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뉴요커》에 실린 애그니스 칼라드의 "The Case Against Travel(여행 반대론)"을 읽었다. 평소 청년들이 지나치게 여행에 투자하는 건 아닌지 우려해 온 나에게 매우 반가운 글이었다.
칼라드는 시카고대학교 철학 교수답게 날카롭게 묻는다. 여행이 정말 우리를 변화시키는가? 그녀의 답은 단호하다. "아니다." 여행은 부메랑이다. 우리를 시작한 곳에 그대로 떨어뜨린다. 친구가 여행 다녀와도 전혀 달라지지 않은 걸 생각해 보라고 그녀는 말한다.
관광객의 문제는 진정한 경험이 아니라 '이동'만 한다는 것이다. "프랑스에 갔다" "루브르에 갔다" "모나리자를 봤다"—많은 사람이 모나리자를 단 15초만 본다. 끝까지 이동뿐이다. 평소 관심도 없던 것을 여행지에서 억지로 경험하고, 엽서나 SNS를 위해 감동받은 척한다. 우리는 자신의 감정이 아니라 '해야 할 것' 리스트에 복종한다.
칼라드의 진단은 더 냉소적이다. 우리가 여행을 좋아하는 진짜 이유는 "언젠가 죽는다"는 불안에서 도피하기 위해서다. 여행은 "나는 경험하고 있고, 연결하고 있고, 변화하고 있다"는 착각으로 삶의 공허를 가린다.
이 글은 흥미롭게도 여행을 많이 한 특권층이 썼다는 비판을 받았다. 저자가 여러 나라에서 살아온 명문대 교수이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지점이 중요하다고 본다. 하나는 여행의 거리이고, 또 하나는 여행의 방법이다. 먼저 던지고 싶은 질문은 이것이다. 과연 먼 곳으로 가는 여행만이 나에게 필요한 경험을 줄까?
많은 청년들이 '의미 있는 경험'은 멀리 있다고 믿는다. 해외 여행을 '광고'하는 수많은 방송, 책, SNS를 보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하지만 거리가 경험의 깊이를 보장하지 않는다.
소설가 이슬아는 "내 모든 콘텐츠는 집에서 반경 1킬로미터 안에 있다"라고 말했다. 나의 주변과 내가 사는 장소를 깊이 관찰하면 그 안에 모든 이야기가 있다는 뜻이다.
두 번째 질문은 여행의 방법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여행해야 할까? 어디를 가든지 여행은 취향 훈련, 감각 훈련의 기회다. 중요한 건 취향은 발견하는 것이지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모든 사람은 이미 취향을 갖고 있다. 특정 빛에 끌리고, 특정 공간감을 편안해하고, 특정 리듬을 선호한다. 하지만 익숙한 일상에서는 이게 잘 보이지 않는다. 여행은 이 취향을 가시화하는 대조 실험이다.
왜 이 골목은 좋고 저 골목은 싫을까? 왜 이 카페에서는 2시간을 앉아있고 저기는 10분 만에 나왔을까? 같은 비 오는 날인데 왜 어떤 도시에서는 좋았고 다른 곳에서는 우울했을까?
이것이 기록하는 여행이다. "나 여기 왔어"가 아니라 "이 공간은 왜 좋을까? 천장 높이 때문인가? 소음 레벨 때문인가?" 타인의 좋아요가 아니라 내 반응을 철저히 관찰하는 것. 과시하는 인스타와 기록하는 인스타는 다르다.
여행 후 "나는 ___한 공간/빛/소리를 좋아한다"는 문장 세 개를 쓸 수 있다면, 그 여행은 성공이다. 그러면 반경 1킬로미터로 돌아와서도 그 안에서 내 취향에 맞는 것들을 발견할 눈이 생긴다.
칼라드의 비판은 정확하다. 하지만 해법은 여행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든지 깊이 있게 기록하는 것이다. 해외로 가든, 내가 사는 동네에 머물든지 내가 뭘 좋아하는 10가지를 발견하는 여행. 그것이 진짜 여행이고, 그래야 일상도 풍부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