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사 <이미지란 무엇인가>를 읽고
회사에 한 명의 책 친구가 있다. 늘 내가 추천해 오다 이번엔 내가 책 친구에게 영업을 당했다. 그렇게 민음사의 인문 ‘탐구’ 시리즈 7번째 책 <이미지란 무엇인가>를 읽게 되었다. 소장 욕구를 마구 불러일으키는 깜찍한 표지의 교양 철학책이다.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작은 사이즈라 자꾸 만지고 싶은 예쁜 책. 마치 에세이 한편을 담고 있을 것 같은 모습을 한 덕분에 손은 쉽게 가는데 내용은 정말이지 쉽지 않다. 근대 철학부터 현대 철학까지 당대 유명했던 철학가들의 사상을 파헤치며 이미지를 탐구하는 작고 깊은 책이다.
서양 철학에 대한 얕은 지식만을 가지고 책을 읽었다. 아마도 내용을 모두 이해하려고 덤볐다면 중간에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어렵지만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던 이유는 저자가 소개하는 철학자들의 사유 과정 그 자체가 감탄스러워서다. 1부 에서 소개되는 데카르트와 흄은 상반된 다양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둘의 공통된 정의가 하나 있었다. ‘세계는 우리에게 이미지로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흐름 자체가 흥미로워 책의 주제를 잊고 빠져들기도 했다.
그리고 어떤 사상에 대해 내 의견이 없이 단순히 받아들이기만 하면 위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떤 시기에 이것이 정답이었다가도 문제 제기를 통해 새로운 것이 정답이 되고, 또다시 그 정답은 새로운 문제 제기로 인해 또 다른 새로운 정답에 자리를 내어준다. 세상이 발전해 온 방식이 그러하다는 생각이 드니 비즈니스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고 하반기 작은 변화에 대한 내 결심에 약간의 응원이 되기도 했다. 세상에 정답은 없고 정반합을 반복 또 반복하며 옳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닐까. 그 정반합을 넘어선 도전, 그게 혁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1부는 데카르트, 흄, 플라톤의 이야기를 통해 이미지에 대한 ‘불안’의 역사를, 2부는 현대 철학으로 넘어가 장폴 사르트르의 ‘이미지의 본성은 자발성’이라는 사상을 소개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온라인 세상을 언제까지 ‘가상’이라는 낡아빠진 관념으로 이야기할 것이냐는 문제를 제기하며 전통 형이상학의 개념인 ‘가상’이 더 이상 현대의 매체 환경을 설명하는 데 유용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1, 2부에 나오는 철학자들의 사상은 그동안 한 번씩은 책으로 접했던 터라 나름 흥미롭게 읽었는데, 3부의 들뢰즈의 사상은 조금 어려웠다. 들뢰즈, 칸트, 베르그손의 사상을 연이어 소개하며 시간의 본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사실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 글씨를 그 자체를 읽어 나간다는 생각으로 3부를 버텼다.
그렇게 버틴 후 <나가며> 파트에서 접한 저자의 통찰력 있는 질문과 사색의 결과들은 내 뇌를 몹시 행복하게 했다. 업이 업인지라 10년 가까이 ‘광고’에 대한 딜레마를 늘 가지고 있다. 광고의 생산자이면서 동시에 광고를 ‘스킵’하는 소비자로서 깊이 사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 책이다.
이 책과의 만남으로 읽어야 할 책이 4권이나 늘었다. 민음사 탐구 시리즈의 다른 책도 읽어보고 싶어 첫 번째 책인 <철학책 독서 모임>을 구입했다. 2부에서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의 책 속 한 구절이 소개되어 책장에 잠들어 있던 이 책을 꺼내어 가까운 곳에 두었다. 언젠가 읽으리라는 마음으로. 그리고 서양 철학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싶어 <즐거운 서양철학사>와 <한눈에 읽는 현대 철학>을 구입했다. 택배로 오는 중! 책 속에서 읽고 싶은 또 다른 책을 만났을 때의 기쁨이란. 그리고 6월 #라니_독서 마지막 책으로 업데이트시켜 준 나의 유일한 책 친구, 우리 마케팅팀 강팀장에게 무한 감사를.
마지막으로 '콘텐츠는 더 이상 스스로 예술이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말, 소모적인 것이 되기를 자처한다'는 말이 너무 공감되어 문장을 통으로 적어본다.
[작금의 시대에 우리는 벤야민이 그의 시대에 목격했던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아우라가 사라지고 있음을 안다. 권위를 위협받는 이들은 두려움에 휩싸여 콘텐츠의 세속성을 지탄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뜸 묻는다. 우리가 만들어 낸 클립, 쇼츠, 릴스가 상품 광고로 점철된 드라마, 거대자본의 수주를 받아 제작된 영화와 무엇이 다른가? 콘텐츠는 더 이상 스스로 예술이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예술작품이 닿을 수 없이 먼 곳에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근본적을 양자 사이에 그 어떤 본상상의 차이도 없기 때문이다. 지난 세기의 예술 작품과 달리 콘텐츠는 영원불멸의 가치를 간직하는 것이 아닌 소모적인 것이 되기를 자처하며, 즉각적이며 직접적인 전파의 과정 속에서 그 자신의 형체를 남기지 않은 채 흩어져 사라진다. 23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