 기획이 만나 만들어낸 도시재생의 한 모델이다.


마르크트할레 노인의 성공은 건축적 아름다움이나 공간 디자인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건축환경만큼 중요한 것은 이를 가능하게 하는 소유구조다. 이 시장은 처음부터 하나의 통합 건축물로 설계되어 단일 소유 구조를 유지해 왔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공공이, 이후에는 기업이 소유했지만 시장 건물이 분할되지 않고 통합적으로 관리된 덕분에 전체 공간의 일관된 리노베이션이 가능했고, 콘텐츠 큐레이션 역시 중앙에서 조율할 수 있었다.


통합된 건축과 일원화된 소유 구조는 점포 간 경쟁을 넘어 상생을 도모하는 질서를 만들 수 있고, 시민에게는 쾌적하고 위생적인 쇼핑 환경을 제공할 수 있다. 이처럼 통합된 건축과 일원화된 소유 구조는 전통시장을 단순한 유통 공간이 아니라 실험과 콘텐츠, 관계와 문화가 어우러지는 공간으로 만드는 전제 조건이 된다.


한국 전통시장의 구조적 한계

한국 전통시장의 구조적 한계 한국의 전통시장은 대부분 '독립건물형/건물주 개별 소유형' 구조를 가진다. 골목을 따라 자연 발생한 전통시장은 개별 점포가 각각의 건물로 존재하며, 건물주 또한 모두 다르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시장 전체의 조화로운 리모델링이나 디자인 통일이 어렵고, 크리에이터가 입점하여 새로운 실험을 펼치기에도 물리적 제약이 많다.


실제 전통시장을 걷다 보면 각 점포의 디자인과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남대문시장과 동대문시장의 일부 구역은 대형 상가형 구조를 띠지만, 내부는 여전히 점포별 분양으로 소유주가 각각 다르기 때문에 실질적인 통합 관리는 어렵다. 연희동 사러가쇼핑센터나 광장시장처럼 기업이나 조합이 통합 소유하는 사례는 있으나 소수에 그친다.


이러한 차이를 보면서 한국 사회가 전통시장에 대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된다. 과연 현재와 같이 시장 시설을 현대화하고, 상인들의 영업 방식을 개선하거나, 마케팅과 홍보로만 충분할까? 무언가 새로운 접근방식 필요하다.


어떤 대안을 선택해도 중요한 것은 크리에이터와 이들이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공간 구조다. 베를린의 마르크트할레 노인이 보여준 것처럼, 시장은 단순한 상거래의 장소가 아니라 도시 문화의 실험실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창의적인 사람들이 자유롭게 시도하고 실패하고 성공할 수 있는 유연한 환경이 있다.


시장의 미래를 위한 대안 탐색

시장의 미래를 위한 대안 탐색 한국 전통시장의 활력을 되살리는 현실적인 방법으로는, 현재의 분산된 소유 구조 내에서도 시도해 볼 수 있는 대안들이 있다.


우선, 건물주들의 자발적 개선을 유도하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케이드 설치, 통합 파사드 등 공공이 주도하는 외관 개선 사업으로는 한계가 있다. 일률적인 외관 사업은 건물주들의 개성 표현과 자발적 투자를 억제하는 단점도 있다. 런던 보로마켓처럼 반투명 아케이드를 설치하되 개별 건물의 파사드가 드러날 수 있는 디자인을 고려할 수 있다.


'건물주 간의 경쟁'은 도시 건축환경을 바꾸는 중요한 동력으로 작용한다. 성수동이나 연남동 같은 골목상권에서는 한 건물의 성공적인 리모델링이 주변 건물주들의 투자를 유도하는 연쇄 작용이 일어난다. 이런 '상대적 박탈감'과 '성공 모방'의 심리는 생각보다 강력한 변화의 원동력이 된다. 골목을 공유하는 전통시장에서도 이런 건축적 경쟁이 일어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것은 어떨까?


단기적으로는 시장 일부 구역만이라도 개방형 구조로 전환하고, 공용 공간을 확보해 팝업 스토어나 이벤트 공간으로 활용하는 것부터 시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광장시장의 '321플랫폼'처럼 전통 시장 안에 현대적 실험이 가능한 공간을 마련하는 것도 좋은 접근법이다.


장기적으로는 베를린 사례처럼 통합 건축-소유 모델을 연구하고 실험해 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는 단기간에 달성하기 어려운 구조적 변화로, 도시재생 사업 등과 연계하여 점진적으로 접근해야 할 과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시장이 다시 '사람들이 머무는 공간'이 되는 것이다.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곳이 아니라, 도시의 삶과 문화가 교차하는 장소로 거듭나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크리에이터들이 자유롭게 실험할 수 있는 환경, 그리고 건물주들이 자발적으로 투자하고 개선할 수 있는 구조적 토대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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