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을 대표하는 기업은 대부분 영국 경제의 중심도시인 런던에 본사가 있다. 영국 40대 기업 중 본사를 다른 지역에 둔 기업은 관광 크루즈 회사인 카니발뿐이다. 하지만 영국 최강의 명문 축구 클럽은 런던이 아닌 맨체스터에 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이하 맨유)는 미국 경제 전문지《포브스》가 해마다 선정하는 세계 최고의 스포츠구단 순위에서 1, 2위를 다툰다. 또한 2011~2012년 시즌에 3억 2000만 파운드(약 5400억 원)에 이르는 매출을 올렸다. 맨유의 매출 반 이상은 광고 수입이다. 전 세계 6억 5000만 명의 팬을 확보한 맨유는 미국계 보험회사 에이온, 나이키, GM, 아우디 등을 비롯해 후원 기업만 36개에 이른다. 비록 퍼거슨 감독의 은퇴 이후에 주가가 하락하고 있으나 맨유의 가치와 지위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
맨유 축구의 성공 비밀은 무엇일까? 바로 맨유 비즈니스에 있다. 코치의 능력만으로는 맨유를 설명할 수 없다. 《맨유에게 배워라》의 저자 노현식, 이정선은 “맨유가 뛰어난 기량을 자랑하는 세계적인 스타들을 최고의 팀워크로 한데 묶는 밑바탕은 바로 합리적인 성과 평가 시스템과 그에 따른 보상에 있다”라고 주장한다. 적극 새로운 수익원을 찾고 합리적인 성과 시스템을 구축하며, 유소년팀 출신 선수를 발탁한 것이 맨유의 성공을 이끌었다.
맨유가 홈경기를 하는 올드트래퍼드(Old Trafford)는 도심에서 택시로 10분이면 갈 수 있을 만큼 가깝다. 그래서 올드트래퍼드는 도시 문화의 구심점 역할을 한다. 맨체스터 시민에게 이곳은 단순한 축구 경기장이 아닌 문화 공간이자 테마파크다. 경기가 열리지 않는 날에도 올드트래퍼드가 제공하는 투어 프로그램에 참가하거나 경기장 동쪽에 자리한 메가스토어(Mega Store)를 찾는 방문객이 하루 만여 명에 이른다.
10세 이하의 어린이들이 일단 선호 팀을 정하면 평생 다른 팀을 지지하지 않기 때문에, 맨유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마케팅에 많은 노력을 쏟는다. 어린이 전용 마스코트 ‘프레드 더 레드(Fred the Red)’를 만들고, 지역 내 초등학교에 ‘지역사회의 맨유 축구’ 프로그램을 운영함으로써 어린이와의 만남과 교류를 늘리고 있다. 경기장의 일부 구역을 가족석으로 전환하여 어린이와 그 가족들이 맨유 축구를 통해 하나가 되도록 유도하기도 한다.
올드트래퍼드에 있는 맨유박물관에 잠시 들렀다. 1878년 창단 이래 137년의 구단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공간이다. 맨유의 전신은 1878년 랭 커셔와 요크셔 철도 노동자들이 만든 뉴턴 히스 FCNewton Heath Football Club이다. 뉴턴 히스는 1902년 맨체스터로 연고지를 옮기며 맨유로 이름을 바꿨고 이때부터 맨유의 성공 신화가 시작됐다.
맨유는 1905~1906년 시즌에 1부 리그로 진출, 1908년에 클럽 역 사상 최초로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1909년에는 처음으로 FA컵을 품에 안았다. 전설의 명문 구단을 이끈 이면에는 최고의 명 감독이 있었다. 1945년 리버풀 FC(Liverpool Football Club)에서 맨유로 이적한 맷 버즈비(Sir Matt Busby) 감독은 맨유의 새로운 전성시대를 열었다. 부임 후 얼마 지 나지 않은 1947~1949년 동안 3년 연속 리그 2위를 한 데 이어, 1948년 에는 FA컵에서 우승했다. 1969년 은퇴 이전까지, 버즈비 감독 지휘의 맨 유는 통산 리그 우승 5회, FA컵 우승 2회,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 1회 등 우수한 성적을 거두며 명문 축구 클럽으로 발돋움했다.
1968년 유럽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 우승은, 많은 맨유 선수의 생명을 앗아갔던 뮌헨 비행기 참사가 일어났던 1958년 이후 10년 만에 거둔 성과다. 맨유의 재기를 확실히 공표한 것이기에 더욱 의미 있다. 많은 전문가는 이 시절에 맨유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선수 선발, 선수 이적, 훈련 방식 등 팀 운영 전반에 대한 버즈비 감독의 절대적인 권한 덕분이라고 설명한다. 버즈비 감독은 축구 클럽의 청소년 프로그램을 통해 육성한 선수, 일명 ‘버즈비의 아이들(Busby Babes)’을 중심으로 선수진을 구성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1956년 리그 우승팀의 평균 나이는 22세에 불과했다.
1969년 버즈비 감독의 퇴임 이후 맨유는 쇠락하기 시작하여 오랫동안 부진을 면치 못했다. 심지어 1974년에는 2부 리그로 강등되는 굴욕마저 겪었던 맨유는 1986년 알렉스 퍼거슨(Alexander Ferguson) 감독의 취임으로 새로운 전성기를 맞았다. 영국 프리미어리그 출범 이후 21년 동안 무려 13회나 우승하며 정상을 지킨 것은 모두 퍼거슨 덕분이다. 영 국 프리미어리그 체제 전인 풋볼리그 시절을 포함해 2013년 은퇴하기 전까지, 그는 26년의 재임 기간에 영국 프리미어리그 13회, 챔피언십리그 1회, FA컵 5회, 유럽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 2회, 국제축구연맹(FIFA) 월드컵 1회 등 기록적인 우승 기록을 세웠다. 1998~1999년에는 트레블(대륙별 축구협회 내에 국가별로 존재하는 프로축구 리그에서 한 팀이 자국 정규 리그, 자국 FA컵, 대륙 간 대항전 3종의 대회를 한 시즌에 모두 우승하는 것)을 이룬 공로로 기사 작위를 받기도 했다. 1990년대 중반에는 팬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존 선수 대신 데이비드 베컴, 폴 스콜스, 게리 네빌 같은 유소년팀 선수들을 발탁했다. 알다시피 이들은 2000년대 맨유 전성기의 주축이 되었다.
올드트래퍼드 방문에서 맨유 문화 두 가지를 배웠다. 첫 번째는 맨유 구성원이 하나로 뭉칠 수 있었던 비결인 역사 인식이다. 축구장 동쪽 스 탠드에 시계가 하나 걸려 있다. ‘1958년 2월 6일’과 ‘뮌헨’이라는 두 단어가 새겨진 시계는 3시 4분에 멈춰 있다. 맨유 역사상 가장 암울한 날이라고 불리는 뮌헨 참사가 일어난 날과 시간이다. 유러피언컵 준결승행을 확정하고 귀국하던 맨유 선수단을 태운 비행기가 뮌헨에서 연료 공급을 받고 이륙하던 도중, 이륙에 실패하면서 공항의 경계벽과 충돌했다. 선수 8명을 포함한 총 15명의 맨유 구단원이 사망했다. 뮌헨 참사 50주년 행사에서 맨유는 “우리들의 시계는 3시 4분에 멈춰 있다”라는 표현으로 죽은 자를 기억했다.
올드트래퍼드에서 알게 된 또 하나의 맨유 문화는 감독 영웅주의다. 올드트래퍼드 입구에는 맷 버즈비 감독과 퍼거슨 감독의 동상이 나란히 놓여 있다. 맨유는 2011년 퍼거슨 감독의 감독 취임 25주년을 기념해 올드트래퍼드북쪽 스탠드의 이름을 ‘알렉스 퍼거슨 경 스탠드(Sir Alex Ferguson Stand)’로 변경했는데, 경기장 내부 스탠드에 이름을 올린 사람은 퍼거슨 감독이 유일하다. 방문객 투어 프로그램에도 퍼거슨은 빠지지 않는다. 경기 후 맨유 감독이 기자 회견을 하는 용도로 쓰는 방에 들어가 보니, 거기에 퍼거슨 감독이 앉아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 그가 무슨 일로 스타디움에 왔는지 궁금해졌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내가 본 퍼거슨은 소름 끼칠 정도로 실물과 똑같은, 마담투소박물관(세계적으로 유명한 밀랍인형 박물관)에서나 볼 법한 퍼거슨 ‘인형’이었다.
맨유는 왜 수많은 축구 스타를 제쳐놓고 감독을 영웅시하는 걸까? 우리나라는 정반대다. 우리는 감독보다 선수를 더 영웅으로 여긴다. 히딩크 감독이 유일한 예외인 것 같다. 히딩크 말고 존경받는 감독이 누구인지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다. 나아가서 우리나라에서 존경받는 지도자는 누가 있는가 하는 의문도 들었다. 어쩐지 씁쓸했다. 우리나라의 모 든 지도자는 존경받지 못한다는 점에서 축구 감독의 처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유난히 지도자, 특히 살아 있는 지도자를 존경하는 일에 인색하다.
감독 우상화는 맨유의 보상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잘하는 선수를 확실하게 보상하는 맨유가 능력 있는 감독을 영웅 대우로 보답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의문이 남았다. 감독 우상화는 영국의 합리적인 사회에서 기인한 걸까, 아니면 뿌리 깊은 신분 사회에 서 기인한 걸까? 평등주의 정서가 강한 한국 사회에서는 감독을 귀족으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다. 아무리 능력이 있는 사 람도 결점이 있는 법. 조그만 결점으로도 상대를 깎아내리고 무시하는 분위기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성과를 이룬 사람은 그 성과만으로 존경받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기를 기대해 본다.
맨유는 맨체스터 시민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고 지역 경제의 구심점 역할을 한다. 맨유가 고용한 상근직 인력은 500여 명에 불과하지만 경기가 있는 날이면 3000명을 추가로 고용한다. 무엇보다도 맨유는 맨체스터의 국제적인 이미지와 브랜드 가치를 높여 관광 산업 발전에 기여한다. 홈구장, 훈련장, 유소년 축구 시설을 지역민에게 개방하고 지역의 체육 발전을 위해 맨체스터 청소년을 유소년 축구단에 적극 기용한다.
맨유가 맨체스터에 기여하는 만큼 맨체스터도 맨유 발전에 기여한다. 맨체스터와 맨유는 서로 분리할 수 없을 만큼 서로에게 중요한 존재다. 맨유 정신의 뿌리인 맨체스터는 산업혁명을 시작하고 이끈 노동자의 도시이자 산업의 도시이다. 노동자 문화가 맨체스터 정신을 정의한 다. 공산주의 사상이 탄생한 곳도 맨체스터다. 카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는 오랫동안 맨체스터에서 활동했으며,《공산당 선언》을 함께 작성한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를 처음 만난 곳도 맨체스터에 있는 체담도서관(Chetham’s Library)이었다.
노동자 문화는 고난과 싸워 이긴 노동자의 용기와 의지를 높이 평가 한다. 노동자는 산업혁명 과정에서 큰 희생을 감수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는《영국 기행》의 맨체스터 편에서 맨체스터 노동자를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는 산업 문명의 얼굴을 본다. 그것은 인간적인 부드러움과 애정이 사라진 험상궂고 무자비하고 비정한 얼굴이다. 몰풍경한 거리를 바쁘게 오가는 무수한 사람을 바라보며 나는 깊은 고뇌에 휩싸였다. 내가 지금 끔찍한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아니, 인류가 단체로 악몽을 꾸면서 파멸해가고 있는 건가? 저들은 왜 저리도 서두르나? 사람들의 삶이 왜 이런 비인간화의 과정으로 가고 있는 것인가?”
맨체스터의 노동자 의식은 철도 노동운동을 통해 더욱 공고해졌다. 1830년 리버풀과 맨체스터 간 철도가 개통되면서 맨체스터는 영국 철도 산업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기근을 피해 영국으로 이주한 아일랜드 노동자들이 주로 철도 건설에 동원됐다. 혹독한 노동 환경 때문에 일반 영국 노동자들은 철도 공사장에서 일하지 않으려고 했다. 가난하고 갈 곳이 없었던 아일랜드 노동자들은 철도 공사장을 마다할 처지가 아니었다.
철도 노동자의 축구팀으로 시작한 구단이 맨유다. 역사적으로 보면 축구 자체가 노동자 스포츠로 시작됐다. 영국 축구 리그를 만든 12개 창립 클럽 중 5개 클럽이 공업 도시에서 시작했다. 지금도 영국 상류층 은 축구보다 크리켓과 럭비를 선호한다.
맨체스터는 아직도 노동자 정서가 강한 도시이다. 도시 주민의 36 퍼센트가 의료, 복지, 요식업 등 서비스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로, 다른 도시에 비해 노동자가 많다. 영국 서비스 산업 노동자 비율이 평균 19 퍼센트인 것을 보면 확실히 맨체스터의 노동자 비율은 높은 편이다. 저소 득 제조업 노동자 비중은 20 퍼센트로서, 역시 전국 평균인 15 퍼센트를 상회한다.
노동자 문화는 폭발적이고 열정적인 맨유 팬 문화를 만들었다. 한때 유럽 최대 규모였던 맨유의 훌리건은 악명이 높았는데, 그 때문에 올드 트래퍼드에는 영국 내 어떤 훌리건도 감히 원정을 가지 못했다. 맨유가 2부 리그로 강등당했던 1974년에 훌리건의 난동이 정점에 달했다. 맨유만큼이나 악명 높았던 2부 리그의 밀월 FC 훌리건들이 홈경기에 원정을 왔다가 맨체스터 역도 벗어나지 못한 채 되돌아간 일화는 축구팬들 사이에서 유명하다. 영국 정부의 지속적인 훌리건 퇴출 노력과 더불어 1990년대에 급격하게 축구의 상업화가 이뤄지면서, 이제 영국의 훌리건 문제도 옛말이 되어가고 있다. 티켓값이 폭등해 훌리건의 주범이었던 노동자 계층의 자리를 중상층이 대체했기 때문이다.
시내에서 노동자 주거 지역은 도시 개발과 함께 많이 사라졌다. 노동 자 전통이 강한 맨체스터의 시 정부는 영국 사회사와 노동운동의 기록을 전시한 인민역사박물관(People’s History Museum)을 설립했다. 박물관은 영국 민주주의 역사 교육을 위해 지어졌으며, 노동운동뿐만 아니라 페미니즘운동 등 다른 대중 운동의 역사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또한 영국 노동자의 투쟁 역사를 엿볼 수 있다. 영국 노동자들은 참정권과 노동자의 권리를 쟁취함으로써 영국 민주주의를 발전시켰다. 맨체스터는 1819년 대표적인 노동운동인 피털루(Peterloo) 사건이 일어난 곳으로도 유명하다. 노동자 5만여 명이 맨체스터 공업 지역을 대표할 사람을 자체적으로 뽑아 의회로 보내겠다며 도심 부근 성 피터 광장에 모이자, 정부가 이 모임을 과격하게 해산시켰다. 노동자와 경찰의 충돌을 워털루 전투에 빗대어 피털루라는 이름이 붙었다. 영국 정부는 노동자 집회와 출판 등을 제한하는 ‘결사 금지법’을 제정해 노동운동 주모자들을 탄압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사회주의자인 로버트 오언(Robert Owen)을 중심으로 한 노동조합 운동이 맨체스터를 시작으로 영국 전체에 급격히 확산했다.
맨체스터는 대중음악으로도 유명하다. 대중음악의 전성시대는 1980년대 후반이었다. 스톤 로지스, 해피 먼데이즈, 808 스테이트 등 클럽 하시엔 다(The Hacienda)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지역 밴드들이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하면서, 맨체스터 음악은 전 세계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당시 맨체스터 음악의 인기는 광적이었다. 이 음악을 듣기 위해 수많은 영국 젊은 이가 맨체스터를 찾았다. 일부는 아예 맨체스터에 살기 위해 맨체스터 대학으로 진학하거나 전학할 정도였다. 언론은 맨체스터에 몰린 젊은이들이 만든 음악, 패션, 심지어 약물 등 새로운 문화 트렌드를 ‘열광하는 (매드) 맨체스터’라는 의미를 담아 ‘매드체스터(Madchester)’라고 불렀다.
매드체스터 시대 이전에도 맨체스터는 음악의 중심지였다. 1970년 대 후반에는 조이 디비전, 어서튼 레이시오, 버즈콕스, 매거진, 더 폴 등의 맨체스터 펑크 밴드가 유명했고, 매드체스터 시대의 바로 직전인 1980년대 중반에는 뉴 오더, 더 스미스, 제임스 등 탈펑크(Post-punk) 밴드들이 많은 주목을 받았다. 현재도 돌픽, 에브리싱 에브리싱 등 지역 출신의 밴드들이 인기를 누리고 있다.
맨체스터 밴드는 전통적으로 반항아 성향이 강하다. 대부분 노동자 가정에서 가난하게 자란 음악가들은 기성 사회와 위계질서에 대한 분노를 음악으로 표출했다. 분노가 담긴 가사를 짤막한 리듬에 실어 간단한 악기로 빠르고 거칠게 부르는 것이 맨체스터 펑크 밴드 스타일이다.
2000년대 맨체스터가 기업 도시로 변신하면서 지역 음악의 성격도 바뀌고 있다. 정치성과 친노동자 성향이 과거보다 약해지고 있다. 일부에선 노동자 계층 출신의 음악가가 줄어감에 따라 맨체스터 음악의 급진성과 창의성도 사라지리라고 우려한다. 분노가 없는 음악가는 창의적인 음악을 만들지 못하는 걸까?
현재는 노던쿼터(Northern Quarter)가 대중음악의 중심이다. 도심 개발로 클럽들이 문을 닫자 밴드와 팬들이 노던쿼터의 클럽으로 옮겨갔다. 이제는 박물관에 보관된 하시엔다 클럽의 대문처럼, 장소를 옮겨갔어도 맨체스터 음악의 뿌리만은 잊히지 않길 바랄 뿐이다.
노던쿼터는 단지 음악으로만 유명한 지역은 아니다. 맨체스터의 대표적인 보헤미안 지역이다. 음악가뿐만 아니라 예술가, 작가 등 리처드 플로리다(창조 도시 이론가)가 창조 계급으로 부르는 사람들이 모여 산다. 보헤미안 지역답게 독특한 카페, 식당, 레코드 가게, 독립 상점 등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맨체스터는 영국 최초의 산업 도시로서 오랫동안 노동당을 지지한 진보적인 도시였으나, 1990년대 이후 적극적인 친기업 정책을 펼침으로써 새로운 도시 분위기를 형성했다. 새로운 맨체스터는 중심부의 재개발로 시작됐다. 1996년 북아일랜드의 독립을 지지하는 무장단체 IRA가 맨체스터 중심부인 카테드랄(Cathedral) 거리에 무려 1400킬로그램이 넘는 대 형 폭탄을 터트린 테러 사건이 발생했다. 다행히 이 사고로 죽은 사람은 없었지만, 폭발 주변의 건물들이 큰 피해를 보았다. 보수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된 몇 개의 건물은 철거됐다.
폭탄 피해로부터 도심을 재건하기 위해 시 정부는 11억 파운드(약 1조 9230억 원)의 예산을 투입해 도시 중 심의 모습을 바꿨다. 건물주가 개별적으로 건물을 보수하는 것보다는 시 정부가 중심이 되어 새로운 도시 개발 사업을 추진하는 모델을 선택했다. 재개발을 통해 도심의 거주 환경이 개선되자 부동산 개발 기업들 은 경쟁적으로 고급 아파트를 짓기 시작했다. IRA 폭탄이 폭발한 자리 에는 고급 백화점 하비니콜스가 들어섰다.
스포츠 마케팅도 맨체스터 부활에 크게 기여했다. 이스트맨체스터는 스포츠 마케팅 덕분에 새롭게 변신한 지역이다. 시 정부는 이스트맨 체스터 개발 전략으로 2002년 영연방경기대회(Commonwealth Games) 유치를 추진했다. 올림픽을 계기로 국내외 자본을 도입하여 대규모 도시 재 개발을 이끌어낸 스페인 바르셀로나가 맨체스터의 모델이었다. 이 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많은 체육 시설과 문화 인프라가 생겼고, 2002년 7월 이스트맨체스터의 밀레니엄 스타디움에서 영연방경기대회의 개막 식이 열렸다. 밀레니엄 스타디움은 현재 맨체스터시티 축구단의 홈구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맨체스터는 역사에서 창안한 도시 브랜드를 새로운 비즈니스 개발과 도시 발전 전략으로 적극 활용한다. 공식 도시 브랜드는 ‘독창적 근대 (Original Modern)’로서, 최초의 산업 도시였던 맨체스터의 역사를 강조한다. 면직과 섬유 산업의 도시였던 맨체스터는 19세기 이후에 사회 개혁과 정치로 노동자 권리와 복지에 힘씀으로써 산업 도시를 정의했다. 현재는 면직 도시의 전통을 살리는 한편 ‘독창적 근대’라는 슬로건 아래 새로운 문화, 지식, 비즈니스, 환경, 네트워크를 개발하기 위해 노력한다.
독창적 근대를 창안한 피터 새빌(Peter Saville)은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맨체스터 브랜드가 역사를 기초로 세워져야 한다고 느꼈다. 도시 역사의 핵심 내용은 맨체스터가 최초의 산업 도시라는 사실이 나의 ‘독창 적 근대’ 테마의 기초가 되었다. 나는 그저 맨체스터가 첫 산업 도시라 는 사실을 ‘독창적 근대’라는 단어로 재해석했을 뿐이다.”
독창적 근대는 다른 도시와 차별화된 맨체스터의 정체성을 잘 표현한다. 독창적 근대에 함축된 맨체스터 정신은 진보와 변화를 추구하는 끊임없는 에너지, 뭔가를 해야 한다는 행동 철학, 다른 곳과는 달라야 한다는 독립심이다. 시 정부는 슬로건에 걸맞게 모든 사업을 독창적이 고 근대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노력한다.
독창적 근대 개념을 상징하는 분야는 문화다. 많은 전문가가 맨체스터를 문화 중심의 도시 재생에 성공한 사례로 여긴다. 맨체스터는 많은 행사와 축제를 주최하는데 그중 주목할 만한 행사는 ‘인터내셔널 페스티벌’이다. 페스티벌을 통해 도시의 문화 프로필이 전 세계로 알려지면 서 맨체스터는 문화와 혁신 분야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인터내셔널 페스티벌은 미술, 음악, 영상 문화, 대중문화, 토론 대회, 요리 등 광범 위한 문화 행사를 진행한다. 섬유와 벽지의 역사를 전시한 휘트워스 아트갤러리(Whitworth Art Gallery), 그리고 존레이랜즈도서관(John Raylands Library)도 도시 문화유산을 체험할 수 있는 중요한 장소다.
인터내셔널 페스티벌의 성공에 힘입어 시 정부는 약 1100개의 미디 어 관련 기업을 유치하는 ‘미디어 시’를 건설한다. 이 사업이 성공하면 맨체스터는 디지털 분야의 세계적 기업을 위한 중요한 미디어 허브로 도약할 뿐만 아니라 영국의 창조 산업의 국제 경쟁력도 높일 것이다. 창조, 디지털, 뉴미디어 산업은 이미 맨체스터 경제의 5.5퍼센트를 차지하는 주요 산업이고 앞으로도 계속 성장할 것이다.
맨체스터의 스포츠 산업도 독창적 근대 산업이다. 시 정부는 2002년 영연방경기 등 6개 국제 스포츠 대회를 유치한 경험이 있다. 또 한 앞으로 더 많은 국제 대회를 유치하기 위해 4억 파운드(약 700억 원)에 달하는 예산을 지역의 문화 인프라를 개선하는 데 투자했다.
지금까지 내가 방문한 도시 중 맨체스터만큼 도시 브랜드에 과감하게 투자한 도시는 찾기 어려웠다. 이 도시는 브랜드 사업을 시작한 후 어 떤 이득을 얻었을까? 관광 산업에서 가장 큰 성과를 거두었다. 맨체스터는 2007년 이후 마케팅맨체스터(Marketing Manchester)와 비짓맨체스터(Visit Manchester) 등을 조직해 도시 브랜드를 내세운 관광 산업 활성화를 꾀했다. 그 결과 도시를 찾는 국내외 관광객 수는 2008년 4430만 명에서 2013년 5360만 명으로 크게 늘었다. 관광객 증가율로만 보면 도시 브랜 드 사업은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맨체스터의 독창적 근대를 체험하는 여정은 대표적인 산업 시대의 유산인 왕립 거래소 극장(Royal Exchange Theater)에서 시작해야 한다. 맨체 스터가 면직 산업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면을 거래하는 거래소도 여기에 서 처음 개장했다. 왕립 거래소 극장 바로 맞은편에는 IRA 폭탄 테러 장소에 건설된 하비니콜스 백화점이 있다. 산업 시대의 중심지였던 왕립 거래소 극장이 21세기에는 맨체스터 부흥의 중심지가 된 것이다.
1993년 맨체스터를 처음 방문했다. 그때 맨체스터는 어둡고 쌀쌀한 도 시로 느껴졌다.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구역을 지나갈 때는 영국이 정말로 쇠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20년 만에 다시 찾은 맨 체스터는 완전하게 다른 도시였다. 시 정부의 노력으로 말 그대로 창조 적이고 현대적인 유럽 도시로 변모했다.
맨체스터 시 정부는 과거와 달리 도시의 독자적인 정체성과 브랜드를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그 효과도 가시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나는 맨체스터를 관찰하면서 이 도시가 자신만의 라이프스타일을 더욱 명확하게 만들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한다고 느꼈다. 적어도 중심 가치와 소비문화에서는 런던과 분명하게 다른 점을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오히려 시 정부의 홍보와 달리, 이곳 사람들은 실제로는 런던에 동화된 삶을 산다는 인상을 받았다.
한번 생각해 보자. 시 정부가 도시 브랜드에 대해 고민하고 이를 개발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만큼 도시 정체성이 약하다는 의미가 아닐까? 많은 사람은 맨체스터의 도시 정체성이 약하다는 주 장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영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금방 구분할 정도로, 맨체스터 사람은 특유의 악센트와 직설적인 화법을 사용한다.
내 맨체스터 친구들은 마거릿 대처 총리 이후 영국 정부가 지역의 독립적 정체성을 장려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경제적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지역 균형보다는 투자 유치를 위한 지역 간 경쟁, 지역의 독립 기업보다는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가진 대기업의 경쟁력이 강조됐다. 이 말을 들으면서 영국도 양극화가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도 모든 문제가 30여 년 전 집권한 대처의 탓이라고 볼 수는 없다.
영국 전역에서 목격되는 지역성 약화의 원인은 무엇일까? 앞으로도 이 논란은 계속될 것이다. 맨체스터 라이프스타일의 현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시 정부의 미사여구와 실제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 내가 느낀 맨체스터의 현실이다. 도시 정체성이 부진해서인지 맨체스터는 아직 영국의 비즈니스 중심지로서 기능하지 못한다. 이 도시의 한계는 아직 영국을 대표할 만한 기업과 산업을 키우지 못한 데에 있다. 지역 기업 중에 우리가 알 만한 기업은 맨유가 유일하다.
나와 같은 대학에서 강의하는 영국인 교수 폴은 맨체스터의 대표적인 기업으로 영국 최대의 협동조합인 더코오퍼러디브그룹(The Cooperative Group)을 추천했다. 전통적으로 노동자 문화가 강하고 노동당을 지지한 맨체스터 시민은 대기업과 금융기관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지만 일반 시민이 회원으로 참여하는 협동조합에는 우호적이라고 한다. 이런 정서 때문에 맨체스터에 큰 주식회사는 없지만, 그 대신 큰 협동조합은 존재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마저도 가설에 불과하다. 현실의 더코 오퍼러디브그룹은 ‘큰 기업’이라고 보기 어렵다. 규모 면에서 영국 식료 품 가게 시장에서 5위권에 머무는 작은 기업이고, 회사 평판도 최근 그 룹 은행의 물의로 많이 실추됐다.
기업 부문의 부진은 도시 경제 전반에 악영향을 미친다. 최근 고용 자료에 의하면, 런던과 맨체스터의 경제적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런던은 계속 일자리를 확충하고 있지만 맨체스터는 런던뿐만 아니 라 다른 영국 도시와 비교해도 일자리 창출이 부진하다.
맨체스터가 런던과 경쟁할 수 있는 라이프스타일을 개발하는 작업 은 어쩌면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지금보다 조금 더 중심도 시와 달라지려고 노력하고, 그리고 그게 중요한 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실생활 속에서 맨체스터의 정체성과 독립심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도시 정체성 강화는 지역 맥주와 같은 지역 브랜드로 시작할 수도 있다. 뜻밖에도 맨체스터에는 도시를 대표하는 맥주가 없다. 오랫동안 지역 맥주로 자리 잡았던 보딩턴(Boddingtons)은 1989년 자국의 위트브레드에 인수된 데 이어 2000년에는 벨기에의 인베브에 넘어가서 더는 맨 체스터의 맥주가 아니다. 인베브는 2004년 맨체스터 공장을 폐쇄했다. 현재 맨체스터에서 팔리는 보딩턴 맥주는 다른 지역에서 생산된 맥주다.
보딩턴이 자신을 “맨체스터 크림(Cream of Manchester)”으로 홍보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보팅턴 맥주와 맨체스터를 동일시했다. 그러나 더는 이곳 사람들도 보딩턴을 자신의 맥주로 사랑하지 않는다. 올드트래퍼드에서도 보딩턴 맥주의 존재감은 약했다. 보팅턴은 맨유가 올드트래퍼드 매점에서 파는 많은 맥주 중의 하나일 뿐이다. 맨유의 공식 맥주 파트너 기업은 태국의 싱하(Singha)다.
지역 신문도 맨체스터 정체성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나는 새 도시에 가면 그 도시의 신문을 사는데, 맨체스터에는 지역 조간신문을 찾지 못했다. 오후에 《맨체스터 이브닝 뉴스(Manchester Evening News)》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떨어지는 석간신문이 맨체스터의 유일한 지역 신문이다.
참신하고 세련된 도시 기념품을 개발하는 것도 맨체스터 정체성 강 화를 위해 필요한 작업이다. 맨체스터는 도시 기념품을 찾기 어려울 정 도로, 도시를 대표하는 상품을 만들지 않는다. 물론 공항에는 도시 기념품을 파는 상점이 있다. 그러나 규모와 선택의 폭이 매우 빈약하다. 맨체스터 기념품은 상점에서 두 개의 진열장에 전시되어 있었다. 한 진열장은 맨유 기념품을 팔았다. 다른 진열장은 수건, 모자 등 맨체스터 이름과 영국 국기가 새겨진 물건을 팔았다. ‘맨체스터의 최고(Best of Manchester)’라는 진열장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이름 외에는 도시를 상징할 만한 디자인이나 아이디어를 찾을 수 없었다.
맨체스터는 분명히 다른 도시와 다르다. 산업혁명이 처음으로 시작한 역사와 맨체스터만의 음악을 만드는 대중문화, 산업혁명 이후 형성된 노동자 문화 등으로 맨체스터만의 색채가 확연히 드러난다. 맨체스터가 해야 할 일은 이런 문화 자원을 실생활의 라이프스타일로 전환하는 것이다. 맨체스터가 자신만의 라이프스타일로 현재 런던으로 몰리는 인재를 유인하면, 미래에 영국을 대표할 기업이 창업하는 도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