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바오를 걸으며 발견한 도시 구심력의 비밀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나와 빌바오의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세계적인 미술관답게 신도심 중심에 위치해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밤에 아파트 창문의 불빛이 보이지 않았다. 런던이나 베를린의 밤거리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이 첫인상은 며칠간의 탐방 내내 이어졌다. 이 도시는 우리가 아는 '글로벌 도시'의 공식을 전혀 따르지 않았다. 다문화도, 24시간 불야성도, 국제적 개방성도 없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배타적이고 폐쇄적으로 보이는 겉모습 뒤에서 그 어떤 도시보다 강력한 구심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올드타운과 뉴타운이 모두 활력으로 넘치는 놀라운 현상을 목격할 수 있었고, 그 속에서 전 세계 어떤 도시든 배울 수 있는 보편적 원리를 발견하게 되었다.
거리를 걸으며 느낀 첫 번째 인상은 이 도시의 강한 지역성이었다. 외국인 노동자를 찾기 어려웠고, 아시아계 주민이 거의 보이지 않으며, 외국 음식 전문 식당이 많지 않았다. 사람들과의 첫 만남에서는 다소 거리감이 느껴졌고 외지인에게는 다소 경계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토요일 오후가 되자 문을 닫는 상점들이 눈에 띄었고, 일요일은 아예 휴무인 곳이 대부분이었다. 식당 메뉴는 전통적이고 일관성 있었으며, 익숙한 글로벌 프랜차이즈는 찾기 어려웠다. 특히 산 사바스티안 같은 해변 도시에서는 상업 시설보다 주택이 해안가를 차지하고 있어 더욱 인상적이었다. 우리가 아는 글로벌 도시의 다양성과 상업성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거리는 안전했고 노숙자나 부랑인을 찾을 수 없었다. 여름철 비가 잦다는 날씨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에는 특별한 에너지가 흘렀다.
빌바오는 완벽한 보행도시였다. 구겐하임에서 시작해 네르비온 강을 따라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올드타운까지 이어진다. 그 과정에서 놀라운 발견을 했다. 도심 전체가 생동감으로 넘쳐났다는 것이다.
빌바오를 포함한 모든 바스크 도시의 올드타운이 살아있었다.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진짜 일상이 숨 쉬는 공간이었다. 7개 거리(Siete Calles)로 이루어진 빌바오의 카스코 비에호는 7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상권이 여전히 번성하고 있었다.
뉴타운의 풍경은 또 달랐다. 19세기 기차역 개통과 함께 형성된 이곳에는 현대적 백화점과 국제 브랜드 매장들, 세련된 카페와 레스토랑들이 들어서 있었다. 우리에게 친숙한 구겐하임 미술관도 바로 이 뉴타운에 자리한다. 그란 비아(Gran Vía)를 중심으로 펼쳐진 쇼핑거리는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와 견주어도 손색없는 도시적 세련미를 뽐냈다.
하지만 진짜 놀라운 건 따로 있었다. 올드타운과 뉴타운이 서로 경쟁하지 않고 완벽하게 역할을 나누고 있다는 점이었다. 올드타운이 활기차다고 해서 뉴타운이 침체된 게 아니었다. 뉴타운의 현대적 쇼핑거리는 물론이고, 바와 상점가, 심지어 구석진 작은 골목까지도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 도심 구심력이 많은 유동인구를 창출하는 구조를 관찰하며 그 비밀을 깨달았다. 빌바오의 도시 구심력은 세 가지 핵심 요인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첫 번째 요인은 빌바오의 보행환경이었다. 네르비온 강을 따라 걷다 보면 구겐하임에서 올드타운까지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뉴타운과 올드타운은 그란 비아를 통해서도 이어진다. 자동차로는 목적지까지 직행하지만, 걸어서는 수많은 상점과 카페를 지나게 된다. 이런 '계획된 우연'을 유발하는 보행 중심 공간 설계가 도시 경제의 동력이었다.
무엇보다 올드타운과 뉴타운의 역할 분담이 명확했다. 700년 전통의 올드타운과 19세기 형성된 뉴타운이 각각 다른 기능을 하면서도 보행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었다. 보통 뉴타운이 발달하면 올드타운이 쇠락하거나, 올드타운을 보존하려다 보면 현대적 발전이 정체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빌바오는 양쪽 모두 활력이 넘쳤다.
빌바오만의 독특한 지역 정체성 기반 콘텐츠가 도시 전체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161년 된 모자 가게 소머레로스 고로스티아가는 여전히 체펠라(바스크 베레모)를 팔며 성업 중이었다. 글로벌 프랜차이즈가 거의 없다는 것은 불편함이 아니라 차별화된 경험을 제공하는 장점이었다. 세계 어디서든 흔한 스타벅스나 맥도널드 대신, 오직 빌바오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독특한 공간들이 관광객들을 끌어들였다.
저녁 식사가 늦다는 문화적 특성조차 경제적 장점을 만들었다. 오후 6-8시 핀초스 타임, 9-11시 디너 타임으로 이어지는 이중 식사 문화는 하루에 두 번의 사교와 소비를 창출했다. 구겐하임을 본 관광객이 뉴타운에서 쇼핑을 하고, 저녁에는 올드타운의 핀초스 바로 향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동선이 되었다.
심지어 비가 많이 온다는 기후적 제약조차 콘텐츠의 일부가 되었다. 실내 공간인 바와 카페, 미술관과 박물관이 더욱 중요해지고,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실내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소비하게 되었다. 궂은 날씨가 오히려 도시 구심력을 강화하는 요인이 된 것이다.
마켓과 플라자가 미식 문화의 중심이 되어 강한 공동체 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다. 리베라 마켓을 중심으로 한 미식 네트워크는 단순한 상업공간을 넘어서 도시 전체를 연결하는 혈관 역할을 했다.
도시가 안전하다는 것은 단순한 치안 문제를 넘어선 사회적 의미를 갖고 있었다. 이는 빌바오의 강한 사회적 결속력을 보여주는 지표였고, 이것이 신뢰 기반 경제의 토대가 되어 거래비용을 낮추고 장기적 관계를 중시하는 지속가능한 발전을 가능하게 했다.
바스크 지역의 협동조합 전통, 몬드라곤 코퍼레이션의 성공, Eroski의 소비자-생산자 직접 연결 모델—이 모든 것들이 가능한 이유는 높은 사회적 신뢰 때문이었다.
다소 거리감이 느껴지고 외지인에게 경계하는 분위기도 다르게 해석할 수 있었다. 이는 가식적인 서비스가 아닌 진정성 있는 관계를 추구하는 문화였다. 그리고 이런 진정성이야말로 빌바오만의 브랜드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이었다.
빌바오를 며칠간 걸으며 깨달은 것은, 바스크 모델의 '보편성'이 그 문화적 특수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도시 구심력을 창출하는 공간 운영 원리에 있다는 점이었다.
전이될 수 없는 특수성들
2천 년 바스크 역사와 문화
대서양 연안의 기후와 지형
바스크어와 고유한 언어문화
협동조합 전통과 사회적 결속력
인종적·문화적 동질성
전이되어야 할 보편적 원리들
전 도심 활성화 모델: 올드타운과 뉴타운이 경쟁하지 않고 상호 보완하며 모두 활력을 유지하는 시스템
보행 중심 공간 설계: '우연한 만남'과 소비를 유발하는 연결된 동선
지역 정체성 기반 브랜딩: 글로벌 프랜차이즈 대신 고유한 문화 자산을 상품화하는 전략
공동체 거점 중심 개발: 마켓과 플라자를 중심으로 한 동네 활력 창출
신뢰 기반 경제 생태계: 장기적 관계를 중시하는 지속가능한 발전 모델
빌바오의 성공은 세계적인 구겐하임 미술관을 유치한 것이 아니라, 그 미술관이 있는데도 여전히 빌바오다운 활력을 유지하는 도시 전체 시스템을 만든 것이다.
바스크어와 체펠라는 복사할 수 없지만, 올드타운과 뉴타운이 모두 사람으로 꽉 찬 이 도시의 공간 운영 원리는 충분히 다른 도시들이 배우고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 가치다.
그것이야말로 바스크 모델이 세계 도시들에게 주는 진정한 선물이 아닐까.
걸으며 느낀 것: 빌바오 사람들은 다소 무뚝뚝하다. 하지만 그 무뚝뚝함 뒤에는 진정성이 있고, 그 진정성이 만든 동네의 활력이야말로 어떤 도시든 배울 수 있는 빌바오의 진짜 경쟁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