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면동 미스터리

by 골목길 경제학자


읍면동 미스터리


지역발전 정책을 보는 국민의 시각은 회의적이다. 200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지역에 투자했으나, 지역의 쇠락은 오히려 악화되기 때문이다. 지역발전 정책의 문제점을 따지려 한다면 끝이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의외로 정책의 내용이 아닌 다른 곳에 있을 수도 있다. 지역발전 정책이 수립되는 방식이다.


지역발전의 기본 수단은 중장기 발전계획이다. 현재 정부가 법제화한 지역발전 계획은 수없이 많다. 중앙 부처, 광역단체, 기초단체(시군구)는 국가균형발전특별법에 따라 5개년 발전계획을 수립한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역문화진흥 기본계획, 국토교통부의 도시재생활성화계획, 행정안전부의 사회적 경제 기본계획 등 지역 생활권에 영향을 미치는 중앙부처의 법정계획도 기초단체 단위까지 내려온다. 두 경우 모두 계획의 최소 단위는 기초단체인 시군구에서 멈춘다. 실제 주민의 생활 반경인 읍면동에는 종합적인 발전 비전이 존재하지 않는다.

읍면동은 계획이 필요 없는 곳인가?


이 공백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지역경제의 무게중심이 이미 바뀌었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이후 반경 500m 이내 소비가 늘고, MZ세대를 중심으로 동네에서 좋아하는 일을 하며 창업하는 흐름이 전국으로 확산됐다. 강릉의 커피거리, 제주의 아라리오 타운, 양양의 서핑 산업처럼 지역 고유의 자원을 발굴해 브랜드로 키운 로컬 크리에이터들이 지역경제의 새로운 주역으로 부상하고 있다. 서울 성수동, 홍대, 이태원, 경주 황남동, 전주 풍남동, 제주 탑동 등 청년들이 선망하는 지역도 모두 읍면동 단위에서 형성된다. 대기업과 산업단지가 아니라 동네 상권과 로컬 브랜드가 지역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시대다.


주민자치회가 마을 계획을 수립하고, 홍성군, 완주군 등 일부 지역에서는 읍면 단위 발전 계획이나 특화 전략을 발표하는 사례도 생겨나고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은 공동체·복지·정주환경 개선 같은 주민자치 영역에 국한된다. 소상공인, 로컬 브랜드, 관광, 로컬푸드 같은 산업정책은 여전히 읍면동 계획의 범위 밖이다. 읍면동이 지역 창조경제의 실질적 단위로 부상하고 있음에도, 이를 뒷받침할 종합적인 발전 계획은 아직 없다.


전국 3,500개 읍면동은 평균 인구 1만 5,000명 규모로, 주민이 일상적으로 접촉하는 최소 생활권이다. 이 단위에서 5개년 종합계획, 즉 읍면동 마스터플랜을 수립하면 흩어진 중앙정부 사업들을 하나의 지역 비전 아래 수렴할 수 있다. 그 비전의 목표는 단순한 시설 정비나 복지 서비스 전달이 아니다. 문화와 로컬 브랜드를 창출하는 창조 커뮤니티를 만드는 것이다.


창조 커뮤니티는 크리에이터들이 모여 지역 고유의 콘텐츠를 생산하고, 그것이 브랜드로 축적되는 생태계다. 이런 생태계는 위에서 기획되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 형성된다. 마스터플랜의 역할은 그 형성 조건을 갖추는 것이다. 크리에이터가 정착할 수 있는 공간, 로컬 브랜드를 연결하는 네트워크, 지역 정체성을 발굴하고 콘텐츠화하는 역량. 이런 조건들이 읍면동 단위에서 체계적으로 지원될 때, 창조 커뮤니티는 뿌리를 내린다. 그리고 창조 커뮤니티가 자리를 잡으면, 그 읍면동은 하나의 브랜드가 된다. 대전 성심당이 대전을 브랜드로 만들었듯이, 동네에 전국적으로 알려진 로컬 브랜드 열 개만 만들어지면 그 읍면동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목적지가 된다.


이것이 AI 시대에 더욱 중요해진다. AI는 표준화된 정보와 콘텐츠를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지만, 특정 장소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재현하지 못한다. 대전에서만 먹을 수 있는 성심당의 빵, 강릉에서만 느낄 수 있는 커피거리의 분위기는 알고리즘으로 복제되지 않는다. AI가 생산 효율을 높일수록 역설적으로 장소성과 고유성의 가치는 더 커진다. 동네 브랜드화는 AI 시대에 지역이 살아남는 전략이기도 하다.


전국 3,500개 읍면동이 각자의 마스터플랜을 갖고 '읍면동 3500 창조 커뮤니티'를 키워나간다면, 그것은 산업단지를 유치하는 것보다 훨씬 넓고 깊은 지역발전을 만들어낼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읍면동에 산업 정책 기능을 부여하고, 소상공인·로컬 브랜드·관광·로컬푸드를 아우르는 종합 발전계획을 수립할 수 있는 제도적 근거가 필요하다. 지역발전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일은 거창한 곳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장기발전 계획이 생활권 단위에서 수립될 때, 비로소 지역발전은 주민의 삶과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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