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사회의 미래에 대한 대중적 논의에서 가장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론이 기술결정론이다. 기술결정론(Technological Determinism)은 두 가지 핵심 주장을 담고 있다. 첫째, 기술이 사회를 결정한다. 기술의 발전이 사회구조, 문화적 가치, 심지어 인간의 행동까지 결정한다는 것이다. 둘째, 기술은 자체 논리로 진화한다. 인간이 기술을 발명하지만, 일단 시작된 기술은 자율적으로 발전하며 인간은 그 방향을 따라갈 뿐이라는 것이다.
기술철학 내부에서는 사회구성주의(Social Constructivism) 등 기술의 사회적 구성을 강조하는 관점들이 주류를 이루며 기술결정론을 비판해 왔지만, 대중 담론과 기술 엘리트의 세계에서는 여전히 기술결정론이 지배적이다. 한국 사회뿐만 아니라 실리콘밸리의 기술관을 지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기술결정론 문헌을 읽으면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왜 기술결정론은 거대 기술, 메가머신, 권위적인 기술로 귀결되는가? 흥미로운 것은 이런 경향이 비관적 기술결정론뿐만 아니라 낙관적 기술결정론에서도 나타난다는 점이다. 비관론자는 거대 기술 시스템을 두려워하고, 낙관론자는 이를 환영하지만, 둘 다 같은 미래상을 그린다. 기술은 필연적으로 거대하고 통합된 시스템으로 진화한다는 것. 여기에 퍼즐이 있다.
비관적 기술결정론의 대표자는 자크 엘륄이다. 그는 『기술 사회(La Technique)』(1954)에서 기술이 자율적으로 진화하는 거대 시스템이 되어 인간을 부속품으로 만든다고 우려했다. 엘륄에게 현대 기술은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스스로의 논리로 확장하며, 결국 인간을 그 시스템의 부속품으로 만든다. 그는 이를 '기술의 자율성(autonomy of technique)'이라 불렀고, 이 거대 기술 시스템의 지배를 깊이 우려했다. 루이스 멈포드 역시 『기계의 신화(The Myth of the Machine)』(1967)에서 고대 피라미드 건설부터 현대 산업 시스템까지 이어지는 "메가머신"의 역사를 추적하며, 권위주의적 기술이 인간을 억압해 왔다고 분석했다. 둘 다 기술의 거대화와 중앙집중화를 필연으로 보았다.
그런데 낙관적 기술결정론자들도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기술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실리콘밸리의 합의가 있다면 그것은 낙관적 기술결정론이고, 이를 대변하는 대표적인 지식인은 케빈 켈리다. 켈리는 『기술의 충격(What Technology Wants)』(2010)에서 기술을 인간이 만들었지만 이제는 자체 논리로 진화하는 거대한 생명체적 시스템, '테크늄(Technium)'으로 정의했다. 엘륄과 마찬가지로 기술의 자율성을 인정하지만, 켈리는 이를 두려워할 대상이 아닌 환영할 미래로 본다. 그가 그리는 미래 역시 거대하고 통합된 시스템이다. 비관론자는 이를 두려워하고, 낙관론자는 이를 환영하지만, 둘 다 같은 그림을 그린다. 왜 기술결정론은 한결같이 거대 시스템으로 수렴하는가?
케빈 켈리의 사상을 자세히 살펴보자. 그에 따르면 기술은 복잡성 증가, 다양성 확대, 특화, 편재성을 향해 스스로 나아가며, 인간은 이 진화의 방향을 '선택'할 수 있을지언정 '중단'할 수는 없다. 켈리의 후속작 『인에비터블(The Inevitable)』(2016)은 이 낙관론을 더욱 구체화한다. 그는 12가지 기술적 흐름을 제시한다. 생성(Becoming), 인지화(Cognifying), 흐름(Flowing), 스크린화(Screening), 접속(Accessing), 공유(Sharing), 필터링(Filtering), 리믹스(Remixing), 상호작용(Interacting), 추적(Tracking), 질문(Questioning), 시작(Beginning). 이것이 인류를 더 풍요로운 미래로 이끌 것이라 전망한다.
켈리가 "접속이 소유보다 중요하다"라고 말할 때, 그는 개인이 무거운 소유 부담에서 해방되는 자유를 강조한다. 공유(Sharing)를 말할 때는 협업 경제와 P2P 네트워크의 가능성을 본다. 생성(Becoming)은 끊임없이 업데이트되는 유동적 상태를 의미한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것들은 분산과 개방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켈리의 12가지 원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들은 대체로 거대 시스템으로의 통합을 전제한다.
흐름(Flowing)은 클라우드 중심화를, 접속(Accessing)은 플랫폼 의존을, 인지화(Cognifying)는 AI의 편재화를 의미한다. 켈리는 이를 긍정적으로 보지만, 그가 그리는 미래 역시 개인이 거대 네트워크에 접속하는 모습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켈리의 12가지 흐름 어디에도 개인화(Personalization), 개방화(Opening), 로컬화(Localization)가 독립적 원리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공유(Sharing)는 있지만 "설계도의 민주화"는 없고, 접속(Accessing)은 있지만 "개인 소유"는 없으며, 흐름(Flowing)은 있지만 "엣지로의 회귀"는 없다. 켈리는 기술이 거대 시스템으로 통합되는 방향만을 포착했을 뿐, 그 시스템이 다시 개인에게 분산되는 반대 운동을 보지 못했다. 결국 낙관적 기술결정론도 비관적 기술결정론과 마찬가지로 거대 시스템으로의 귀결을 그린다.
하지만 실제 기술의 역사는 다르다. 기술은 항상 거대 시스템으로 시작하지만, 결국 세 가지 방향으로 되돌아온다. 개방화, 개인화, 로컬화. 19세기 후반 산업혁명기, 거대 공장의 표준화된 대량생산 시스템이 장인의 손길을 몰아낼 때, 윌리엄 모리스를 중심으로 한 아츠 앤 크래프트 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공장이 아닌 스튜디오로, 규격품이 아닌 개별 창작물로 응전했다. 이것이 개인화다. 1970년대 IBM 메인프레임으로 상징되는 거대 중앙집중 컴퓨팅이 기업과 정부의 전유물이었을 때, 실리콘밸리의 해커들은 "컴퓨터를 대중의 손에"라는 슬로건으로 PC 혁명을 일으켰다. 컴퓨팅을 개인의 책상 위로 되돌린 것이다. 1990년대 마이크로소프트의 폐쇄적 운영체제가 시장을 지배할 때, 리눅스와 오픈소스 운동이 설계도를 대중에게 공개했다. 이것이 개방화다.
이 역사적 패턴은 명확하다. 중앙집중 → 개인화, 폐쇄 → 개방화, 클라우드 → 로컬화. 실제 역사에서 이 세 가지 원리는 켈리의 12개 원리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한 기술 작동 원리였다. 기술은 거대 시스템으로 시작하지만, 인간은 이를 다시 개인의 도구로 되찾아왔다. 이것이 반복적 패턴이다.
그리고 지금 AI 시대에도 세 가지 원리가 중요한 동력으로 작동하고 있다. 오픈 웨이트(Open-weight) 모델은 AI 설계도를 개인이 소유하게 했다. Llama 4, Qwen 같은 모델을 내 PC에 영구 설치할 수 있다. 이것이 개방화다. 엣지 AI는 지능을 클라우드에서 내 스마트폰으로 가져왔다. 애플 A18 칩, 퀄컴 스냅드래곤 8 Elite에 탑재된 NPU가 내 기기에서 AI를 구동한다. 이것이 로컬화다. 로컬 RAG(Retrieval-Augmented Generation)는 AI가 위키백과가 아니라 나의 이메일, 나의 메모, 나의 기록을 학습하게 만든다. AI가 나만의 맥락을 이해한다. 이것이 개인화다.
그렇다면 질문이 남는다. 왜 엘륄도, 멈포드도, 켈리도 이 세 가지 원리를 보지 못했는가? 왜 기술결정론자들은 개방화, 개인화, 로컬화를 간과하는가? 답은 이 세 가지 원리의 본질에 있다. 개방화, 개인화, 로컬화는 순수한 기술 원리가 아니다. 이것들은 인간의 의지와 개입을 전제로 한다. 오픈소스는 프로그래머들의 집단적 결정이고, PC 혁명은 해커 문화의 산물이며, 아츠 앤 크래프트는 산업화에 저항한 문화 운동이다. 이것들은 기술 그 자체의 자율적 진화가 아니라, 인간이 기술을 특정 방향으로 되돌리려는 의도적 개입이다.
따라서 이 세 원리를 설명하려면 기술공학 이론만으로는 부족하다. 문화이론, 정치경제학, 사회운동 이론이 필요하다. 기술결정론자들이 이 세 원리를 간과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기술 그 자체"의 논리를 추적하려 한다. 엘륄은 기술의 자율성을, 켈리는 테크늄의 진화를 말한다. 하지만 개방화, 개인화, 로컬화는 기술의 자율적 논리가 아니라 인간의 문화적·정치적 개입이다. 이것들을 "기술 법칙"으로 일반화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조건부이기 때문이다. 특정 문화적 토양(예: 카운터컬처), 특정 정치적 조건(예: 민주주의), 특정 경제적 환경(예: 탈물질주의)에서만 작동한다. 기술결정론자들은 보편 법칙을 찾으려 하기에, 조건부 패턴을 놓친다.
이제 기술사회의 미래에 대한 질문을 바꿔야 한다. 인간결정론은 가능한가? 즉, 기술의 자율성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의 개입을 핵심 변수로 포함하는 이론 말이다. 사실 이것이 역사를 더 정확하게 설명한다. 기술은 확실히 자체 논리를 갖는다. 폰 노이만 아키텍처의 병목은 기술적 사실이고, 반도체 미세화의 한계도 물리적 사실이다. 켈리가 말한 복잡성 증가, 편재성 확대도 기술의 경향성으로 관찰된다. 이런 의미에서 기술결정론은 부분적으로 옳다.
하지만 역사의 결정적 전환점은 항상 인간의 개입에서 왔다. PC가 등장한 것은 메인프레임의 기술적 한계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 "개인이 컴퓨터를 소유해야 한다"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오픈소스가 승리한 것은 폐쇄 시스템의 비효율 때문만이 아니라, 누군가 "소프트웨어는 자유로워야 한다"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아츠 앤 크래프트 운동은 공장 생산의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장인들이 "손의 가치"를 지키려 했기 때문이다. 기술적 가능성과 인간적 의지가 만날 때 역사가 바뀐다.
결국 기술의 역사는 기술결정론과 인간결정론의 혼합(mix)으로 설명된다. 기술은 특정 방향으로 흐르려는 경향을 갖지만, 인간은 그 흐름을 굽히고, 되돌리고, 재설계한다. 그렇다면 이것을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가? "기술-인간 혼합 결정론"? 하지만 비중을 따져보면 답은 명확하다. 거대 시스템은 일시적 국면이었고, 개인화는 반복적 귀결이었다. 공장은 스튜디오로 돌아왔고, 메인프레임은 PC로 돌아왔으며, 클라우드도 엣지로 돌아오고 있다. 기술의 초기 형태는 거대하지만, 최종 형태는 항상 개인적이다. 이것이 패턴이다. 따라서 이를 "인간결정론"이라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 기술은 제안하지만, 인간이 결정한다.
Jacques Ellul, La Technique ou l'enjeu du siècle, Armand Colin, 1954.
Lewis Mumford, The Myth of the Machine: Technics and Human Development, Harcourt Brace Jovanovich, 1967.
Kevin Kelly, What Technology Wants, Viking Press, 2010.
Kevin Kelly, The Inevitable: Understanding the 12 Technological Forces That Will Shape Our Future, Viking Press, 2016.
Steven Levy, Hackers: Heroes of the Computer Revolution, O'Reilly Media, 1984.
모종린, 『제3의 응전』, 21세기북스, 2025.
모종린, 『크리에이터 소사이어티』, 김영사,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