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경제가 살아나지 않는다는 말은 오래됐다. 그런데 왜 살아나지 않는지에 대한 진단은 여전히 부실하다. 지역산업 정책이 없어서가 아니다. 지역산업 정책은 차고 넘친다. 문제는 그 정책이 다루지 않는 영역이 있다는 것이다. 로컬 창업 생태계가 바로 그 공백이다.
현재 지자체 조직을 보면 구조가 선명하게 보인다. 산업정책이나 투자유치 부서는 기존 산업을 지원하고 외부 기업을 유치한다. 지역경제나 일자리육성 부서는 소상공인과 사회적 기업을 지원한다. 광역 단위에서 운영되는 중기부 산하 창조경제혁신센터는 전국 시장에 진출할 기술 기반 스타트업을 육성한다.
각자의 역할이 있다. 그런데 이 구조 어디에도 로컬 창업 생태계를 담당하는 부서가 없다. 지역 안에서 생산자가 자라고, 그 생산물이 지역 안에서 소비되고, 그 순환이 공동체를 강화하는 구조 — 이것을 설계하고 지원하는 곳이 실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로컬 창업 생태계를 구축한다는 중기부의 방식도 한계가 있다. 현재 소상공인을 성장 단계별로 구분해 창업과 도약을 지원하는 방식이다. 개별 기업의 성장을 추적하는 데는 유효하지만 생태계 임팩트를 보지 않는다. 어떤 기업이 지역 생태계에 더 큰 임팩트를 미치는지, 어떤 기업을 지원해야 주변 생태계 전체가 움직이는지를 이 방식으로는 알 수 없다. 생태계 임팩트를 고려하지 않는 지원은 개별 기업을 돕지만 생태계를 만들지 못한다.
그렇다면 로컬 창업 생태계는 어떻게 설계해야 하는가. 핵심은 앵커를 이해하는 것이다. 앵커란 지역 생태계 안에서 사람과 생산자를 모으고, 다른 비즈니스와 커뮤니티의 집적을 유도하는 민간 거점이다. 영리와 비영리를 가리지 않는다. 기능이 기준이다.
생태계는 균질하지 않다. 모든 로컬 비즈니스가 생태계에 동등하게 기여하지 않는다. 어떤 공간은 주변 전체를 움직인다. 그것이 앵커다. 앵커를 중심으로 지원을 설계하면 앵커 중심의 생태계 구축이 가능하다. 앵커의 유형을 이해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유형에 따라 생태계 임팩트의 성격이 다르고, 필요한 정책 수단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앵커는 기능을 기준으로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리테일형 앵커: 소비를 지역 안에 붙잡는다
리테일형 앵커는 상권 전체의 매출과 유동인구를 견인하는 기업이다. 특정 업종에 한정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그 공간을 목적지로 삼고 찾아오고, 그 방문이 주변 상권 전체로 퍼져나갈 때 그 기업은 리테일형 앵커가 된다. 업종으로 구분하면 F&B, 숙박, 문화, 리테일, 엔터테인먼트 등 소비 거래가 일어나는 모든 영역이 포함된다. 중요한 것은 업종이 아니라 상권 내 파급 효과다.
리테일형 앵커 중에서도 임팩트가 특히 큰 것이 로컬 플랫폼 기업이다. 자신의 브랜드를 만드는 동시에 다른 로컬 브랜드의 성장을 견인하는 기업으로, 독립서점, 로컬 편집숍, 복합문화공간, 로컬 마켓, 로컬 매거진, 로컬 호텔이 여기에 해당한다. 일반 리테일 앵커가 소비를 유발하는 데 그친다면, 로컬 플랫폼 기업은 지역 생산자를 큐레이션 하고 다른 로컬 브랜드의 성장까지 견인한다. 같은 리테일형 앵커라도 플랫폼 기능의 유무가 생태계 임팩트의 크기를 결정한다.
생산형 앵커: 지역 안에서 생산자를 키운다
생산형 앵커는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을 모은다. 스타트업, 크리에이터, 장인, 주민 생산자 — 이들이 지역 안에서 실험하고 협업하고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거점이다. 코워킹 스페이스, 메이커스페이스, 크리에이티브 커뮤니티 스페이스, 주민 공방, 로컬 스튜디오, 공유 주방이 여기에 해당한다.
생산형 앵커가 육성하는 것은 산업화 이전 단계의 생산자다. 창조경제혁신센터가 전국 시장을 향한 기술 스타트업을 키운다면, 생산형 앵커는 지역 안에 뿌리를 내리는 로컬 창업자를 키운다. 지역 자원을 기반으로 실험 중이고, 지역 시장에서 검증 중인 초기 생산자들이 그 대상이다. 전국 시장 진출은 이 단계가 충분히 돌아간 뒤에 따라오는 결과다.
임팩트를 결정하는 조건은 지역 자산과의 연결이다. 지역의 역사, 건축환경, 자연자원, 산업 유산, 그리고 지역 커뮤니티와 결합된 생산 공간은 어디서도 복제할 수 없는 고유한 생태계를 만든다. 지역과 무관하게 운영되는 코워킹은 사무실 임대업이다.
소셜형 앵커: 공동체의 지속성을 만든다
소셜형 앵커는 사회적 가치와 공동체 관계를 매개로 사람을 모은다.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자활기업, 돌봄 공간, 공정무역 매장, 환경 거점이 여기에 속한다. 생태계는 경제적 순환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구성원들이 서로를 신뢰하고 지역에 귀속감을 가질 때 생태계는 외부 충격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소셜형 앵커는 이 사회적 자본을 축적하는 역할을 한다.
소셜형 앵커의 임팩트는 커뮤니티의 에너지가 지역의 생산력으로 전환될 때 극대화된다. 돌봄과 환경을 매개로 모인 주민들이 지역 기반 사업을 함께 시작하고, 협동조합이 지역 생산자의 유통망이 되고, 사회적 기업이 지역 청년의 창업 플랫폼이 될 때, 소셜형 앵커는 공동체 결속을 넘어 로컬 창업 생태계의 핵심 축이 된다. 폐쇄적인 커뮤니티에 머물면 생태계 임팩트는 안으로만 향한다.
앵커는 혼합되고, 생태계는 연결된다
현실에서 세 유형은 명확히 분리되지 않는다. 복합문화공간이 코워킹을 병설하면 리테일형이자 생산형이다. 사회적 기업이 로컬 편집숍을 운영하면 소셜형이자 리테일형이다. 주민 공방이 지역 청년의 창업 인큐베이터가 되면 소셜형이자 생산형이다. 임팩트가 큰 앵커일수록 혼합의 정도가 높다. 유형 분류는 설계의 출발점이지 도착점이 아니다.
앵커 하나로는 생태계가 완성되지 않는다. 앵커와 앵커가 연결되고 그 사이에서 생산자와 소비자와 공동체가 순환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로컬 창업 생태계라 부를 수 있다.
로컬 창업 생태계 설계는 지자체의 몫이다
로컬 창업 생태계는 어떤 중앙부처도 단독으로 설계할 수 없다. 중기부는 창업을 담당하지만 공간과 커뮤니티를 보지 않는다. 문체부는 문화를 담당하지만 경제 순환을 보지 않는다. 국토부는 공간을 담당하지만 생태계를 보지 않는다. 부처는 자기 영역을 본다. 로컬 창업 생태계는 그 경계를 가로지른다. 통합 설계가 가능한 주체는 지자체뿐이다.
지자체가 해야 할 일은 현재 존재하는 기업만 지원하는 것이 아니다. 로컬 창업 생태계를 중앙부처에 위탁하지 말고, 직접 로컬 기업과 앵커가 자생할 수 있는 조건, 즉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다. 생태계에는 교육, 훈련, 연구개발, 금융, 투자, 판로 등 로컬 기업의 가치사슬에 관련된 모든 지원 인프라가 포함된다. 그래도 핵심은 앵커다. 앵커 중심으로 구상하고 지원하는 것이 시작이다.
이를 위한 정책은 세 축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첫째, 앵커를 직접 지원한다. 리테일형·생산형·소셜형 앵커를 유형별로 식별하고 운영 비용, 공간, 프로그램을 지원한다. 임팩트가 큰 앵커일수록 우선 지원한다. 둘째, 앵커 간 네트워크를 구축한다. 앵커들이 서로 연결되어 생산자와 소비자와 커뮤니티가 순환하는 구조를 만든다. 개별 앵커 지원만으로는 생태계가 되지 않는다. 앵커 간 관계를 설계하는 것이 생태계를 만드는 일이다. 셋째, 생산자 유입 환경을 조성한다. 로컬 창업자와 크리에이터가 지역 안에서 실험하고 정착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든다. 초기 공간 지원, 지역 시장 연결, 앵커를 통한 멘토링이 여기에 해당한다.
로컬 창업 생태계의 힘은 앵커에서 나온다. 리테일형 앵커는 소비를 지역 안에 붙잡고, 생산형 앵커는 지역 안에서 창업자를 키우고, 소셜형 앵커는 생태계가 흔들리지 않도록 공동체를 결속한다. 세 유형이 연결되고 순환할 때 지역은 비로소 스스로 살아나는 힘을 갖는다. 공공이 시설을 짓고 예산이 끊기면 빈 건물이 남는다. 민간 앵커가 자생하면 생태계가 남는다. 차이는 거기서 나온다.
지역산업 정책의 시대는 길었다. 모두의 로컬창업 시대는 막 시작됐다. 출발은 생태계를 이해하고 지원하는 것에서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