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희동은 대학가 인근의 나지막한 주택가로 오랫동안 학생, 지식인, 예술가들의 주거지로 사랑받던 곳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연희동은 단순한 주거 공간을 넘어 톡톡 튀는 콘텐츠와 로컬 문화가 살아 숨 쉬는 로컬 브랜드 상권으로 변모했다.
로컬 브랜드 상권이란 로컬 문화가 강한 상권, 기업 생태계 기준으로는 특정 분야의 로컬 브랜드가 집적된 상권이다. 상권을 유통채널과 콘텐츠 생산지로 분류하면, 로컬 브랜드 상권은 콘텐츠 생산지에 해당하다.
무엇이 연희동을 변화시킨 걸까. 우선 연세대, 이화여대, 서강대, 홍익대 등 인접한 대학들로 인해 이 지역에는 특유의 문화와 창의성이 축적될 수 있었다. 여기에 단독주택 위주의 정겨운 건축 환경이 더해지며 자연스럽게 개성 넘치는 공간이 탄생했다. 북쪽으로는 연희 문학 창작촌 같은 문화지대가, 남쪽으로는 사러가쇼핑센터 같은 상업지구가 자리 잡으며 연희동만의 창의적 생태계가 조성된 것이다.
그 결과 연희동 곳곳에선 로컬 크리에이터들의 활약이 돋보인다. 작가, 예술가부터 장인, 셰프, 디자이너까지 다양한 창작자들이 연희동에 둥지를 틀었다. 나아가 주민들도 직접 지역 콘텐츠 제작에 나서고 있다. 동네 철물점에서 DIY 가구 만들기 강좌를, 작은 공방에선 수공예 클래스를 연다. 이런 주민 참여형 콘텐츠야말로 연희동이 내세울 수 있는 차별화 포인트다.
연희동은 독특한 라이프스타일을 구현하는 데에도 성공했다. 연희동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라이프스타일이 '킨포크'와 '보보스'다. 킨포크는 "작고 느린 삶"을 지향하는 라이프스타일이다. 계절의 변화를 즐기고, 가까운 이웃과 교감하며,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만끽하는 삶의 미학을 제안한다. 보보스는 부르주아와 보헤미안의 결합을 의미하며, 물질과 더불어 예술과 사회적 가치에 충실한 삶을 추구하는 라이프스타일이다. 연희동 골목을 산책하다 보면 동네 라이프스타일을 담은 크고 작은 개성파 브랜드를 만날 수 있다.
연희동 라이프스타일을 대변하는 로컬 브랜드로서는 연희동에 문화예술, 커뮤니티, 리빙 공간과 콘텐츠를 제공하는 '어반플레이(Urbanplay)', 뜨개질 테마의 편집숍 카페 '바늘이야기'를 꼽을 수 있다. 제로웨이스트 라이프를 실천하는 '보틀팩토리'나 단독주택 리모델링 전문 건축설계 스튜디오 '쿠움파트너스'도 연희동의 특색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브랜드다.
음식으로는 요리 교실을 운영하는 '파올로 데 마리아'와 '목란'이 대표적이다. 연희동을 일본에 널리 알린 히데코의 요리교실도 연희동 문화의 개성을 보여준다. 주민 사랑방으로 통하는 '사러가쇼핑센터'도 유기농, 외국 식자재 등 연희동 문화에 어울리는 식품으로 독자적인 정서를 구축하고 있다.
문화공간으로는 복합문화공간 '스페이스독', '연남장', 그리고 독립서점 '유어마인드'를 꼽을 만하다. 스페이스독은 영화관과 카페가, 연남장은 갤러리, 공연장, 카페가 한데 어우러진 복합 문화 공간으로 많은 이들의 발길을 사로잡는다. 유어마인드는 동네 서점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포스터와 독특한 큐레이션이 눈길을 끄는 개성파 서점이다.
단순히 물건 파는 가게가 아닌, 라이프스타일과 문화를 품은 이들 브랜드와 앵커 스토어야말로 연희동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존재들이다. 저마다의 개성을 살리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조화를 이루는 그들의 행보가 연희동 골목을 특별한 공간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킨포크와 보보스 감성의 감각적인 상품, 어반플레이와 바늘이야기의 아기자기한 소품, 보틀팩토리의 친환경 라이프, 쿠움파트너스의 독특한 건축 등 저마다 개성 있는 콘텐츠들이 모여 연희동 거리를 채우고 있는 셈이다.
동네 기업들이 참여하는 동네 축제도 연희동의 특색이다. 어반플레이, 보틀팩토리, 아터테인 등 연희동 크리에이터들은 각각 '연희 걷다', '유어 보틀 위크', '연희아트페어' 등 연희동 문화 행사를 개최해 연희동 문화를 동네 문화로 브랜딩 하는데 기여한다.
'연희 걷다'는 어반플레이가 주최하는 연희동 골목 산책 행사다. 연희동 곳곳의 개성 넘치는 가게와 공간을 탐방하며 연희동의 매력을 느껴보는 프로그램이다. 보틀팩토리의 '유어 보틀 위크'는 제로웨이스트를 실천하는 연희동 상점과 주민이 함께 참여하는 친환경 캠페인이다. 일회용품 없는 가게 만들기, 장바구니 들고 장보기 등 다양한 제로웨이스트 실천 활동을 진행한다. '연희아트페어'는 연희동 일대 예술가들의 작품을 주민에게 선보이는 지역 예술제다. 화랑, 작업실, 카페 등에서 전시, 공연, 마켓 등이 열려 연희동을 예술로 물들인다.
이처럼 연희동 크리에이터들은 각자의 개성을 살린 문화 행사를 통해 연희동 특유의 로컬 감성을 만들어가고 있다. 기업과 크리에이터 그룹이 주도하지만 주민이 즐기는, 그래서 동네 정서가 반영된 축제가 연희동의 브랜딩에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전통적인 상업 부동산 투자 관점에서 보면, 연희동은 성공하기 어려운 지역이다. 가장 큰 약점으로 지적되는 것이 비역세권이라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상권 활성화를 견인한다고 알려진 지하철역이 연희동에는 없다. 부동산 가격에 중요한 아파트 대단지, 브랜드 아파트 단지, 강남 접근성도 연희동과는 무관하다.
이런 제약에도 불구하고 연희동은 어떻게 로컬 브랜드 상권으로 진화했을까? 10여 년 전부터 포착된 연희동의 변화는 홍대 앞 상권이 연남동을 지나 연희동으로 확장하며 본격화됐다. 그 과정에서 두 개의 작은 굴다리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연희동은 애초 대학가 주변이라는 입지적 강점이 있었다. 연세대, 이화여대, 서강대 등에 인접해 문화와 지식의 바탕이 풍부했던 것. 여기에 서울 유일의 외국인 학교인 서울외국인학교, 적지 않은 외국인 주민 등 열려 있는 정서도 연희동의 숨은 자산이었다. 서울에서 보기 드문 단독주택 밀집 지역이라는 점 역시 개성 넘치는 상점들이 들어서는 데 유리했다.
특히 2010년 이후 홍대 앞 상권의 팽창이 연희동 발전의 기폭제가 됐다. 임대료 상승 등으로 홍대 앞을 벗어나려는 상인들이 먼저 연남동으로 향했고, 이들은 다시 연희동을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연남동과 연희동을 잇는 게 쉽지 않았다. 넓은 경의선과 성산로가 양 동네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두 개의 2차선 굴다리가 큰 구실을 했다. 바로 경의선과 성산로에 설치된 다리를 통과하는 보행로로 연남동과 연희동을 연결하기 가설된 것이었다. 이 굴다리를 통해 연남동발 유동 인구가 연희동으로 이동했다.
연희동의 매력은 대로변이 아닌, 사람 냄새 물씬한 골목에 있다. 주택가 사잇길을 오가며 개성 넘치는 점포를 발견하고, 그 안에서 톡톡 튀는 콘텐츠를 만나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런데 이런 골목 상권의 접근성을 높이는 데 두 굴다리의 기여가 컸다. 다리를 통과하는 유동 인구가 자연스레 연희동 골목으로 스며들 수 있게 된 것이다.
건축물의 일체감과 통일감도 연희동의 매력이다. 쿠움파트너스가 70여 개 주택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리모델링해 건축 경관의 매력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이른바 '쿠움스타일'은 건물 사이 다리와 계단, 중정을 활용해 개방감과 일체감을 갖춘 공간을 연출한다. 통일된 건축 디자인은 상권에 특별한 정체성을 부여할 수 있다.
이처럼 연희동은 대학과 주택, 다리와 골목의 조합이 빚어낸 도시 공간의 결정체다. 물리적 요건과 인적 자산이 잘 어우러져 저마다의 개성이 빛나는 상점과 콘텐츠를 퍼뜨리고 있다. 그 속에서 두 굴다리는 창조 인재와 트렌드를 연결하는 문화의 가교 노릇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과연 연희동 모델이 다른 지역으로 이식될 수 있을까? 쉽지 않지만 크리에이터 타운을 구상하는 지역이 연희동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분명 존재한다.
첫째, 지역 고유의 자산을 활용하라. 연희동은 대학가, 외국인 커뮤니티, 단독주택 등 특유의 로컬 자원을 바탕으로 창의적인 분위기를 형성할 수 있었다. 저마다의 지역이 가진 역사, 문화, 공간적 특징을 되살리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 매력적인 보행 환경을 조성하라. 연희동 방문객들은 골목길을 거닐며 개성 있는 가게들을 탐험하길 좋아한다. 후미진 곳이라도 접근이 용이하고 걷고 싶은 거리를 만들어야 상권이 활성화될 수 있다.
셋째, 개성 넘치는 앵커 시설을 유치하라. 연희동엔 유어마인드, 스페이스독, 연남장 같은 독특한 콘셉트를 가진 앵커 스토어들이 있다. 이들은 방문객을 끌어 모으는 마그넷 역할을 해 주변 상권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넷째, 로컬 브랜드를 적극 키워라. 킨포크, 보보스처럼 동네의 정서를 담아내는 브랜드가 연희동의 얼굴이 되고 있다. 지역 고유의 브랜드를 발굴해 집중 육성한다면 상권 전체의 품격도 높아질 것이다.
다섯째, 지속가능한 창작 생태계를 구축하라. 연희동은 봉제공방, 도예작업실 같은 창작 공간과 크리에이터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 이들이 상생할 수 있도록 임대료 안정화, 협업 지원 같은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해야 한다.
여섯째, 기업과 크리에이터가 주도하는 동네 축제를 활성화하라. 연희동의 어반플레이, 보틀팩토리 등은 '연희 걷다', '유어 보틀 위크'와 같은 특색 있는 동네 행사를 열며 연희동 브랜딩에 기여하고 있다. 기업과 주민이 협력하는 축제는 크리에이터 타운 형성에 큰 도움이 된다.
일곱째, 공공 도시재생, 민간 부동산 개발과 연계해 통일된 건축 디자인을 통해 공간의 정체성을 확립하라.
마지막으로 다양한 콘텐츠를 느슨히 연결하라. 연희동은 음식, 예술, 펫, 주거 등 다채로운 콘텐츠가 공존한다. 이들을 하나의 컨셉으로 억지로 규정짓기보다는 자연스럽게 결합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는 게 좋다.
이상의 교훈을 간직한다면 저층 지역의 많은 동네가 연희동처럼 매력 있는 로컬 프랜드 상권으로 거듭날 수 있으리라 본다. 쉽지 않은 과제들이지만 지역 특유의 자산을 소중히 여기고, 창의적인 인재들과 상생하려 노력한다면 분명 가능성은 열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