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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안의 능력과 책상 밖의 능력

by 골목길 경제학자

책상 안의 능력과 책상 밖의 능력

시험 사회를 넘어서는 새로운 가능성


한국만큼 AI의 가능성과 위협에 대해 극단적으로 반응하는 나라도 드물다. 챗GPT가 등장하자마자 "내 직업이 사라질 것"이라는 불안감이 사회 전체를 휩쓸었고, 동시에 "AI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는 과도한 기대도 팽배했다. 이런 양극단의 반응 뒤에는 우리 사회 특유의 능력관과 성공관이 자리 잡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기술 낯섦의 문제가 아니다. 정답을 빠르게 찾는 능력을 중심으로 인생의 경로가 결정되는 한국 사회의 구조가 그 뿌리에 있다.


시험 중심 사회가 만든 '책상 안' 중심의 능력관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객관식 시험, 수능, 각종 자격증 시험을 통해 인재를 선별해 왔다. 이런 평가 방식은 모두 '책상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이다. 펜과 종이, 또는 컴퓨터 화면 앞에서 문제를 푸는 능력, 즉 인지적 정보 처리 능력이 인간의 가치를 판단하는 거의 유일한 기준이 되었다.


그 결과 우리는 '책상 밖의' 중요한 능력들을 간과하게 되었다. 타인과 공감하는 능력, 예술적 감수성, 창조적 직관, 신체적 표현력, 환경 적응력, 오감의 지혜, 관계적 지능 같은 것들이다. 이런 능력들은 모두 몸과 마음이 함께 작용하고, 물리적 세계와 직접 상호작용하며, 감정과 의미가 개입되는 영역들이다.


AI에 대한 과도한 두려움은 바로 여기서 나온다. 우리가 '능력'이라고 여기는 것들인 암기, 계산, 패턴 인식, 논리적 추론이 바로 AI가 가장 잘하는 '책상 안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가치를 책상 안에서의 성능으로만 평가해 온 사회에서는 AI의 등장이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위협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AI가 보여주는 '책상 밖' 능력의 중요성

AI는 분명 '책상 안의' 작업에서 놀라운 능력을 보여준다. 방대한 데이터를 처리하고, 복잡한 패턴을 찾아내고, 일관된 논리로 답변을 생성한다. 하지만 '책상 밖의' 영역에서는 한계가 분명하다. 진정한 감정 체험, 물리적 환경과의 실시간 상호작용, 몸을 통한 미묘한 소통, 기존 데이터를 넘어서는 창조적 도약, 그리고 복잡한 인간관계의 맥락적 이해에서 여전히 부족하다.


그렇다면 AI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 고유의 영역은 정확히 무엇일까? AI의 한계는 오히려 인간의 고유한 능력, 즉 책상 밖 능력의 중요성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런 능력들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 유형은 의미-재미-심미의 3미(三美) 능력이다. 삶의 의미를 탐구하는 철학적 사유, 감정의 깊이와 재미를 추구하는 감성적 체험, 그리고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감상하는 미적 감각이 여기에 속한다. 이종현 교수의 문화콘텐츠의 3대 요건(의미·재미·심미) 연구에서 착안한 개념이다.


3미 능력은 책상에 앉아서도 발휘될 수 있지만, 단순한 인지적 처리를 넘어서는 인간만의 고유한 영역이다. 사랑, 슬픔, 기쁨을 온몸으로 경험하는 감정의 깊이는 단순한 데이터 처리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 타인의 고통에 진정으로 공감하고, 기쁨을 함께 나누는 능력은 인간관계의 핵심이다. 논리를 뛰어넘는 순간적 깨달음인 직관적 통찰, 단순한 규칙을 넘어서는 도덕적 감수성으로서의 윤리적 판단, 그리고 내면의 세계를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는 예술적 표현과 삶의 의미를 묻고 답을 찾아가는 실존적 성찰도 여기에 해당한다.


서구의 AI 담론에서도 인간 고유 능력의 중요성이 인식되고 있다. 최근 로버트 캡스(Robert Capps)가 <뉴욕타임스>에 쓴 「AI가 당신의 직업을 빼앗을 수도 있다. 하지만 22개의 새로운 직업을 줄 수도 있다」는 AI 시대 인간의 새로운 역할을 '신뢰(trust)', '통합(integration)', '취향(taste)'으로 분류하며, AI 감사관, 법적 보증인, 성격 디렉터, 디자이너 같은 역할들을 제시한다. 이 기사는 단순한 인지적 처리를 넘어 윤리적 판단, 감정적 이해, 미적 감각이 필요한 3미 능력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두 번째 유형은 신체-정신 통합 능력이다. 물리적 환경과의 직접적 상호작용, 몸을 통한 학습과 표현, 오감을 활용한 직관적 판단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런 능력들은 말 그대로 '책상을 떠나야만' 발휘될 수 있는 것들이다. 서구의 비즈니스 중심적 관점에서는 이런 영역이 상대적으로 간과되고 있다.


신체-정신 통합 능력의 대표적인 예가 연기, 춤, 스포츠, 요리 등 몸과 마음이 협력하는 신체적 기예다. 이는 수많은 반복을 통해 체득된 인간만의 예술이다. 말이 아닌 몸짓, 표정, 분위기로 전달하는 표현적 소통도 여기에 속한다. 미묘한 제스처 하나로 복잡한 감정을 전달하는 능력은 언어를 넘어서는 소통의 차원이다.


또한 날씨 변화를 피부로 느끼고 대응하거나, 위험한 상황을 직감적으로 감지하는 환경 감응력은 생존과 직결된 인간의 원초적 능력이다. 농부가 땅의 상태를 손으로 만져 판단하거나, 요리사가 불의 세기를 팔뚝으로 느끼는 것처럼, 물리적 환경과의 직접적 교감은 데이터로 대체할 수 없는 체화된 지혜다.


특히 신체-정신 통합 능력은 로컬 콘텐츠 제작에서 그 가치가 분명히 드러난다. 한국 사찰음식의 질감, 서울 여름밤 매미 소리, 북촌 한옥마을을 걸으며 느끼는 감각 같은 것들은 직접 경험하지 않고서는 진정성 있게 담아낼 수 없다. AI가 아무리 정교한 글을 써도, 몸으로 체험한 장소의 온도와 냄새, 사람들의 움직임과 표정은 재현할 수 없다. AI 시대에 오히려 이런 체화된 경험에 기반한 로컬 콘텐츠의 가치가 더욱 높아질 것이다.


결국 책상 밖에서 행하는 모든 행동은 AI가 따라 하기 힘든 영역이라고 볼 수 있다. Physical AI가 등장한다고 해도, 이는 본질적으로 책상에서 하던 정보 처리 작업의 연장선일 뿐이다. 진정한 신체적 경험, 환경과의 유기적 상호작용, 감정이 스며든 움직임, 그리고 의미가 담긴 행위는 여전히 인간만의 고유한 영역으로 남을 것이다.


물론 책상 안과 밖의 구분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디지털 아트나 온라인 협업처럼 책상에서 이루어지지만 높은 창조성과 소통 능력을 요구하는 일들도 많다. 또한 대부분의 인간 활동은 인지적 처리와 감정적·신체적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시험 중심 사회가 만든 능력관을 성찰하는 데는 이런 구분이 여전히 유용하다. 핵심은 표준화된 평가로 측정 가능한 능력과 그렇지 않은 능력 사이의 균형을 찾는 것이다.


'책상 안'에서 '책상 밖'으로: 새로운 능력 기준을 향하여

AI 시대는 우리에게 '능력'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묻는다. 이제 능력은 책상 안에서의 정보 처리를 넘어 책상 밖의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앞서 살펴본 두 가지 유형—3미 능력과 신체-정신 통합 능력—이 새로운 능력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시험 점수와 연봉으로 성공을 측정하던 '책상 안' 중심의 기준을 넘어서야 한다. 관계의 질, 창조적 기여, 내적 성장, 환경적 지혜, 사회적 임팩트가 새로운 성공의 척도가 되어야 한다. 행복 역시 단순한 성취나 소유를 넘어서는 새로운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몰입, 관계의 온기, 의미의 발견, 몸과 마음의 충만감, 생태적 기쁨에서 찾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교육과 사회 시스템의 근본적 변화가 필요하다. 단순 암기와 문제 풀이 중심의 교육을 넘어 감정 교육, 예술 교육, 신체 활동, 자연 체험을 강화하고, 직장에서도 협업 능력, 창조적 사고, 공감 능력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사회 전체적으로는 다양한 재능과 기여를 인정하는 가치관의 전환이 필요하다.


특히 지역사회 참여와 로컬 콘텐츠 개발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AI가 범용적이고 표준화된 콘텐츠를 대량 생산하는 시대일수록, 특정 지역의 문화와 정서, 자연환경과 인간관계를 체화한 로컬 콘텐츠의 가치는 더욱 높아진다. 우리 동네의 골목길, 지역의 전통 음식, 계절마다 변하는 풍경을 몸으로 경험하며 만들어내는 콘텐츠는 AI가 절대 대체할 수 없는 인간만의 영역이다.


AI의 등장은 위기가 아니라 기회다. 인간을 책상 안의 정보 처리 기계로 취급해 온 사회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계기이기 때문이다. AI가 책상 안의 영역을 담당하게 되면서, 오히려 인간은 책상 밖의 고유한 영역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시험 성적으로 인간의 가치를 재단해 온 관습을 버리고, 3미 능력과 신체-정신 통합 능력의 중요성을 인식해야 한다. 수능이나 토익 점수가 아니라 얼마나 깊이 사랑하고, 아름답게 표현하며, 지혜롭게 환경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가 진정한 능력의 척도가 되어야 한다.


AI가 책상 안의 인지적 작업을 대신해 주는 만큼, 우리는 더욱 인간다운 능력들인 공감, 창조, 직관, 사랑, 지혜를 발전시킬 시간과 공간을 갖게 된다. 시험 점수로 줄 세우기보다는 각자의 고유한 재능을 발견하고 키워갈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 진정한 인간의 가치는 AI가 모방할 수 없는 3미 능력과 신체-정신 통합 능력, 바로 우리가 느끼고, 꿈꾸고, 사랑하고, 창조하는 모든 순간들에 있다. AI 시대야말로 이런 인간의 본질적 능력들이 가장 빛을 발할 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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