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구글을 처음 만났다. 보통사람에겐 2기가 바이트, 특별한 고객에겐 무제한 용량을 제공한다며 지메일을 추천하던 선배의 권유는 상당히 솔깃했다. 예나 지금이나, 구글 지메일의 매력은 큰 용량이다. 또 해외 출장에서 사용하기가 편리하다. 해외에서는 종종 내가 근무하는 학교 이메일 계정에 접속하기가 어려웠던 반면, 구글은 언어나 인증에 상관없이 모든 컴퓨터에서 쉽게 접속할 수 있었다. 한번 지메일을 쓰기 시작했더니 이제는 지메일 없이는 살 수 없을 것 같다. 10년간 사용한 덕 분에 메일함 사용 용량이 커져 매달 돈을 내야 한다. 하지만 다른 서비스는 구글이 제공하는 용량을 따라오지 못하니 어쩔 수 없다. 구글 의존도는 이메일뿐만이 아니다. 이래도 되나, 걱정스러울 정도로 구글에 모든 걸 맡겼다. 모든 문서를 구글 드라이브에 보관하고 스마트폰도 안드로이드 운영 체제를 쓰다 보니 일정, 메모, 음악 등 나의 모든 모바일 일상을 구글이 관리한다. 한마디로 구글이 내 작업 비서다.
미국의 명문 대학들도 구글 시스템으로 이메일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내가 재직하는 학교는 자체 시스템으로는 교내 이메일 수요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점과 구성원이 필요한 용량을 확보하려면 막대한 규모의 투자가 필요하다는 점 때문에 구글로 메일 시스템을 전환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구글이 지금 같은 추세로 우리의 일상을 지배해 나간다면, 머지않아 소설가 조지 오웰이 경고한 것처럼 우리의 모든 일상을 감시하는 독재 자 빅브라더(Big Brother)가 될 수도 있다. 이미 지메일을 쓰면서 많은 것을 잃었다. 한때 이메일 주소는 우리가 원하는 그룹으로 우리를 묶어줬다. 지금은 아니다. 현재 나의 이메일 주소는 ‘나의 이름.gmail.com’이다. 지 메일 주소는 나의 직장, 모교, 모국 등 내가 속한 많은 집단 중 어느 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중 모교를 잃은 것이 가장 아쉽다. 나는 대학원을 졸업할 때, 졸업 후에도 학교 이메일 주소를 계속 쓸 수 있다는 것이 무척 기뻤다. 지금은 모교에서 이메일 계정을 주어도 사용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한다.
구글은 거대한 공룡 티라노사우루스 같은 존재다. 디지털 시대의 ‘독점 기업’이란 명성에 걸맞게 모든 영역에서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동시에 경쟁사들을 황폐하게 휩쓸어버린다. ‘공룡’에 대항하기 위해 통신사, 포털사, 스마트폰 생산자, 소프트웨어 개발사 등 수많은 기업은 특허 침해, 불공정거래, 독점 금지법 위반, 기업 비밀 절도, 사생활 침해, 저작권 위반 등의 항목으로 법정에서 힘겨운 싸움을 한다.
실제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독점 기업’ 구글을 위험하다고 생각할까? 미래를 꿈꾸는 나의 제자에게는 구글이 오히려 꿈의 기업이다. 구글은 기술, 일하는 방식, 네트워크, 사내 복지, 기업 문화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젊은이가 열광하는 새로운 기업 트렌드를 이끈다.
구글은 올해로 창립한 지 15년이 되었다. 스탠퍼드 대학원에서 공부하던 래리 페이지(Larry Page)와 세르게이 브린(Sergey Brin)은 1998년 팰로앨토 옆 멘로파크 가정집 창고에서 처음으로 구글을 탄생시켰다. 현재 구글 본사는 팰로앨토 남쪽 마운틴뷰 시의 샌프란시스코 만 근처에 있다. 대학 캠퍼스처럼 조성된 본사를 구글플렉스(Googleplex)라고 부른다.
구글의 가장 큰 경쟁력은 기업 문화다. 2013년에 개봉된 영화〈인턴십(The Internship)〉은 구글의 기업 문화를 창의성, 자유, 그리고 재미로 표현한다. 회사는 한때 창의성 계발을 위해 직원에게 근무시간의 20퍼센트 를 창의적인 일에 자유롭게 쓰도록 허용했을 만큼 창의성을 강조한다. 이 같은 창의성을 독려하는 문화로 수많은 혁신 제품을 시장에 소개했다. 이미 우리 일상에 깊숙하게 자리한 검색엔진 기반의 서비스나 방대한 데이터베이스가 필요한 전자책, 3차원 지도 서비스는 물론이고, 구글 글라스 등 새로운 스마트 기기로 우리 삶을 이끌고 있다. 심지어 최근에는 미 국방성 지원을 받던 군용 로봇 생산 기업을 인수하거나 우주 산업에 눈을 돌리는 등 새로운 분야로의 도전도 주저하지 않는다. 아마도 자신을 창의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회사에서 한번 일해보고 싶은 충동을 느낄 것이다.
구글은 자유분방한 기업이다. 본사에 가면 회사 자전거를 타고 자유롭게 단지 내를 돌아다니는 직원들을 볼 수 있다. 유럽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티바이시클(City Bicycle)’의 개념을 빌려 온 것이다. 관광객은 시티바이시클을 어디에서나 빌리고, 어디에서나 버릴 수 있다. 마찬가지로 구글 직원들도 건물과 건물을 이동할 때 건물 앞에 서 있는 자전거를 하나 골라 타고 다음 건물에 도착하면 건물 앞에 두고 가면 된다. 회사 단지 안에서의 이동에 대한 경직된 사고를 벗어난 구글다운 참신한 발상이다.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복지 제도는 어떨까? 좋은 음식을 무제한 공급하는 카페테리아, 수영장과 골프 코스, 혼자만의 휴식 공간을 제공하는 큐비클 등은 말 그대로 ‘일하면서 즐기는(Working and Playing)’ 업무 철 학을 실현한다. 구글에서 일하다 떠난 나의 후배는 오후에 사무실을 돌며 차를 나눠주던 ‘티 카트(Tea Cart)’를 지금도 그리워한다.
이러한 자유로움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20퍼센트 80퍼센트 프로젝트’라는 게 있다. 구글 직원이라면 누구나 ‘아이디어 마켓’에 아이디어를 제출할 자격이 있다. 아이디어 마켓에서 일정 수 이상의 직원이 인정하면 그 아이디어는 ‘20퍼센트 프로젝트’에 등재된다. 그러면 자기 업무 시간의 20퍼센트를 투자해 이를 구체화할 수 있다. 회사는 20퍼센트 프로젝트 중 좋은 아이디어를 골라 80퍼센트 프로젝트로 지정해 공식 사업으로 추진한다. 구글 특유의 자유로운 기업 문화가 단순히 업무 외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기업의 핵심에까지 깊게 뿌리내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도시와 구글의 관계는 복잡하다. 본사는 마운틴뷰, 창업 장소는 멘로파크, 창업자들이 공부하고 활동한 주 무대는 팰로앨토다. 그러나 현재 여러 사업을 팰로앨토에서 하고 있고, 마운틴뷰 본사도 팰로앨토 옆에 있기 때문에 구글이 자란 도시를 팰로앨토라고 말해도 큰 무리는 없을 듯하다. 어느 도시가 구글의 고향인지에 대한 논쟁을 피하려면 실리콘밸리를 내세우면 된다. 실리콘밸리는 샌프란시스코 만 서쪽의 팰로앨토 시에서 남쪽 새너제이(San Jose) 시까지 넓게 걸쳐 있다. 행정 구역으로는 샌타클래라카운티(Santa Clara County), 새너제이 시, 그리고 샌마테오카운티(San Mateo County) 일부를 포함한다. 스탠퍼드 대학이 1953년 스탠퍼드 연구단지를 만들고, 실리콘으로 된 반도체 칩을 생산하는 기업을 대거 유치하면서부터 이 지역은 실리콘밸리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자타가 공인하는 실리콘밸리의 간판 기업인 구글. 그러나 구글이 얼마나 오랫동안 실리콘밸리 대표 자리를 유지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실리콘밸리에서는 수없이 많은 기업이 탄생하고 소멸한다. 실리콘밸리가 시작된 스탠퍼드 연구단지의 건물 주인은 거의 매년 바뀐다. 실리콘밸리에 사는 젊은 사람 중 과거 실리콘밸리를 이끌었던 복합기업 리턴인더스트 리스, 복사기 제조 회사 제록스, 반도체 제조 회사인 내셔널세미컨덕터와 페어차일드세미컨덕터를 기억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창조, 도전, 위험 감수를 강조하는 실리콘밸리에서 기업의 탄생과 소멸, 그리고 재탄생의 반복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다.
실리콘밸리에서 실패란 미래의 성공을 여는 서막에 불과하다. 꽤 성공한 변호사도 실리콘밸리에서 만큼은 거부당하는 일을 다반사로 겪는다. 미국 명문 대학을 졸업한 변호사 T에게서 들은 이야기로는, 새로운 벤처를 위해 투자가를 찾아가 자금 투자를 부탁하면 10번에 9번은 거부당한다고 한다. 또 그가 지원하는 사업의 90퍼센트는 투자자를 찾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니 거절당해도 좌절하지 않는 자세가 실리콘밸리에서의 생존법이다. “거절당할 수 있고, 실패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이곳에 와야 해요.” T는 학교가 학생에게 냉혹한 창업 현장의 진실을 교육하면, 졸업 후 한두 번의 거절로 좌절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구글의 주력 사업인 검색 광고와 운영체제는 한때 주도적 비즈니스 모델이었지만, 지금은 SNS에 권좌를 내줬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고, 구글 회장 에릭 슈밋(Eric Schmidt)은 지금도 SNS 참여 기회를 놓친 것을 가장 아쉬워한다. 그러나 언젠간 SNS도 또 다른 비즈니스 모델에 밀릴 수도 있다. 실리콘밸리의 모든 사람이 항상 ‘다음의 큰 것(Next Big Thing)’을 기다리고 준비한다.
‘다음의 큰 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실리콘밸리에서 탄생할 것만은 확실하다. 실리콘밸리는 미국 벤처 산업의 중심지다. 그리고 엄청난 기득권을 누린다. 많은 돈이 더 많은 돈을 만들듯이 실리콘밸리의 성공이 미래의 실리콘밸리를 보장한다. 1995년 실리콘밸리에서 최초로 애플 클론 회사인 파워컴퓨팅(Power Computing)을 창업한 스티브 강(Steve Kahng) 대표는 새로운 기술과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이라면 실리콘밸리에서 창업할 수밖에 없다고 단언한다. 자본, 노하우, 마케팅, 기술 등 창업 성공에 필요한 모든 자원이 몰려 있어서 창업가가 가장 효율적으로 가장 우수한 자원을 확보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실리콘밸리이기 때문이다. 활발한 벤처 산업 문화도 창업가에게 유리하다. 실리콘밸리 벤처캐피털 회사는 벤처 기업을 위해 전문가와 경영진을 충원하는 등 새로운 기업을 만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엄청나게 지원한다. 투자한 회사에서 투자 자금을 회수하기만 기다리는 우리나라 벤처 산업 문화와는 큰 차이가 난다.
우리나라를 포함해 세계의 많은 나라가 자국에 실리콘밸리를 유치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에 성공한 나라를 찾기는 어렵다. 실리콘밸리에서 활동하는 작가 폴 그레이엄은 실리콘밸리를 건설하는 일이 이론적으로는 간단하다고 말한다. 그는 실리콘밸리의 엔지니어와 벤처 투자가 중 만 명만 다른 도시로 옮기면 그 도시가 새로운 실리콘밸리가 된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이들 엔지니어와 벤처 투자자 모두 좋아하는 도시를 찾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엔지니어는 뉴욕, LA, 마이애미 등 화려한 도시를 좋아하지 않고, 벤처 투자가와 같은 부자는 이타카, 매디슨, 피츠버그 등 엔지니어를 많이 배출한 대학의 도시에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새로운 실리콘밸리를 건설하는 사업의 관건은 부자와 공붓벌레가 모두 좋아하는 도시를 만드는 것이다. 미국에서 그런 곳은 어디일까? 팰로앨토, 오스틴, 시애틀이 이 조건을 만족하는 도시이다. 그런데 이 도시들은 대부분 서부에 있다. 서부 도시가 부자와 공붓벌레에게 매력적인 공통의 이유는 기후, 자연환경, 문화이다. 그중에서 나는 서부의 ‘격식 없는 문화’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다. 이 문화는 부자와 엔지니어가 서로의 문화적 벽을 극복하게 함으로써 함께 일하기 쉽게 돕는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미국 경제의 중심도 월스트리트에서 실리콘밸리로 이동했다. 뉴욕이 아닌 실리콘밸리, 그리고 그 중심인 팰로앨토로 억만장자를 꿈꾸는 재능 있는 기업인이 모인다. 다시 강 대표의 말을 빌리면, “실리콘밸리에 돈과 인재가 모이는 이유를 복잡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미국에서 제일 많은 억만장자를 배출하기 때문이다.”
팰로앨토의 중심은 스탠퍼드 대학 정문에서 시작되는 유니버시티애비뉴(University Avenue)다. 이 거리를 중심으로 카페, 레스토랑, 바, 부티크 상점, 서점, 화랑 등 젊은 세대가 선호하는 상권이 형성되어 있다. 도시적 라이프스타일을 선호하는 실리콘밸리 사람은 팰로앨토를 주거지로 선택한다. 반면 가정적이고 한적한 환경을 좋아하는 사람은 우드사이드, 포톨라밸리 등 팰로앨토 주변의 전원도시에서 산다.
팰로앨토의 도심은 누가 말해주지 않으면 이곳이 세계 벤처 산업과 첨단기술 연구의 중심지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조용하고 차분하다. 겉으로 보기엔 작고 소박한 건물들도 사실 세계적인 벤처캐피털 회사와 로펌 사무실이다. 실리콘밸리의 벤처캐피털 회사는 팰로앨토 도심, 그리 고 도심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샌드힐로드에 집중되어 있다.
팰로앨토 카페는 종일 붐빈다. 많은 사람이 노트북을 들고 카페에서 일한다. 카페에서 진행되는 회의와 모임도 일상적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실리콘밸리의 중요한 거래는 모두 카페에서 이루어진다고 한다. 캘리포니아의 빛나는 태양을 즐기면서 여유 있게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이, 실은 우리의 라이프스타일을 바꾸는 기술과 기업을 사고파는 주체들이다.
모든 카페와 식당이 중요한 거래 장소는 아니다. 팰로앨토에 사는 친구들 말에 의하면 최근에는 두 곳이 비즈니스 거래의 중심지로 인기 있다고 한다. 한 곳은 팰로앨토에서 조금 떨어진 우드사이드 시에 있는 벅스(Bucks), 또 다른 한 곳은 유니버시티애비뉴에 있는 일포르나이오(Il Fornaio)다. 벅스나 일포르나이오 모두 관광객이 쉽게 방문할 수 있다.
팰로앨토는 수많은 억만장자를 배출하지만, 미국 동부와 유럽에서 볼 수 있는 귀족 문화를 만들지 않는다. 팰로앨토의 격식 없는 문화는 다분히 캘리포니아의 영향을 받았다. 캘리포니아는 개방적이고 새로움 을 추구하는 곳이다. 동부를 떠나 캘리포니아를 개척한 사람들은 기존의 권위와 격식을 거부하고 새로운 기회를 찾아 떠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캘리포니아에 정착했을 때 개인주의적이고 자유로운 문화를 구축하고 유지했다.
한 도시에서 혁신적인 생태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구성원 간의 격 식 없는 문화가 중요하다. 혁신은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진 사람이 자유롭게 협력할 수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나이, 성별, 종교, 직위에 따라 상하관계, 우열관계, 위계질서를 만드는 사회에서 자유로운 협력을 기대하기 어렵다.
구글을 소재로 만든 영화〈인턴십〉에서 우리는 격식과 지위가 없는 구글의 기업 문화를 목격한다. 인턴으로 창업 대회에 참여한 닉은 구글 임원인 다나와 사랑에 빠진다. 인턴과 임원의 사랑은 다소 진부한 소재 일 수 있지만, 자유로운 구글의 기업 문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격의 없는 문화라고 해서 질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 자란 나는 미국에서 상사를 이름으로 부른다거나 서 있는 상사에게 앉아서 대답하는 것이 어색했다. 학교 다닐 때는 차마 교수님을 이름으로 부를 수 없어 항상 교수님으로 존칭을 썼다. 나의 존칭이 어색하셨는지, 교수님은 학생 때나 지금이나 나를 ‘미스터 모’로 부르신다.
지금도 나는 미국으로 유학 가는 제자에게 미국 선생님을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고 조언한다. 미국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달리 상하관계가 엄격하다. 사람들은 미국에서 상사의 지시나 의견을 공개적으로 반 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솔직히 내 경험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토론 이 자유롭다는 교수 회의에서도 막강한 권한을 가진 학과장 앞에서 직 접적이고 솔직하게 말하는 교수는 없었다.
나는 농담으로 이런 말을 가끔 한다. 미국 보스는 한국 보스와 달리 사원을 자유롭게 해고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우리나라에서 해고는 문화적으로나 법률적으로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미국 사회는 막강한 권한 행사로 경직되기 쉬운 인간관계를 격의 없는 문 화로 완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캘리포니아의 독립 정신과 개척 문화만으로는 실리콘밸리의 성공을 설명하기 어렵다. 기존 연구를 살펴보면, 실리콘밸리가 성공할 수 있었던 주요 요인은 정부 지원과 스탠퍼드 대학의 주도적인 역할이다.
실리콘밸리의 본격적인 성장은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 시대에 미국 군수 산업에 진공관과 반도체를 공급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당시에는 미국 정부와 국방성이 실리콘밸리 생산품의 제일 큰 고객이었다. 실리콘밸리 역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휼렛패커드(HP)와 페어차일드세미컨덕터는 정부에 전자 장비를 납품하고 정부 연구개발 사업의 지원을 받아 성장한 기업이다.
실리콘밸리를 초기부터 지원하고 이끈 역할을 한 기관은 스탠퍼드 대학이다. 중요한 기술을 개발하고 첨단기술 인력을 교육함으로써 실리 콘밸리의 성장에 기여했다. 현재 실리콘밸리라고 불리는 지역은 캠퍼스 내에 개발해서 분양한 스탠퍼드 연구단지에서 시작되어 새너제이 방향으로 퍼진 것이다.
1930~1940년대 마이크로파관, 진공관, 고체전자 등 실리콘밸리 기업이 상업화한 기술은 거의 모두 대학 연구소에서 개발됐고, 1960년대도 인지과학 연구를 통해 PC 개발에 중요한 기술을 제공했다. 스탠퍼드 대학이 실리콘밸리 발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기술뿐만이 아니다. 더 중요한 기여는 창업 문화 전파였다.
MIT 등 동부 대학, 심지어 같은 서부 도시인 캘리포니아의 버클리 대학과 달리 초기부터 산학협력을 통 해 대학에서 개발한 기술을 상업화했다. 스탠퍼드 대학에서 창업과 기업가 문화를 지원하는 학풍이 자리 잡은 것은 전적으로 프레드릭스 터만(Fredrick Turman) 교수의 공이다. 스탠퍼드 대학 교수의 아들로 태어난 터만은 1925년 MIT에서 전자공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아버지가 계신 대학의 전자공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지역 기업과 산학협력에 남달리 관심이 많았던 그는 교수 시절에 제 자들을 데리고 당시 새로운 전자 산업을 개척하기 위해 노력하는 기업 인과 경영인을 즐겨 방문했다. 그는 뛰어난 제자들이 대학을 졸업한 후 동부 기업으로 취업하는 현실을 아쉬워하며, 산학협력과 창업을 통해 지역 기업을 육성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북부 캘리포니아는 첨단산업의 중심지가 아니었다. 첨단기술의 중심지는 동부였고, 아이텔맥컬러프, 리턴인더스트리스 등 실리콘밸리에서 처음 성공한 진공관 기업이 사용한 원천 기술은 모두 동부 기업과 연구소에서 개발되었다. 지역의 자생적 산업 기반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터만 학장은 제자들에게 대학에서 개발한 기술로 창업할 것을 적극 권 장했다. 터만 학장의 권고로 팰로앨토에서 창업한 제자 중 가장 성공한 두 사람이 1938년 세계적인 컴퓨터 회사인 휼렛패커드를 창업한 빌 휼렛(Bill Hewlett)과 데이비드 패커드(David Packard)다. 두 사람은 팰로앨토 도심의 조그만 집에서 창업했다. 팰로앨토 시는 애디슨 거리에 있는 이 건물을 역사 문화재로 등재했고 ‘실리콘밸리의 탄생지’로 명명했다.
1951년 스탠퍼드 공대 학장이 된 터만 교수는 더 열정적으로 지역 기업과 협력했다. 현재까지도 실리콘밸리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스탠퍼드 연구단지 역시 그가 추진한 사업이다. 그는 대학의 넓은 땅을 첨단산업 기업에 임대하는 방식으로 지역 기업을 유치하고, 이를 통해 기업과 의 공동연구 및 교수와 학생의 창업을 지원했다. 휼렛패커드, 리턴인더스트리스 등 터만 학장이 후원한 수많은 기업은 실리콘밸리의 모태가 되었고, 실리콘밸리는 터만 학장이 건설한 스탠퍼드 연구단지를 중심으로 무럭무럭 발전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터만을 ‘실리콘밸리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터만 학장은 우리나라와도 인연이 깊다. 2009년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의원은 스탠퍼드 캠퍼스를 방문하여 공과대학 건물인 터만공학센터를 찾았다. 우리나라 과학기술 발전의 산실 역할을 한 한국과학기술원 KAIST 설립에 큰 도움을 준 그를 기억하기 위한 방문이었다.
그는 1970년 한국 정부의 요청으로 KAIST 설립의 청사진을 제시 한 ‘터만 보고서’를 작성하고 그 후 5년 동안 다섯 차례 한국을 방문해 KAIST 설립을 지원했다. 한국에서도 그의 발자취를 찾을 수 있다. KAIST가 2004년 대덕연구단지 캠퍼스에 건축한 ‘터만 홀’은 그를 기념한 공간이다.
KAIST는 지금도 학생 창업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학기마다 열리는 기업가 정신과 특허 강의는 학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수업 중 하나다. 최근에 구축된 ‘스타트업 KAIST’ 시스템은 창업 문턱을 낮추고 창업의 전 주기를 지원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학과별, 부서별로 분산되어 있던 창업 지원 프로그램을 통합했다. 그러나 대학이 적극 나서서 학생에게 창업에 필요한 모든 제반 사항을 지원하는 모델은, 역설적으로 대덕에 실리콘밸리와 같은 건강한 창업 문화가 자리 잡지 못하는 이유가 될 수 있다. 정부나 대학의 보조금에 익숙해진 학생은 개인의 위험 요소를 감당하거나 새로운 투자자를 찾는 데 서툴기 마련이다. 우리 정부가 실리 콘밸리를 지금의 위치로 끌어올린 역사와 문화적 동력을 보지 못하고 실리콘밸리가 만들어 낸 결과에만 주목한 결과가 아닐까?
실리콘밸리를 개척한 사람은 옆집 아저씨같이 온화한 분위기의 터만 학장이다. 그러나 실리콘밸리의 역사가 터만 학장과 같이 ‘모범적인’ 사람으로만 채워진 것은 아니다.
1980년대, PC 시대가 열리면서 실리콘밸리는 첨단산업 중심지로 서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첨단산업은 1930년대에 시작됐지만, 실리 콘밸리가 세계 경제를 주도하는 지역으로 부상한 것은 1980년대다. 1960~1970년대만 해도 실리콘밸리가 PC 시대를 주도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당시 미국 컴퓨터 산업의 중심지는 동부였다. 뉴욕 에 본사를 둔 IBM이나 매사추세츠 주의 DEC 등의 컴퓨터 회사가 기업에 메인프레임 컴퓨터를 공급하면서 컴퓨터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PC(Personal Computer)는 말 그대로 개인 컴퓨터다. 개인 컴퓨터는 개인이 회사로부터 독립하여 정보를 보관하고 관리할 수 있는 기계다. 메인 프레임이 대기업의 권력을 상징한다면 개인 컴퓨터는 그와 같은 권력에 서 개인을 자유롭게 하는 탈脫권력을 상징한다. 실리콘밸리에서 PC 산 업을 개척한 사람들은 개인을 기업 메인프레임에서 해방하고자 노력했다. 다시 말해 기존 권위를 거부한 1960년대 대항문화(Counterculture)를 컴 퓨터 산업에서 실현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실제로 1960년대 스탠퍼드 연구소에서 마우스, 이메일, 워드 프로세서 등의 개념을 개발한 더글러스 엥겔바트(Douglas Engelbart) 등 많은 PC 산업 선구자들이 1960년대 대 항문화의 추종자였다. 대항문화는 사회의 지배적인 문화에 정면으로 반대하고 적극 도전하는 하위문화다. 1960년대 미국 대항문화의 상징은 반전운동, 히피즘, 마약이었다. PC 개발자의 상당수가 상습적으로 환각제(LSD)를 복용했다.
지금의 팰로앨토와 실리콘밸리에서 대항문화의 유산과 현장을 찾기는 어렵다. 수많은 억만장자와 미래의 억만장자가 되려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모인 실리콘밸리는 기존의 권위와 문화를 거부하는 히피가 살기에는 너무나 비싼 지역이 되어버렸다.
북부 캘리포니아 대항문화의 중심지는 팰로앨토에서 64킬로미터 떨어진 버클리다. 대항문화의 에너지를 새로운 산업으로 승화한 팰로앨토 와 실리콘밸리는 미국 경제의 중심지가 되었는데, 대항문화를 본질에 가깝게 수용한 버클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오랜만에 버클리를 찾았으나, 과거의 모습은 그다지 남아 있지 않았다. 집값과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한 히피들이 오클랜드 등으로 대거 이주했다. 부유한 전문직 종사자들이 이사해 오기 시작하면서 히피들이 떠난 샌프란시스코의 헤이트애 시베리(Haight-Ashbury)의 전처를 밟는 것 같다. 헤이트애시베리는 1967년 수만 명의 히피가 집결해 ‘섬머 오브 러브(Summer of Love)’ 반전 운동을 벌였던 곳으로 히피 문화의 중심지였다. 하지만 히피들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나이가 들면서 대부분 주류 사회에 동참했고, 버클리 히피들도 마찬가지로 이제 교수나 비즈니스맨이 되었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1980년대에는 PC로, 2000년대에는 아이폰으로 실리콘밸리의 역사를 바꾼 전설적인 인물이다. 터만이 실리콘밸리의 아버지라면 잡스는 중시조다. 많이 알려진 사실이지만, 잡스는 모범생과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의 학력은 오리건 포틀랜드 시에 있는 리드 대학을 고작 1년 동안 다니다가 중퇴한 것으로 끝난다.
젊은 시절 대항문화에 심취했던 잡스는 마약을 상습적으로 복용했고, 마약을 복용한 자신의 과거를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자랑스럽게 내보였다. 스티브 잡스가 인정한 유일한 전기이자 자신에 대한 직접 적인 진술이 담겨 있는《스티브 잡스》에서 그는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를 시야가 좁은 ‘공붓벌레’로 표현했다. 또한 “마이크로소프트 유 전자에는 인간애와 인문학이 없다”며 “빌이 젊었을 때 마리화나나 히피 문화에 빠졌더라면 좀 더 넓은 시야를 갖게 됐을 것”이라고 했다. 젊은 시절에 사용한 환각제, LSD에 대해서도 “LSD는 사물에 이면이 있음을 보여주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경험의 하나”였고 “자신을 깨어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라고 회고했다.
젊은 시절의 잡스는 히피였지만, 애플을 창업한 후 그는 인정사정없는 자본가로 변신했다. 그러나 히피였을 때나 성공한 기업인이었을 때나 변하지 않은 단 한 가지가 있다면, 그가 항상 이단아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기존의 정설과 권위를 거부하고 항상 ‘다르게’ 생각했다. 그의 인생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끝없는 도전이다. 잡스의 도전은 기존 권위에 순응하지 않는 독립심과 기존의 권위를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깔려 있다.
1960년과 1970년대 미국 이단아들은 대항문화를 통해 자신의 정체 성을 확립했다. 마약, 반전 운동, 섹스 등은 이단 정신을 표현하는 수단이었다. 일부 히피들은 주류 사회에 진출하여 세속적인 성공을 이뤘다. 그중 일부는 아이스크림 회사 벤앤드제리스, 화장품 회사 더바디샵, 식품 매장 홀푸드마켓 등 사회적 책임에 충실한 기업을 창업했다.
나는 솔직히 미국의 창업 문화가 부럽다. 미국 창업 문화의 역사를 알기 시작하면서 창업 문화 탄생에 이바지한 대항문화에까지 호감이 갔다. ‘모범생’으로 자라오다 중년이 되어서야 히피 지역을 방문하고 싶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젊었을 때 그들과 더 가깝게 지냈을 텐데” 하는 약간의 후회와 함께, 동시에 “우리나라에는 왜 대항문화가 없을까?”라는 의문도 들었다.
1960년대 반전운동이 히피 세대를 탄생시켰다면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대 학생운동이 386세대를 만들었다. 미국의 히피 세대와 같이 우리나라의 386세대도 새로운 가치관과 진보 정신으로 민주화 등 한국 사회 발전에 이바지했다. 386세대는 민주화에서만 활약한 것이 아니다. 1990년대 벤처 붐, 2000년대 한류 붐 등 우리나라의 새로운 산업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386세대가 우리나라에서 대항문화를 내면화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쉽게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386세대는 처음부터 정치 세력이었고 지금도 기본적으로 정치 세력으로 영향을 행사할 뿐, 대안적 삶의 방식을 제시하는 문화 세력으로는 발전하지 못했다.
미국의 히피 세대는 달랐다.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등 정치적인 성향을 보였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반전뿐만 아니라 자유, 인간, 평등을 강 조한 대안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했다. 반면 정치권에 남은 386세대는 계속 1980년대 정치 이념을 추구했고, 정치권을 떠난 대다수 386세대는 주류 사회에 편입했다. 잡스는 자신이 히피였기 때문에 성공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에서 자신이 운동권이어서 성공했다고 주장하는 기업인이 있는가?
잡스는 이단아적인 기업가 정신이 항상 혁신과 변화를 추구하는 실리콘밸리의 정신적 토대임을 증명했다. 실리콘밸리가 자랑하는 격식 없는 문화도 이단아에 대한 관용을 의미하는 측면에서 보면 이단 문화의 일부라고 말할 수 있다. 실리콘밸리를 세우고 변화시킨 사람은 모두 기성 인재와는 달랐다. 히피 문화도 실리콘밸리를 거쳐 간 많은 이단 정신 중 하나다. 창조적 파괴가 일상화된 실리콘밸리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기존 비즈니스와 질서를 거부하는 이단 정신이 필수적이다.
쿠퍼티노에 소재한 애플 본사, 스티브 잡스가 살았던 팰로앨토 집과 그가 좋아했던 식당 등 실리콘밸리에는 잡스를 기리는 장소가 많다. 2011년에 사망한 잡스의 영혼을 만나고 싶다면 그가 묻힌 팰로앨토 남부 알타메사 기념 공원을 방문하는 것이 좋다. HP를 창업한 데이비드 패커드, 스탠퍼드 연구단지를 조성한 프레드릭스 터만, 트랜지스터를 발명한 윌리엄 쇼클리 등 실리콘밸리를 개척한 다른 영웅들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출처: 작은 도시 큰 기업,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