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ign & Craft : 노동하지 않는 디자이너의 디자인이야기
2019 Design & Craft
노동하지 않는 디자이너의 디자인과 공예 이야기.
어린시절 나는 운이 좋게도 부모님의 영향으로 ‘보기 좋은 형태’와 ‘비례’를 가까이서 익힐 수 있는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보기좋은 것들, 아름다운 것들, 나를 설레게 하고 영감을 주는 것들을 언젠가 내 손으로 꼭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대학에서는 실내건축을 공부했고, 학교에 다니면서 가구회사에서 인턴을 했다. 졸업 후에는 디자인 회사에 들어가서 인테리어와 그래픽디자인을 했다. 디자인도 다양한 분야가 있는데, 나는 디자인이 너무 좋고 욕심이 많이 나서 이것저것 할 수 있는 것들 다 해보려고 하다보니 잡다하게 경력을 쌓아온 것 같다. 사실 디자인 업계 급여도 박봉이고 근무 환경과 복지는 말할 것도 없고, 하루가 멀다한 야근에 가끔씩 철야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지난 모습들을 돌아보면 물론 몸이 힘들기는 했지만 매 순간 프로젝트에 푹 빠져서 열심히 일해왔다.
그런데 회사생활을 3-4년 가량 하다보니 이렇게 열심히만 일하는게 과연 내 현재와 미래인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점점 내가 없어지는 것 같은 기분도 들고 좋은 것들 새로운 것들은 계속 보면서 눈은 높아지는데 ‘내 디자인’이라는 게 어디에 있기는 한 걸까? 라는 의문도 들고. 5년후에도 계속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디자이너라면 내가 꿈꾸는 ‘나를 설레게 하는 것들’을 만들 수 있는 시점이 올 까 하는 생각에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요즘 소위 청년들이 ‘꿈’이 없다, 대기업만 가려고 한다 이런 말들을 하는데, 나는 어린시절부터 꿈꾸던 디자이너로 살아가고 있고, 매일매일 디자인을 하고 있는데도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게 맞나하는 의문이 들고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회사를 관두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리고 회사를 관두기 전 6개월은 내게 디자인은 고통이었다.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게 맞나하는 의문이 들고나니, 회사에서 클라이언트를 만족시키기 위해 하는 디자인은 노동이 되어버렸다. 찬찬히 되돌아보니, 나는 노동하는 디자이너였다. 물론 디자인은 예술과 다르기 때문에 내게 디자인을 의뢰한 클라이언트를 만족시키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이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더이상 노동을 하고 싶지가 않았다. 내가 먼저 만족할 수 있는 디자인을 하는 이기적인 디자이너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야 매일이 충만할 것 같았다.
회사를 관두고 대학원에 진학했지만, 사실 명확한 목표와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주변에서도 대학원에서 석사를 하는게 앞으로 나의 커리어와 취업에 크게 도움되진 않을 거라고 만류하기도 했지만 당장 이대로는 안된다는 생각이 앞섰다. 그래서 가장 빨리 나의 고민을 수습해줄 수 있는 대학원을 선택했지만, 여기에서 어떻게 내가 노동하는 디자이너에서 탈피할 수 있을지는 감이 안잡혔다. 일단은 이 불만족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나보자하는 도피의 선택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대학원에서 다시 디자인을 공부하기 시작한지 1년.
첫째로, 나는 다시 회사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었고, 명확하진 않지만 노동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아가고 있는 과정에 있다. 정말 감사하게도 훌륭하신 스승을 만나게 되었고, 지난 1년동안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대체 어떤 것들을 만들어 가고싶은지 원점에서부터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가좋아하는 소재, 컨텐츠, 디자인, 스토리, 브랜드 등을 탐구하다보니, 나는 디자인이 ‘잠재된 가치를 발견’하는 일이라는 포인트에서 디자인을 좋아한다는 점을 알게 되었고 버려진 것, 잊혀져 가는 것 혹은 익숙한 것들에잠재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는 디자인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정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가지는 데에 있다."
- 마르셀 프루스트 -
그래서 내가 주목한 것은 공예와 디자인의 접점, 그리고 노스탤지어다.
디자인의 지난 역사를 간략히 살펴보면, 산업혁명 이후 기계화와 대량생산의 등장으로 수공예와 장식의 영역이 생산성을 고려한 디자인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3차산업혁명 이후 4차 산업혁명까지. 격변하는 세상속에서 이제는 편리함을 넘어서 IOT, 인공지능 등 영화속에서만 만나던 첨단기술과 함께하는 삶이 점점 더 가까워 지고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생활과 디자인은 과연 첨단기술이 주도하게 될까?
디지털 기기들이 사람들의 삶을 스마트하게 만들고 있지만 까맣고, 차가운 스크린을 터치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점점 더 촉감이 풍부한 것들을 곁에 두고 싶어 한다. 소유보다는 실제 경험에 많은 가치를 두는 근래의 트렌드가 이러한 인간의 본성을 대변한다.
현재 국내외에서 아날로그, 노스탤지어, 빈티지, 레트로 등 스타일은 조금씩 다르지만 전반적으로 ‘과거 지향적’이라는 트렌드가 몇 해에 걸쳐 대두되고 있다. 해외에서는 클래식이 다시 부활하면서 벨에포트 시대처럼 샹들리에, 금장 장식 등 풍요롭고 평화로운 시대를 그리워하는 항수가 반영된 무드가 등장 하고 있고, 한국에서는 우리가 좋았던 시절로 기억되는 1970-80년대의 동네와 골목이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최근에는 개화기 시절, 서구 문물이 유인되면서 한국적인 것들과 믹스되었던 독특한 경성 스타일까지 부상했다.
이렇게 다시 옛날 것이 뜨고 있다. 다만 복고가 아니라 뉴트로라는 새로운 트렌드로 다시 찾아왔다. 과거 황금기의 대표 제품을 복각한 상품이 전통, 헤리티지를 강조하여 새롭게 선보이고, 모자라고 낡은 것이 인기를 끄는 ‘와비사비’라는 미학도 재조명받고 있다.
동시에 근래 교통과 소셜 미디어의 발전은 거리상의 물리적 한계를 벗어나 지구를 점차 하나로 연결하고 있다. 덕분에 세계 곳곳에 숨어있는 잘 알려지지 않은 문화까지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고 로컬리티가 부상하게 되었다. 세계 곳곳의 지역마다 전통적인 제작 방식과 소재를 모던하게 재해석한 작품이 세계적으로 이슈화 되고 있고, 기업들도 전통 수공예와 디자인을 점목하는 헤리티지를 강조한 제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일례로 국내에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이케아에서는 사람들이 아름다운 오브제를 만드는데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 기술이 필요한지를 이해하고 인도의 사회적 기업에 소속된 공예가들과 협업한 헤미오르드 컬렉션을 출시 했고, 존 하디라는 주얼리 회사는 인도네시아 발리의 쥬얼리 제작 전통에서 영감을 받아 현지 장인들과 파트너쉽을 맺고 장인 공동체를 창립해 브랜드를 탄생시켰다.
아무리 첨단 신기술이 계속에서 진일보하고 있다고 하지만 인간본성을 자극하는 '손맛'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말은 그냥 스칠말이 아니다. 손맛의 가치를 기계화의 반대적 의미가 아니라 정직한 노력, 시간이 주는 놀라움, 사람과 사람,사람과 지역, 사람과 소재 사의 관계를 만든다는 데 있다.
노동하지 않는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회사를 관두고 대학원에 와서 찾은 나의 방향이미래지향적 기술과 첨단 디자인이 아니라 가장 원초적인 공예, 핸드크라프트라는 점이 아이러니 하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잊혀져가고 오래된 것들로 치부되는 남미와 동아시아의 핸드크라프트 문화, 카펫, 금속공예를 지키고 있는 지역 장인들과 컨템포러리 디자이너들의 관계맺음으로부터 ‘가치 디자인’이 탄생할 수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