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릴케 Oct 15. 2024

릴리의 정원

챕터 1.릴리의 다락방

릴리의 다락방에서는 시간이 멈춰 있었다. 릴리가 시간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락방의 작은 창문을 통해 정원을 내다보는 것이었다. 고요한 다락방 창 밖으로 릴리는 자신만의 숨소리만을 들을 수 있었다. 릴리는 종종 정원에서 일어나는 반복적인 장면을 바라보며 살았다. 그때까지 릴리는 아무런 이상함도 느끼지 못했고, 평소처럼 일상을 보냈다.


비가 내리던 어느 날, 릴리는 정원 울타리 밖에서 비에 흠뻑 젖어 떨고 있는 새끼 고양이를 발견했다. 비를 피할 곳 없이 비를 맞고 있던 그 새끼 고양이를 한참 바라보던 릴리는 침대에 앉아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릴리가 그 고양이를 바라보던 기억은 그녀가 책을 고르던 책장 옆의 투명한 책장에서 기록되고 있었다. 릴리가 이 숨겨진 책장을 발견하고 비 오는 날 정원 울타리 밖에서 보았던 고양이에 대한 기록을 읽는 날은 아직 멀었다.


어느 날, 릴리는 창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를 들었다. 호기심에 창문을 열어 듣고 싶었지만,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창문을 열지 않고 그저 창가에 가까이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소리는 희미하고 알아듣기 어려웠지만, 분명히 한 문장이 들렸다.


‘너는 몇 살이니?’


그날 릴리는 시간을 가리킬 수 있는 단어를 종이비행기에 적어 처음으로 기록했다. 그 단어가 릴리의 다락방에 기록되면서 그녀는 시간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 동시에 릴리의 다락방에도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자 릴리의 마음속에 하나의 궁금증이 생겼다.


창밖에서 자신의 나이를 물었던 목소리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그 목소리가 다시 돌아오길 기다리며 릴리는 창가에 귀를 대고 있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 목소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는 것을 느끼게 된 이후로, 릴리는 이전처럼 고요한 다락방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견디기 힘들어졌다. 시간이 흐르기 전에는 그저 고요히 있는 것이 가장 쉬웠지만, 이제는 그 변화를 견디기 어려웠다.


그녀에게 매일매일이 고통이었다. 매 순간 시간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눈을 뜰 때마다 그 목소리를 다시 듣기를 기대했지만, 그 기대는 매번 실망으로 돌아갔다. 그러다 릴리는 결국 눈을 뜨지 않겠다고, 다시는 깨어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눈을 뜨고 나니 릴리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아무리 오래 자도, 눈을 뜨는 순간 시간이 다시 흐르며, 눈을 감기 전의 시간은 단 한순간도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왜 나를 부르나요?’


‘소리가 들려요.’


나를 부르고 있어요.


‘잠에서 깨어나고 싶어요.’


‘내 소리와 같은 소리.’


흔들려요.


‘말하기가 무서워요.’


‘아무리 멀리 있어도, 나는 그것을 듣고 즉시 알아차려요.’


모습이 변해도.


‘내 소리와 같은 소리.’


늙었든 젊었든, 어디에 살든. 아니, 나는 무섭지 않아요.


‘나는 죽음이 뭔지 몰라요, 알겠죠?’


그렇다면 나는 죽을 수 없는 거겠죠? 다시 물어볼게요.


‘그럼 나는 살아있는 건가요?’


하지만 당신은 누구인가요?


‘나는 당신이 궁금해요. 당신을 만나러 가야겠어요.’


릴리는 결국 어딘가로 사라졌고, 다락방 창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다. 릴리가 사라진 후에도 굳게 닫힌 다락방 창문은 여전히 크리스틴을 비추고 있었다. 릴리가 사라진 후 크리스틴은 대부분의 날을 지치고 무기력한 상태로 보냈으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조차 잊어버렸다. 그녀는 종종 지나가는 장면을 바라보며, 모든 사람들이 왜 움직이는지, 더 정확히는 왜 움직여야 하는지를 궁금해했다.


‘움직일 수 있다고 해서 항상 움직여야 하는 건 아닌데, 왜 우리는 움직일까요?’


어느 맑은 날, 크리스틴은 지저귀는 새들의 모습을 지켜보았고, 또 다른 날에는 빛나는 나뭇잎들이 지면에 드리운 그림자의 파도를 지켜보았다. 그녀는 가끔 카페의 테라스에 앉아 커피를 마셨고, 어느 날은 카페 앞에 떨어진 편지를 주워 읽었다. 편지를 집어 들고 테라스 의자에 앉아 편지를 읽어보려던 그녀는 그만 커피를 조금 흘렸고 커피의 얼룩 때문에 편지의 발신인을 읽지 못했다.


릴리가 사라진 동안 크리스틴의 하루는 너무나 길었고, 릴리의 부재도 그만큼 길게 느껴졌을 것이다.


릴리잃어버린 시간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은 릴리의 귀환과 함께 돌아오며, 그동안 흐른 시간을 함께 가져왔다. 릴리와 크리스틴의 시간을 감지할 수 있는 사람은 대나무처럼 비어 있으면서도 그들의 시간을 예리하게 감지하는 크리스틴 이브였다. 그래서 때로는 그들 자신과 혼동하기도 했다.


그럼 나는 누구일까?


릴리는 나를 만나러 가겠다고 하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나는 릴리를 볼 수 있지만,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나는 도울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릴리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릴리의 발자취를 따라 그녀가 무사히 나를 만나러 오면, 나도 내가 누구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릴리의 다락방은 너무나 커서 그녀가 모든 구석을 탐험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녀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다. 다락방에는 그녀가 읽을 책으로 가득 찬 책장과 편안한 침대있을 뿐이다. 릴리는 가끔 책에서 페이지를 찢어 무언가를 적고 창밖으로 던지곤 했다. 누군가가 그것을 읽길 바랐는지, 혹은 누군가에게 보내려 했는지 그녀도 알 수 없었다.


릴리는 책장 옆에 있는 투명한 책장 속으로 사라졌고, 이제는 나조차도 그녀가 어느 책에 숨겨져 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릴리가 종이비행기를 날리는 습관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가끔 빈 다락방에도 종이비행기가 날아들어, 나는 그 비행기에 적힌 글을 통해 릴리의 소식을 알 수 있었다.


최근에 도착한 비행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친구를 사귀었어요. 별이 달린 긴 망토를 두른 호박 유령이에요.”


데자뷰가 밀려왔다. 릴리가 전에 같은 메시지를 보낸 적이 있던가?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그런 비행기가 날아온 적은 없었다. 나는 릴리가 처음 보낸 비행기를 다시 떠올렸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파란 우산.”


릴리는 나에게 무엇을 말하려 했던 걸까?


릴리가 사라진 이후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다만 나는 그녀의 책장 옆에 있는 투명한 책장 속 기록을 읽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놓고 고민하고 있을 뿐이다. 종이비행기를 펼치면 그 내용은 투명한 책장에 기록되는 것 같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 기록을 읽을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지만, 지금은 그 안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궁금하다. 릴리의 상태와 관련이 있는 것일까? 이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나는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되었다.


투명한 책장에는 릴리가 잃어버린 순간들이 담겨 있다. 그 안에는 그녀가 보낸 종이비행기와 한때 그녀가 가지고 있던 잊혀진 기억들이 들어있다.


나는 그 기록을 읽기가 두렵다.


릴리가 사라지기 전에 그녀가 느꼈던 감정을 알고 싶지 않다.

그녀가 얼마나 고통받았는지 기억난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책장에 있는 모든 책을 읽었지만, 여전히 답을 찾지 못했다. 아마도 잃어버린 페이지들의 기록은 투명한 책장 속에 다른 것들과 함께 저장되어 있을 것이다. 내가 책을 읽는 동안, 종이비행기들이 다락방을 가득 채울 만큼 쌓여갔다. 나는 그중 하나를 펼치기 시작했다. 글 대신 장면이 나타났는데, 마치 영화를 종이 형태로 접어놓은 것 같았다. 나는 릴리가 방문했던 장소들을 목격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많은 친구를 만나고 여행을 다녔던 것 같다.


종이비행기를 통해 나는 릴리가 본 것들을 볼 수 있었다. 장면들은 마치 무성영화처럼 내 앞에서 펼쳐졌고, 말없이 나와 소통하려 했다. 릴리는 투명한 책장 속의 페이지 안에서 꿈을 꾸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그녀가 보는 것은 모두 환상일까? 모든 것이 너무 생생하게 느껴졌다… 소리를 듣고 싶다는 갈망에, 나는 그녀의 책에서 읽은 글들과 장면을 겹쳐보며, 그녀의 고요한 비전에 내 해석과 소리를 더했다. 그리고 간절히 바라기를, 그녀가 보는 것이 단순한 꿈이 아니기를 바랐다. 만약 그게 꿈이라면, 그것이 현실이 되길 바랐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다시 시간의 흐름에 갇히게 되었다. 내가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던 시간은 얼마나 지났을까? 릴리가 사라졌는데도 어떻게 종이비행기를 보낼 수 있었는지, 그 비행기들이 다락방 창문을 넘어 정원으로 날아갈 수 있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곳에 릴리와 나 외에 다른 존재가 있는지 알아내야겠다. 나는 릴리의 책장을 몇 번이고 다시 읽어야만 한다. 나는 알아야 한다. 언제쯤 내가 투명한 책장의 기록을 읽을 수 있을지 알고 싶다. 숨을 가다듬으며, 나는 투명한 책장의 기록이 종이비행기에 적힌 것과는 약간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책장을 읽는 데는 순서가 있는 것 같다.


이제 나는 확신한다. 책을 읽는 데는 순서가 있다!


그때 릴리가 시간과 소리가 다락방으로 돌아오기 전을 기억했다. 투명한 책장의 기록들이 책장의 책들에 순서를 부여하고 있었고, 나는 릴리의 감정이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그곳에 기록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책들은 투명한 책장 속의 기록과 일치하는 특정한 순서로 읽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릴리가 시간의 흐름과는 무관하게 어떤 일을 겪었는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릴리는 사라지기 전에 항상 책을 읽었는데, 그녀가 처음 읽었던 책이 무엇이었는지 떠올리려 했다.


책장으로 다가가, 릴리가 읽고 있던 책과 비슷한 책을 찾아보았다. 제목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갑자기 표지가 떠올랐고, 나는 같은 표지를 가진 책을 집어 들었다.


책의 제목은 "당신의 책이 여기 있습니다"였다.


나는 이 책을 오랜 시간 동안 들여다보며, 릴리가 투명한 책장 속에서 어느 장면을 여행하고 있을지 생각했다. 그녀의 종이비행기에는 호박 유령 친구를 만났다고 적혀 있었지만, 그 이후로는 이미지로만 소통했고, 말은 없었다.


나는 그 장면을 찾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 이유는 종이비행기의 한 장면이 펼쳐지면, 이윽고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남겨진 것은 릴리의 감정뿐이며, 그것은 투명한 책장에 기록되어 있다. 나는 그 순간을 더 이상 기억할 수 없지만, 종이비행기를 보았을 때 내가 가졌던 생각만은 기억하고 있다. 그때 릴리는 많은 친구를 만났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이것이야말로 나의 절망일 수 있다는 것을. 비록 내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투명한 기록 속의 희미한 떨림을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망설였다. 그 책은 복잡했고, 내가 실수라도 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 같았다. 페이지들의 미로를 탐색하는 듯한 감각이 나를 사로잡았고, 나는 릴리가 여행 중에 종이비행기 형태로 흔적을 남겼다는 것을 의심하게 되었다.


나는 아직 접혀 있는 또 하나의 비행기를 펼쳤다. 그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나는 많은 친구를 만났어요.”


이번에는 글로 적혀 있었다. 하지만 다시 절망에 빠졌다. 이 책에는 친구를 만나는 장면이 너무 많아서 정확한 순간을 찾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절망 속에서 모든 것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이 종이비행기가 나에게 예전과 같은 생각을 가져다주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많은 친구를 만났어요.”


그 문구를 따라 나는 책 속의 특정한 순간을 찾기 시작했다. 릴리가 만난 호박 유령은 이 책에 언급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친구를 만나는 여러 장면 중 하나를 따라가야 했다. 방향을 정한 뒤, 나는 다시 투명한 책장을 바라보았다. 한 권의 책이 떨리고 있었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책이 이제는 두드러졌고, 그 책의 페이지들이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내 눈앞에서 나는 이것이 릴리가 처음 읽었던 책임을 깨달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