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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항공 산업의 허브가 된 툴루즈

by 골목길 경제학자

툴루즈와 에어버스


미국 항공기 회사를 압도한 에어버스 프랑스의 에어버스는 1000억 달러 규모의 기업으로 전 세계 상업용 항 공기 시장을 지배한다. 2007년 이후 미국의 항공기 업체 보잉과의 경쟁에서 역전승을 거두더니, 2011년에는 세계 항공기 시장의 65퍼센트를 차지할 만큼 압도했다. 민간 항공기 시장의 패권을 다투는 미국과 유럽의 경쟁은 1970년 에어버스의 설립으로 시작됐다. 유럽 국가들은 세계의 항공우주 산업을 장악하고 있는 미국의 독주를 막기 위해 에어버스를 설립했다. 참여국의 이해 대립을 극복하고 각국의 책임과 역할을 명확히 하기 위해 에어버스는 컨소시엄을 운영체계로 선택했다.



에어버스 컨소시엄의 착수는 유럽의 자존심을 건 사업이었다. 당시 유럽의 항공 산업은 미국의 경쟁 상대가 되지 않았다. 유럽 국가 간의 차이도 컸다. 전후 유럽 국가의 항공 산업은 전승국과 패전국 지위에 따라 상황이 달랐다. 영국과 프랑스는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으로서 나름대로 견실한 항공우주 산업을 개발했다. 전략적이며 부가가치가 높고 다양한 기술이 요구되는 전투기, 대형 여객기, 로켓 등을 계속해 생산함으로써 미국 다음 가는 항공기 생산국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패전국인 독일과 이탈리아는 전후 20년간 전략 물자 생산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항공기 개발보다는 부품 산업과 레저 및 스포츠용 경비행기를 주로 생산했다. 이런 이유로 에어버스 초기에는 연구 개발 분야에서 다른 나라보다 앞섰던 프랑스가 컨소시엄을 주도했다. 프랑스가 유리한 입장이었기 때문에 에어버스 본사도 툴루즈에 유치할 수 있었다.


초기에는 여러모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1965년 컨소시엄 설립이 가시화됐을 때부터 대두한 국가 간 주도권 싸움은 에어버스 설립 이후에도 수년 동안 계속되었다. 경영 구조의 불안, 선발 미국 항공기 제작사 보잉과 맥도널드더글러스의 시장 장악력으로 에어버스는 1970년대에 막대한 적자를 기록했다.


1970년대 초 에어버스는 최초로 프랑스에 항공기 한 대를 판매한 이후 유럽 주요 항공사로부터 단 한 건의 주문도 받지 못해 경영난이 심각했다. 1977년과 1978년에 이르러서야 이집트 항공과 이스턴 항공으로부터 A300을 겨우 수주받았다. 어려운 시기에 에어버스가 버틸 수 있었던 유일한 힘은 참여 정부들이 지원한 막대한 보조금이었다.


이토록 초라했던 에어버스가 성공 가도로 돌아선 것은 1980년대다. 1970년대 말 A300, A310 등 보급형 기종을 출시해 그 가능성을 인정받은 에어버스는 1980년대 중반 A320을 성공적으로 출시한 후 세계적인 항공기 제작사로 도약하기 시작했다. A320은 축적된 유럽 각국의 첨단 기술을 항공기에 도입할 수 있는 에어버스 특유의 컨소시엄 체제를 십분 활용한 모델이다. 동급 경쟁 모델보다 객실 폭이 넓고 경제성, 속도, 운항 거리 등 기술적으로도 앞섰던 A320은 항공기 시장에서 가장 경쟁이 치열한 150석 급에서 탁월한 판매량을 올렸다. 이를 계기로 에어버스는 보잉, 맥도널드더글러스와 견줄 만한 위치로 올라갔다.


A320의 성공을 발판으로 에어버스는 2000년대 A380 개발에 착수했고, 2005년 4월 27일 첫 비행을 무사히 마쳤다. A380이 출시되기 전 세계의 대형 여객기 시장을 독점한 것은 보잉 747이었다. A380 출시로 에어버스는 명실공히 세계 최대, 최고급의 여객기를 생산하는 회사가 되었으며 동시에 대형 여객기 시장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 경제학을 배운 나는 학교에서 에어버스를 나쁜 회사로 배웠다. 교수님들은 정부가 보조금과 규제로 시장 질서를 왜곡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에어버스를 소개했다. 그러나 꼭 경제학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에어버스는 미국에 골치 아픈 존재다. 에어버스만 없었다면 미국 이전 세계 항공기 시장을 독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에어버스 진출 후 미국 항공기 회사는 경영이 어려워졌다. 1970년대 미국에서 민간 항 공기를 제작한 두 회사 중의 하나인 맥도널드더글러스는 경영난을 이기지 못해 1997년 결국 보잉에 합병되었다. 현재 미국에서 항공기를 제작하는 유일한 회사는 보잉이다.


주변에서 에어버스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이다 보니 나도 처음에는 에어버스 항공기에 탑승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A320이 보편화되면서 자연스럽게 에어버스 항공기를 많이 타기 시작했다. A320를 경험해 보니 솔직히 보잉의 미래가 걱정스러웠다. 아무리 정부 보조금을 받지 않는다는 보잉 편을 들려고 해도 승객으로선 에어버스 항공기가 더 끌렸다. 좌석 공간도 더 넓고, 무엇보다 비행기 내부를 간결하고 깔끔한 유럽 스타일로 디자인해 깊은 인상을 남겼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에어버스가 보잉을 추월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는지도 모른다. 유럽이 자동차, 선박 등 스타일과 디자인이 중요한 운송기기 분야에서 미국을 앞섰는데, 민간 항공기만 예외로 남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언제부터인가 에어버스 항공기는 BMW, 메르세데스 벤츠 등과 같이 세련된 유럽 자동차처럼 느껴졌다면, 보잉 항공사는 묵직하고 개성이 강한 미국 자동차처럼 느껴졌다.


프랑스 남부 툴루즈에 있는 에어버스 본사를 찾아가는 여정은 에어 버스 항공기만큼 편하지는 않았다. 항공 산업이 군수 산업이라서 그런지, 에어버스는 위치 등 회사에 대한 정보를 자세히 공개하지 않는다. 본사 건물과 사업장이 툴루즈 곳곳에 분산되어 있는데 공개된 정보만으로는 어느 부서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없다. 큰길에서 회사 건물을 사진 찍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공식적인 회사 투어에는 참여할 수 있다. 내가 방문한 날에는 영어 투어가 없어 할 수 없이 불어 투어에 참여했다. 회사를 소개하는 비디오를 보고, 조정실 시뮬레이터에서 에어버스 툴루즈 본사 항공기 이착륙 과정을 체험해 보았다. 또 항공기를 제작하는 실제 과정 도 관망대에서 직접 내려다볼 수 있었다.


툴루즈가 프랑스 항공 산업의 허브가 된 까닭은?

공장을 포함한 에어버스 관련 시설은 툴루즈 북서쪽에 있는 블라냑(Blagnac)과 보젤르(Beauzelle), 두 도시에 흩어져 있다. 생산된 항공기를 배달하고 시험 비행을 해야 하므로 툴루즈 공항이 에어버스 생산 공장과 연결되어 있다. 블라냑과 보젤르는 광활한 공단 지역이다. 많은 기업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아직 많다. 툴루즈 도심에서 에어버스 공장을 가려면 아레네 역에서 파란색 경전철을 타고 종착역인 아에로콩스텔라시옹(Aeroconstellation)에서 내리면 된다.


툴루즈는 프랑스 항공 산업의 허브다. 에어버스, 국립항공학교, 우주 공업연구소 외에도 많은 중소 항공기 제작사, 에어버스 협력 업체 등이 모여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툴루즈는 컴퓨터, 전자, 생명공학 등과 관련 한 첨단산업 기업의 유럽 본부가 모여 있다.


툴루즈의 첨단기술을 적절히 이용하는 대표적 외국 기업은 모토로라다. 모토로라는 연구 시설을 미국 본토 내에 둔다는 오랜 원칙을 깨고 1990년대 중반 툴루즈에 첫 해외 연구센터를 지었다. 국내 연구에서 봉착한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유럽의 고급 기술을 쉽게 접할 수 있는 툴루즈를 대안으로 선택한 것이다. 그런데 프랑스의 항공 산업은 왜 툴루즈에 모이게 됐을까? 항공 산업 유치를 위한 도시의 입지 조건이 나쁜 것 은 아니다. 이 도시는 우선 프랑스의 대표적인 대학 도시다. 학생 수로만 보면 리옹과 파리에 이어 프랑스에서 3번째로 대학생이 많은 도시다. 에어버스를 포함한 툴루즈 기업은 같은 도시에 소재한 대학 연구소와 협력하여 항공우주 산업의 발전에 필요한 연구와 개발을 수행한다.

그럼에도 툴루즈 선택에 대한 궁금증이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는다. 프랑스에 이 도시만큼 입지 조건이 좋은 다른 도시들도 많은데 왜 남부 도시 툴루즈를 선택한 걸까? 에어버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니,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에어버스가 출범하기 전 프랑스 정부는 1957년 프랑스 남부의 항공기 제작 기업들을 통합해 툴루즈에 쉬드아비아시옹(Sud Aviation)을 세웠다. 프랑스 기업에 재직 중인 지인 줄리앙은 독일 공습을 피하려는 전략으로 일부러 독일에서 멀리 떨어진 프랑스 남부에 항공산업 시설들을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군사적 목적을 위해서 세운 쉬드아비아시옹은 노드아비아시옹(Nord Aviation)과 합병하면서 아에로스파시알(Aérospatiale)이라는 국영 항공기 회사로 성장했다. 이 아에로스파시알이 영국과 독일의 국영 항공기 회사와 합작해서 지금의 에어버스 컨소시엄으로 발전했다. 에어버스와 툴루즈는 이처럼 군사적인 목적을 위해 인위적으로 맺어진 관계다.



교통 중심지로 부상한 툴루즈

정치경제학 관점에서 보면 프랑스는 우리나라와 상당히 비슷하다. 프랑스의 파리 집중도는 우리나라의 서울 의존도에 못지않다. 세계 10대 경 제 대국 중에서 중심도시의 경제 비중이 가장 높은 나라가 프랑스다. 컨설팅 업체 매켄지글로벌연구소(McKinsey Global Institute)에 따르면 2010년 파리의 기업이 프랑스 기업 전체 매출의 91퍼센트를 차지했다. 수도권 비중이 높다고 알려진 영국도 전체 기업 매출에서 런던 기업의 비중은 68퍼센트에 불과하다. 한국 대기업 본사가 서울에 몰려 있는 것처럼 프랑스의 거의 모든 대기업 본사가 파리에 있다.


시장, 인력, 자금 등의 입지 조건 때문일까? 파리가 기업에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혜택은 아마도 정책 결정 과정에 대한 접근성이다. 기업이 정책을 결정하는 도시에서 사업하는 현실은 정부가 국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크고 정부 의사 결정이 투명하지 않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프랑스는 국가주의가 강하고 관료의 권한이 크기로 유명한 나라다. 그리고 철저하게 엘리트주의를 실천한다. 고등학생 졸업생 중 극히 일부만 선발하는 고등교육기관 그랑제콜이 정계, 관계, 산업계, 언론계 등 프랑스 모든 분야의 지도자를 양성한다. 그랑제콜 출신 엘리트들이 파리에 살면서 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때문에 프랑스의 큰 기업은 파리를 떠날 수 없다.


프랑스는 항상 이렇게 중앙집권 국가였을까? 사실 프랑스도 다른 서 유럽국가와 같이 봉건주의 시대를 거쳤다. 17세기 태양왕으로 불리며 프랑스를 군림했던 루이 14세가 분권적인 프랑스를 지금의 중앙집권 국가로 뒤바꾸었다. 툴루즈의 미디 운하를 보면 루이 14세가 분명 보통사람은 아니다. 미디 운하는 루이 14세 재임 기간에 건설되었다. 산업혁명이 시작하기도 전인 17세기에 태양왕은 대서양과 지중해를 연결하는 운하를 건설하도록 명령한 것이다.


설립 책임자 피에르 폴 리케(Pierre-Paul Riquet)는 수문, 수로, 다리, 터널 등 328개의 구조물로 툴루즈와 지중해 연안을 연결하는 총길이 360 킬로미터의 대운하를 28년(1667~1694년) 만에 완성했다. 대서양 항구도시 보르도로 향하는 미디 운하와 대서양으로 뻗은 가론 운하가 만나는 분기점이 바로 툴루즈다.


미디 운하가 개통되자 툴루즈는 프랑스 남부의 중요한 교통 중심지가 됐다. 동시에 프랑스 남부 전역은 주요 농산물과 와인 생산지로 새롭게 부상했다. 19세기에 개통된 철도가 운하를 대체하기 시작하면서 미디 운하는 한때 쇠락의 길을 걸었지만,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면서 예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부를 창출하고 있다. 툴루즈의 중요한 관광자원이 된 미디 운하는 크루즈와 산책로를 즐기기 위한 수많은 관광객이 가득한 관광 명소다.


최고 수학자 페르마로 대표되는 과학 전통

앞서 살펴보았듯 국제 정치적인 상황과 지리적 이점들 덕분에 툴루즈는 프랑스 항공 산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항공 산업이 들어오기 전의 툴루즈는 어떤 도시였을까? 툴루즈는 13세기에 이미 대학을 설립할 정도로 교육이 발달한 도시였다.


툴루즈의 과학 전통을 대표하는 인물은 17세기 최고의 수학자라고 불리는 피에르 드 페르마(Pierre de Fermat)다. 툴루즈에서 태어난 페르마는 성년이 된 후 사망할 때까지 지역 법원의 법관으로 일했다. 직업이 판사 인 페르마가 어떻게 세계적인 수학자로 알려졌을까? 페르마는 공식 수학 교육을 받지 않은 아마추어 수학자였다. 일설에 의하면 일반인과의 교류가 금지된 직업을 가진 페르마가 무료함과 고독을 이기기 위해 수학에 빠졌다고 한다. 당시 프랑스의 판사들은 공정한 재판을 위해 일반인과 자유롭게 교제하지 못했다고 한다.


취미로 시작한 수학이 본업보다도 더 페르마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페르마는 자신을 아마추어라고 생각해 생전에 수학 논문을 한 편도 발표하지 않았다. 현재 남은 페르마의 기록은 메모와 편지뿐이다. 이 기록을 통해 페르마는 자연수 이론과 확률론 확립에 크게 기여했다.

우리 같은 일반인에게 페르마라는 이름이 익숙한 이유는 1993년 영원히 풀지 못할 것으로 예상했던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프린스턴 대 학의 앤드루 와일스(Andrew John Wiles) 교수가 증명했기 때문이다. 이 소식을 국내외 언론이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와일스 교수의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1차 증명에서 발견된 결함을 보완하기 위해 다시 연구를 시작했고 1995년 새로운 증명을 발표했다. 1차 증명과 반증, 그리고 이어진 재증명 과정을 통해 와일스 교수는 대중적 명성을 얻었다.


페르마의 생가는 툴루즈에서 자동차로 1시간 거리인 보몽드로마뉴(Beaumont-de-Lomagne)에 있다. 보몽드로마뉴 시는 페르마 생가를 박물관, 도서관, 관광 안내소로 사용하고 있으며 시청 건너편에는 페르마 동상도 세웠다. 툴루즈 시내에도 페르마를 기념하는 장소가 있다. 대표적인 장소가 페르마의 이름을 딴 고등학교다. 프랑스 최고 명문 고등학교 중 하나인 페르마 고등학교는 툴루즈의 유명한 관광지 중 하나인 자코뱅 교회와 이웃해 있다.


최고 수학자 페르마로 대표되는 과학 전통

툴루즈는 샘이 날 정도로 많은 옛 건물을 간직한 도시로, 마치 도시 전체가 박물관 같다. 해가 지는 저녁에는 툴루즈의 붉은 벽돌집들이 석양을 반사해 도시 전체가 장미 정원처럼 반짝인다. 이 장관을 보다 보면, 툴루즈가 장미의 도시라고 불리는 이유를 단번에 이해할 수 있다. 툴루즈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큰 피해를 보지 않은 덕분에 중세 건물을 많이 보전했다. 유럽의 산업 중심지에서 먼 툴루즈의 지리가 또다시 이점으로 작용한 셈이다.


원래 툴루즈는 로마 도시로 시작했다. B.C. 2세기말 로마는 현재의 툴루즈 지역을 정복하여 톨로사(Tolosa)의 시가지를 건설했다. 250년경 순교자 세르냉이 기독교를 전파한 후 툴루즈는 유럽 종교 분쟁의 역사에 자주 등장한다. 6세기 이후 아키텐(Acquitaine) 왕국의 수도로서 스페인의 이슬람교에 대항했으며, 9세기에 백작령(County of Toulouse)으로 전환한 후 400년 동안은 종교재판과 십자군 개입을 통해 남프랑스 이단 운동을 박해했다. 툴루즈가 왕령으로 프랑스에 완전히 합병된 때는 1271년이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미국 소설가 헨리 제임스가 19세기말에 쓴 툴루즈 기행기에서 유일하게 격찬한 역사 유적이 생세르냉(Saint-Sernin) 대성당이다. 11세기 초 세르냉 주교의 유해를 모신 로마 시대 집회장이 있던 장소에 건설된 생세르냉 대성당은 현재 유럽에서 가장 규모가 큰 로마네스크 양식 성당이다. 유네스코는 1998년에 생세르냉 대성당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생세르냉 대성당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거대한 규모에 놀란다. 길이 115미터, 너비 21미터, 높이 64미터에 달하는 초대형 건축물이 왜 툴루즈에 필요했을까?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생세르냉 성당은 스페인 서북 부의 성지인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로 향하는 수많은 순례자가 방문하는 성당 중 하나다. 순례하는 많은 군중을 수용하기 위해 큰 건물이 필요했다.


지금은 지극히 아름답게만 보이는 툴루즈의 성당과 광장에서 수많은 사람이 종교 분쟁으로 희생됐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세르냉 주교 자신도 이교도에 의해 황소에 발이 묶인 채 끌려다니다 죽었다고 한다. 시청 광장에서 이어지는 황소 거리 뤼뒤토르(Rue du Taur)에서 벌어진 일이다. 툴루즈가 프랑스에 합병된 후에도 종교 박해는 계속됐다. 툴루즈의 종교재판과 이교도 처형식은 18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잠잠해졌다. 프랑스와 툴루즈에 종교의 자유가 정착하게 된 계기는 1762년 장 칼라스(Jean Calas) 사건이다. 칼라스는 툴루즈의 부유한 섬유 상인이었는데, 문제는 그의 종교였다. 천주교가 지배한 툴루즈에서 칼라스는 개신교인 위그노(Huguenot) 신도였다. 위그노는 종교 개혁기부터 프랑스혁명에 이르는 시기에 활발했던 프랑스 프로테스탄트 칼뱅파를 말한다.


1761년 어느 날 칼라스의 장남이 아버지의 가게에서 목매 죽은 채 발견됐다. 칼라스가 아들의 천주교 개종을 저지하기 위해 죽였다는 소문이 돌았고 흥분한 반위그노파들은 칼라스의 처벌을 요구했다. 천주교인으로 구성된 툴루즈 법원은 1762년 3월 9일 칼라스에 사형을 선고했다. 그다음 날 칼라스는 광장에서 거열형으로 잔인하게 처형당했다.


당시 제네바에 망명 중이던 프랑스 철학자 볼테르는 칼라스 재판의 부당성을 전 유럽에 알리고 재심을 요구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볼테르의 노력으로 50명의 판사로 구성된 위원회가 결성됐고, 그 결과 1765년 열린 상고심에서 법원은 원심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했다. 또한 정부가 칼라스 가족에게 배상금을 지급할 것을 명령했다. 칼라스 사건의 재심을 계기로 프랑스는 1780년대에 형사법과 종교법을 개혁했다.


종교 전쟁이 사라진 툴루즈는 평화를 되찾았을까? 내 경험에 의하면 완전히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툴루즈에 도착한 나는 공항버스를 타고 윌슨 광장에 있는 호텔을 찾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만 내려야 할 정거장을 놓쳐 다음 정거장에서 호텔까지 걸어갔다. 버스 운전사에게 들은 말로는 정거장과 호텔의 거리는 1킬로미터 정도로 가까운 편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툴루즈 도심이 스트라스부르(Stras bourg) 거리를 경계로 두 지역으로 나뉜다는 사실을 몰랐다. 내가 내린 동쪽 지역은 북아프리카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하는 일 없이 거리에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이민자 젊은이들을 지나치면서 이곳이 안전한 지역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급해지며 호텔에 일찍 도착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툴루즈 공항에서도 예사롭지 않은 일을 겪었다. 평화로운 도시로 알 고 있던 툴루즈건만 공항에는 자동소총을 맨 무장경찰이 순찰을 돌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툴루즈는 이민자를 둘러싼 갈등이 심한 도시였다. 최근 툴루즈에서 이민자 문제가 주목받는 이유는 2012년 3월에 발생한 연쇄 살인 사건 때문이다. 이 사건으로 많은 북아프리카 이민자와 유대 인들이 희생됐다. 나중에 검거된 범인은 북아프리카 이민자였으나, 진짜 범인이 밝혀지기 이전까지 언론은 인종 차별주의자의 소행일 것이라고 강하게 의심했다. 거의 2000년 전에 시작된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전쟁이 오늘날 원주민과 이민자의 갈등으로 재연되고 있는 듯하다.



두 도시 이야기

이민자 갈등만 보더라도 툴루즈는 한 도시가 아니다. 다른 프랑스 대도시와 마찬가지로 툴루즈의 주민과 이민자는 같이 살지 않는다. 그러나 툴루즈를 둘로 나누는 것은 인종과 종교만이 아니다. 가론 강을 사이에 두고 에어버스 주변 지역과 기타 툴루즈 지역이 신도시와 구도시로 나뉜다.


가론 강 동쪽에 있는 툴루즈는 우리가 기대하는 전형적인 프랑스 남부 도시다. 툴루즈 시내 어디를 가도 프랑스 남부 도시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 노보텔 호텔 앞에 있는 윌슨 광장에서도 카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을 구경하면서 프랑스 남부 지역의 기후와 분위기를 즐길 수 있었다. 반면 가론 강 왼쪽의 툴루즈는 항공 산업 도시다. 툴루즈 공항과 에어버스 공장을 중심으로 새로 조성된 신도시다. 외관상 신도시는 프랑스 남부가 아닌 미국 캘리포니아 또는 한국의 신도시에 가깝다.


분단된 도시라는 점에서 툴루즈는 나로 하여금 우리나라의 포항을 연상케 했다. 서울대학 전상인 교수는 《청암 박태준 연구 총서》에서 지 역사회를 위한 포스코의 선구자적인 기여가 있었음에도 포스코와 비 포스코 지역의 경계를 극복하지 못한 도시로 포항을 표현했다. 포스코가 있는 형산강 이남과 구도심이 위치한 형산강 이북은 완전히 다른 도시라고 한다. 포스코 지역인 지곡동에서 자란 내 친구는 어릴 적 자신과 구도심 아이를 ‘지곡 아이’와 ‘시내 아이’로 구분했다고 한다. 포항이 이 처럼 물리적, 정서적으로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구도심에 사는 포항 사 람은 포스코를 진정한 지역 기업으로 생각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에어버스를 툴루즈 기업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처음부터 에어버스는 툴루즈에 주어진 기업이지 툴루즈 주민이 창업해서 키운 기업이 아니다. 또한 공기업이기 때문에 지역 정체성이 강하지 않다. 더군다나 한 나라가 아닌 유럽 국가들이 컨소시엄으로 설립한 유럽 정부의 공기업이다. 애초에 유럽 전체를 위해 설립된 에어버스에 툴루즈의 정체 성을 기대한 것이 무리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에어버스 임원들은 툴루즈보다 파리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에어버스를 진정한 의미의 툴루즈 기업으로 만드는 것은 궁극적으로 툴루즈의 몫이다. 툴루즈 지도자들이 자신의 도시를 미래 인재가 살 고 싶은 매력적인 도시로 만들어야 그들을 지역에 유치할 수 있을 것이다. 내게 매력적인 도시는 차별적 라이프스타일을 가진 곳이다. 툴루즈에 차별적 라이프스타일이 있는가? 역사를 간직한 아름다운 건물과 거리, 남부 지역 특유의 기후와 태양, 비옥한 토지가 만드는 음식과 와인 등이 우리가 한눈에 살필 수 있는 툴루즈 라이프스타일이다.


한 관광 안내서는 남부 도시 툴루즈의 매력을 이렇게 표현한다. “대서양과 지중해의 중간에 있는 툴루즈는 프랑스 남서부 지역의 요충지에 있는 미디 피레네 지역의 수도로, 특히 여유로운 생활 방식으로 유명한 도시이다. 한가롭게 도시를 둘러보며 쇼핑을 즐기고 전통 시장을 방문해 보고 카페의 테라스에 앉아 커피를 한잔 하면, 진정한 툴루즈의 매력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남부 특유의 매력은 진실함으로 함께 나누는 데 의미가 있다.”


기후, 역사, 토지, 여유가 툴루즈 고유의 라이프스타일을 만든다. 툴루즈에 아쉬운 점이 있다면 도시를 대표할 만한 현대 문화가 뚜렷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앞으로 툴루즈가 독특한 현대적 문화를 개발한다면 프랑스 중심도시 파리에 견줄 만한 차별적 라이프스타일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에어버스도 나름대로 툴루즈를 위해 할 일이 많다. 지역사회 발전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에어버스가 기업과 도시의 통합을 위해 더욱 노력할 것으로 기대한다. 툴루즈와 에어버스에 대한 이런 희망을 안고, 나는 툴 루즈를 떠나는 비행길에 올랐다.


출처: 작은 도시 큰 기업,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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