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동네 도시

한국의 동네 단위 혁신 생태계

by 골목길 경제학자

한국의 동네 단위 혁신 생태계


이 글은 한국 내 다양한 동네 단위 혁신 생태계의 사례를 소개하여, 지방 원도심과 소멸위험지역의 재생 전략에 적용 가능한 실증적 모델을 제시하는 데 있다. 특히 도보 생활권 규모의 공간에서 어떻게 자생적 혁신 생태계가 형성되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그 작동 메커니즘과 성공 요인을 설명하고자 한다.


필자는 『동네 아닌 혁신 생태계 본 적 있나』에서 혁신은 메가시티나 메트로폴리탄 단위가 아닌, 도보 생활권 크기의 동네에서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그 글에서는 월스트리트, 샌드힐 로드, 켄달 스퀘어와 같은 글로벌 사례와 함께, 한국의 대표적 창조지구인 홍대, 성수동, 이태원, 판교테크노밸리, 테헤란로 스타트업 생태계를 소개했다.


선행 연구는 도시 경제학과 혁신 연구 분야의 이론적 틀을 바탕으로, 혁신 생태계가 네 가지 핵심 요소로 구성됨을 제시한다: 1) 암묵지(tacit knowledge)의 교환이 가능한 물리적 근접성, 2) 다양한 업종과 전문가 간의 교차 학습, 3) 문화・사회적 어메니티가 결합된 장소성, 4) 상호 신뢰와 협력의 사회적 자본이다. 이 요소들은 도보 가능한 동네 규모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작동하며, 혁신의 공간적 밀도를 높인다.


그러나 동네 혁신 생태계 모델을 소멸위험지역이나 지방의 원도심에 적용하려면, 더욱 다양한 한국 내부 사례들이 요구된다. 이 글에서는 필자가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직간접적으로 접한 동네 단위 혁신 생태계를 추가적으로 소개한다. 이 리스트는 체계적인 전국 조사에서 도출된 결과는 아니며, 도시계획과 지역혁신에 대한 관심 속에서 누적된 경험적 목록에 가깝다. 앞으로 더 많은 사례를 모아 체계적인 연구의 자료를 사용할 계획이다. 독자와의 대화를 통해 추가 사례의 추천을 기대한다.


동네 단위 혁신 생태계 사례

본 연구에서는 한국의 동네 단위 혁신 생태계를 다섯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여 분석한다. 첫째, '과학기술 기반 생태계'는 연구기관과 기업의 혁신 활동이 중심이 되는 공간으로, 지식 생산과 기술 개발에 초점을 둔다. 둘째, '문화예술 기반 생태계'는 창작자와 문화 시설을 중심으로 예술적 생산과 향유가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셋째, '사회혁신 기반 생태계'는 사회적 가치와 지속가능성을 추구하는 조직들이 밀집한 곳으로, 공동체 기반의 협력적 혁신 모델을 보여준다. 넷째, '교육 기반 생태계'는 학습과 교육 활동을 중심으로 형성된 공간으로, 지식 전수와 인적 자본 형성에 기여한다. 다섯째, '소상공인 기반 생태계'는 독립적인 소규모 창업자들이 지역 특성과 결합하여 독특한 상권을 형성한 사례들이다. 이러한 분류는 생태계의 핵심 동력과 주요 구성 주체에 따른 것으로, 실제 사례에서는 여러 유형의 특성이 혼합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1. 과학기술 기반 생태계

홍릉 연구단지 (1970년대~)

서울 동북권의 홍릉 일대는 과학기술처 주도로 조성된 한국 최초의 연구단지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한국개발연구원(KDI), 한국교육개발원(KEDI) 등 정부출연 연구기관들이 집적되며 과학기술 기반의 정책 실험이 이루어졌다. 행정구역상 서울특별시이지만, 실제로는 동대문구 일대의 도보권 생활권을 기반으로 형성된 자족형 지식 생태계였다.


대덕연구단지 (1970년대 후반~현재)

대전광역시 유성구 일대의 대덕연구개발특구는 국책연구소와 대학, 민간 기업이 연계된 다층적 과학기술 생태계를 형성해 왔다. KAIST, ETRI, KRICT 등 연구기관이 모여 하나의 연구 중심 생활권을 형성하며, 수도권 외 지역에서도 자생적 혁신 생태계가 가능함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다.


2. 문화예술 기반 생태계

명동 문화예술 생태계 (1930년대~1960년대)

일제 강점기부터 1960년대까지 명동은 문인, 화가, 연극인, 출판인들이 밀집하며 지식과 예술의 클러스터를 형성한 대표적 도심 예술 생태계였다. 다방, 극장, 화랑, 서점이 혼재한 이곳은 단순한 상권이 아닌 창작 중심 생활권이었다.


북촌 전통공예 거리 (2000년대~)

서울 종로구 북촌은 한옥과 골목길을 기반으로 전통 공예의 생산과 소비가 어우러진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다. 도자기, 한지, 옻칠, 목공예 등 수공예 공방과 체험 공간이 한옥에 입주해 있으며, 국내외 관광객 대상의 공예 체험과 전시가 결합된 산업-문화 복합지구로 진화하고 있다.


삼청동·평창동 갤러리 거리 (1990년대~)

삼청동과 평창동 일대는 서울을 대표하는 상업화된 미술 생태계로, 중소규모 갤러리들이 밀집되어 전시, 판매, 비평, 교류가 이루어지는 문화 클러스터를 형성해 왔다. 특히 평창동은 주거지와 전시공간이 혼재되어 있어 예술가와 기획자의 거주-작업 복합구조가 가능하며, 삼청동은 상업화와 브랜드화된 예술 콘텐츠 소비의 중심지로 자리 잡고 있다.


청담동 K-POP 생태계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중반)

강남구 청담동 일대는 SM엔터테인먼트를 중심으로 트레이닝센터, 영상 스튜디오, 스타일숍, 성형외과, 카페 등이 밀집하며 K-POP 산업의 생산 기반이 형성된 지역이다. 문화 소비보다는 콘텐츠 생산 중심의 생활 기반 생태계라는 점에서 상업상권과 구별된다.


3. 사회혁신 기반 생태계

홍동마을 (1957년~)

충남 예산군 홍동면은 1957년 설립된 풀무학교를 중심으로 유기농업, 협동조합, 대안교육, 지역언론이 결합된 독립적 공동체 생태계를 형성해 왔다. 풀무학교, 풀무농업기술고등학교, 생협, 로컬미디어, 공정여행이 연결되어 '가치 중심의 동네 혁신'이 실현된 공간이다.


원주 협동조합 생태계 (1970년대 후반~)

강원도 원주는 장일순(무위당)의 리더십 아래 협동조합 중심의 사회경제 생태계를 발전시켰다. 단구동과 명륜동 일대를 중심으로 의료생협, 한살림, 사회적경제네트워크 등이 밀집해 지역 순환형 경제 모델이 작동하는 드문 사례다.


성수동 소셜벤처 생태계 (2010년대~)

서울 성동구 성수동 일대는 2010년대 중반부터 사회적기업, 소셜벤처, 임팩트 투자사, 코워킹스페이스가 집적된 소셜 임팩트 중심 생태계로 발전했다. 과거 제조업 공장 지대였던 이곳은 저렴한 임대료와 독특한 산업 유산을 바탕으로, 사회문제 해결과 비즈니스 모델을 결합한 혁신 기업들이 밀집하게 되었다. '헤이그라운드', '소셜캠퍼스 온', '카우앤독' 등의 코워킹스페이스를 중심으로 기업 간 협업과 지식 공유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며, 루트임팩트, MYSC 등의 임팩트 투자사와 엑셀러레이터가 성장을 지원하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4. 교육 기반 생태계

종로 학원가 (1960년대 후반~1980년대)

서울 종로3가 일대는 고시생과 재수생들이 밀집한 교육 중심 생활권으로, 학원, 서점, 독서실, 하숙집 등이 긴밀히 연결되어 비공식적인 지식 생태계를 형성했다. 당시의 청년문화와 학문 교류가 이루어졌던 상징적 장소다.


대치동 학원가 (1990년대~현재)

서울 강남구 대치동은 대한민국 사교육의 수도로 불릴 만큼 학원, 교재기업, 부동산, 프랜차이즈가 밀집한 교육산업 생태계를 형성했다. 도보권 내 교육소비가 집중된 고밀도 생활권 구조로, 산업화된 교육 클러스터의 대표적 예다.


5. 소상공인 기반 생태계

경주 황남동 (2016년~)

불국사와 대릉원 인근의 황남동은 전통 불교문화와 접목된 로컬 콘텐츠 상권으로 성장하고 있다. 한옥 게스트하우스, 한식당, 전통공예점, 사찰문화 체험공간이 골목 단위로 형성되며, 문화유산과 청년 창업이 결합된 새로운 골목 생태계 모델을 보여준다.


전주 한옥마을 (2000년대~)

전주 한옥마을은 한옥, 한복, 한식, 한과, 전통주 등 '한스타일'을 테마로 한 상권이 형성되어 있다. 전통문화와 현대 상업이 조화되며, 체험과 소비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독립 상점 중심의 로컬 브랜드 생태계로 진화하고 있다.


부산 전포동 (2010년대~)

한때 공구상가 밀집 지역이었던 전포동은 편집숍, 디자인 카페, 독립상점이 들어서며 감각적 브랜드 상권으로 탈바꿈했다. 청년 창업자와 디자이너, 크리에이터가 결합해 부산의 대표적 로컬 콘텐츠 거리로 자리 잡았다.


강릉 명주동 / 안목해변 커피거리 (2010년대~)

강릉 명주동은 독립서점, 공예숍, 소형 갤러리, 로컬 식음료 브랜드가 어우러진 문화상권으로 형성되고 있으며, 해안가의 안목해변은 커피 전문점들이 밀집해 국내 최초의 '커피 거리' 문화를 만들었다. 도심의 역사성과 해변의 감성 콘텐츠가 결합된 복합 생태계이다.


양양 죽도해변 서핑타운 (2010년대 중반~)

양양군 현남면 죽도해변 일대는 국내 서핑 문화의 중심지로, 보드숍, 게스트하우스, 서핑스쿨, 로컬 브랜드 카페 등이 골목 단위로 형성되어 있다. 계절성과 청년 트렌드가 결합된 이 해변 상권은 지역 기반 스포츠 레저 생태계의 대표 사례다.


지역 원도심에 주는 교훈

이러한 사례들은 비단 대도시 중심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이들은 소멸위험지역과 지방 원도심이 어떻게 자생적 생태계를 형성할 수 있는지에 대한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첫째, 밀도와 규모의 문제다. 혁신은 광역 단위가 아닌 동네 단위에서 일어난다. 가용 자원을 도시 전체로 분산시키기보다는, 원도심 내 특정 대상지에 집중해야 한다. 국내외 사례는 성공적인 혁신 생태계의 공간적 범위는 대부분 반경 1km 내외의 도보 생활권에 해당함을 보여주며 우연한 만남과 교류, 그리고 일상적 네트워킹이 가능한 물리적 근접성이 혁신의 핵심 조건임을 시사한다.


둘째, 상권 기반의 로컬 브랜드 생태계를 우선적으로 조성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청년 세대의 문화와 트렌드로 자리 잡은 로컬 콘텐츠, 로컬 브랜드 현상을 활용해야 한다. 로컬 브랜드 생태계는 콘텐츠 기반 직주락 구조를 갖기 때문에 청년층의 정주 여건 확보에도 중요하다.


셋째, 원도심 콘텐츠는 지역 자원을 활용한 로컬 콘텐츠뿐 아니라, 커피, 베이커리, 독립서점, 게스트하우스, 복합문화공간 등 글로벌 콘텐츠와, 공유 주거 및 공유 오피스와 같은 직주락 콘텐츠를 함께 포함해야 한다. 사례 분석 결과, 성공적인 혁신 생태계는 '지역 고유성'과 '글로벌 보편성'이 균형을 이룬 콘텐츠 구성을 보였다. 전통문화나 지역 자원만으로는 청년층의 지속적 유입과 정착이 어려웠으며, 반대로 글로벌 표준 콘텐츠만으로는 차별화된 장소성 확보가 불가능했다.


넷째, 로컬 콘텐츠를 단순한 소비 상품을 넘어 지속가능한 생산 체계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기술적 기반이 필요하다. 로컬 콘텐츠 생태계는 공방, 작업장, 실험실, 메이커 스페이스와 같은 '창작-생산-교육'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공간을 통해 구현되어야 한다. 이러한 공간들은 지역 자원을 활용한 콘텐츠가 단순 아이디어 단계에서 상품화, 사업화로 발전할 수 있는 기술적 지원과 교육 기능을 담당한다. 로컬 콘텐츠가 일회성 트렌드가 아닌 지속가능한 생태계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기술 역량을 축적하고 공유할 수 있는 혁신적 공간이 필수적이다


다섯째, 원도심 대상지에는 공간 기획이 용이하고 상업적 가치가 높은 건축물, 그리고 보행 친화적 가로환경이 필수적으로 조성되어야 한다. 이러한 물리적 조건은 콘텐츠 순환, 창업 유입, 정주 인구 형성의 기반이 된다. 대덕연구단지 등 일부 예외는 있지만, 대부분의 성공 사례들은 공통적으로 리모델링이 용이한 중소형 건축물(1~3층 규모)과 활발한 가로 활동이 가능한 보행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혁신이 일어나는 공간적 스케일이 거대 개발보다는 미시적인 도시 조직 수준임을 보여준다.


결론

지방 도시의 경쟁력은 더 이상 외부 자본 유치나 대규모 인프라 개발이 아니라, 삶의 방식과 경제활동이 밀집된 동네 단위에서 시작된다. 다양한 사례들이 보여주듯, 자생적이고 밀도 높은 혁신 생태계는 특정 주제나 산업을 중심으로 한 생활권 기반에서 형성된다. 동네를 중심으로 콘텐츠를 순환시키고, 건축환경과 보행성을 연계하며, 지역 주민과 청년 창업자의 실천이 축적될 때, 진정한 도시의 미래가 열린다.


동네 중심 생태계의 이론적 의의는 기존의 혁신 클러스터 이론이 주로 광역적 산업 집적에 초점을 맞춘 것과 달리, 미시적 공간 단위인 '동네'의 중요성을 실증적으로 규명한다는 점이다. 암묵지(tacit knowledge)의 교환, 다양한 주체 간 교차 학습, 사회적 자본 형성이 도보 생활권 규모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작동함을 다양한 한국적 사례를 통해 확인했다.


향후 연구에서는 더 많은 사례에 대한 정량적 분석과 함께, 동네 단위 혁신 생태계의 성공과 실패를 결정하는 핵심 요인에 대한 심층적 탐구가 필요하다. 또한 이러한 생태계가 형성되는 초기 조건과 진화 과정에 대한 장기적 추적 연구, 그리고 젠트리피케이션과 같은 부작용을 예방하기 위한 정책적 대안 연구도 중요한 과제로 남아있다. 궁극적으로 본 연구는 지방 소멸과 수도권 집중이라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에 대응하는 실질적 대안으로서, 동네 단위 혁신 생태계 모델의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몬트리올: 다중심 문화지구의 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