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으면서 발견한 영감의 조각들
혼자 산책하는 것을 좋아한다. 회사 근처를 걷다가 좁고 긴 골목을 만날 때면 마치 목적지 없는 여행길 같아 설레기도 한다. 스튜디오, 에이전시 같은 회사들과 사람이 사는 집들이 섞여 있는 곳. 건물 외벽과 주택 담장에 내가 좋아하는 초록 식물들이 질서 없이 뒤엉켜 있는 동네. 이 골목들을 걸을 때 좋은 생각이 떠오르는 경험을 한 뒤로 산책을 더 사랑하게 됐다.
요즘처럼 습하고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은 학동공원의 흙냄새가 골목 가득 퍼진다. 여기가 강남 한복판이라는 사실을 잊고 자연에 온 듯 사색에 잠기기도 한다. 오후 3-4시 경의 학동공원은 고령화 시대를 증명하는 풍경이 펼쳐진다. 꽤 많은 노인들이 벤치에 앉아 부채질을 하며 하늘을 보거나 허공을 보는 모습.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내가 백발노인이 되어 한 여름 대낮에 이런 공원에 앉아 있게 되면 무슨 생각을 할까. 자식들은 일하고 있을 테고, 손주들은 공부도 하고 유튜브도 보면서 치열하고 무료하며 장난기 가득한 날들을 살아내고 있겠지. 카톡에 손주 사진 안 올려주나. 이따 저녁은 뭘 해서 먹을까. 종교 하나 가져볼 걸 그랬나. 요즘은 시집이 재미있네. 주말에는 영감이랑(ㅋㅋㅋ) 어디 좋은 데 바람이나 쐬러 갈까. 뭐 이런 사소한 생각들을 하지 않을까. 걱정과 고민보다는 일상적인 생각을 더 자주 하는 구십 노인이 되어있다면 나 잘 살았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공원을 지나간다.
걸음걸음 내디딜 때 느껴지는 발바닥의 감각에 집중해 보기도 한다. 날숨에 나쁜 욕심은 내려놓고 들숨에 건강한 욕망을 들이쉰다고 상상하며 마치 명상을 하듯 걸어볼 때도 있다. 참 별나다 싶으면서도 이 시간 이 골목에 걷는 사람이 나 하나네 싶을 때는 괜히 뿌듯하기도 하다.
미대에서 만난 개성 강한 친구들, 일하면서 만나게 되는 4차원적인(대단하다는 의미의)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참 평범하다 싶어 그게 못마땅하던 때도 있었다. 특이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지만 기질을 바꾸기란 쉽지 않다. 보통에서 벗어나 있는 돌i 같은 결정을 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한 적도 많다. 그런 순간들이 쌓여 지금의 내가 된 거겠지.
‘내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언제부터 품었더라? 걷는다는 행위가 장애만 없다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인 것처럼 ‘내가 되자’는 소망도 당장에 이룰 수 있으면서도 영원히 이루지 못할 것 같은 꿈이다.
간단하면서 어려워 보이는 이 꿈은 하루를 더 잘 살고 싶게 만드는 도덕적 원동력이 된다. 이런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가 아닌 ‘나는 내가 되고 싶다’는 다짐, 목적 없는 산책을 하며 얻은 깨달음이다.
-가장 느린 이동 형태인 걷기는 더 진정한 자기 자신을 만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에릭 와이너 -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