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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리 Jan 28. 2018

내가 마침내 폭발한 이유

2월에 파혼을 하고 11월로 새 날을 잡을 때까지 무수한 일들이 많았다. 일단 오빠와 나의 다친 마음을 봉합해야 했다. 그 다음에는 현실적인 조건들을 다시 결정해야 했고, 부모님들을 설득해야 했다. 다행인 건, 한 번의 파혼을 겪고 나서 부모님들도 우리도 많이 고집을 내려놨다는 점.




나는 내 결혼을 하루 종일 축하해줄 수 있는 정말 친한 친구들만 초대해서, 맥주를 마시고 바베큐를 구워 먹으며 깔깔거리고 싶었다. 우리의 지난한 연애사를 아는 친구들과 두루두루 오래오래 이야기하면서 지는 해를 보고 싶었다.


그러나 엄마와 아빠는 생각이 달랐다. 특히 아빠는 꼭 은행에서 결혼식을 하고 싶어했다. 오랫동안 은행에서 일하다 얼마 전에 퇴직한 아빠는, 자신이 평생을 바친 은행이 그리운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 은행이 썩 달갑지 않았다. "은행원 자식 중에 너처럼 못되고, 부모 말 안 듣고, 공부 못 하는 애가 없어!" 중학생 때부터, 나는 무릎을 꿇고 이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다. 그 때마다 마음 속으로 이빨을 부득부득 갈았다. 은행원이 뭐라고, 은행원 자식이 뭐라고, 내가 이런 소리까지 들어야 하나. 은행은 죽어도 싫었다.


엄마는 좋은 날을 받고 싶어했다. 그게 무슨 미신이냐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엄마는 그랬다. 그리고 시시때때로 나를 찾아와 아빠 말을 따르자고 나를 꼬셨다. 어느 날 나는 지쳐서 백기를 들었다. 그래요, 아빠. 언제가 가능한지 좀 그 은행 결혼식장 매니저에게 알아봐주세요. 다음 날 바로, 몇 개의 날을 추려 연락이 왔고 나는 그냥 아무 날이나 골랐다. 엄마에게도 이 날로 하겠다고 통보를 했다. 그리고 엄마는 뒤집어졌다.


상견례장을 고를 때도 말이 많았다. 아빠는, 그러니까 드라마 속에서 나올 법한 알콩달콩한 상견례 분위기를 원했다. 온 가족이 모두 참여해서 약주를 한 잔하면서 덕담을 나누는, 끝나고 나서는 사진도 찍는 그런 분위기. 오빠네 집은 오래 전에 이혼한 부모님이 겨우 합의해 상견례에 나오시기로 했는데. 아무리 상대방을 배려하자고 해도 아빠는 못내 서운해했다. 할머니도 모시고 가고 싶고, 자식이 없는 작은 아빠네까지 같이 가고 싶어했다.


그 중에 엄마는 갑자기 오빠의 인상이 안 좋다고 결혼을 반대하고, 커플 상담을 받으라고 강권하다가 내가 말을 안 듣자 폭발한 엄마는 갑자기 외할머니네로 갔다. 이 사건으로 촉발된 엄마의 친정행은 꽤 길어졌다. 끔찍한 시간이었다.


오빠의 아버님은… 각서를 한 장 써달라고 하셨다. 매달 70만원을 꼬박꼬박 줄 것, 시어머니를 내가 시어머니로 대하지 말 것. 이 각서를 우리가 써드리면 상견례에 함께 참석하시겠다고 하셨다. 나는 이 소리를 오빠로부터 건너듣고 마침내 폭발했다.


지금은 TV가 있는 곳에 방석을 깔고 앉아, 오빠에게 말했다. 밖에서 어떤 폭풍이 불어와도 나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는 아기새처럼 나를 지켜달라고. 결혼식 전날까지도 이런 보호가 불가능하다고 판단된다면, 망설이지 말고 결혼을 취소할 수 있는 담대함을 가져달라고.


오빠는 결혼을 좀 미루자고 말했다. 말은 오빠가 했지만 사실은 내가 선포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결혼을 취소했고 나는 아빠와 엄마 앞에서 화를 냈다. 결혼식장부터 청첩장 하나까지 다 아빠 마음대로 할 거면, 차라리 아빠 결혼식을 다시 하라고. 엄마가 원하는 대로 해줬는데 그게 완벽하지 않다고 몇 날 며칠 나를 들볶는 건 도대체 무슨 경우냐고. 오빠도 아버지를 찾아가 아버지가 한 바로 그 말 때문에 우리가 파혼했다고 소리소리를 질렀다고 했다.


폭풍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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