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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케 Oct 16. 2024

릴리의 정원

챕터 2. 릴리의 투명한 책장의 기록

나는 펼쳐진 페이지 중 하나를 가까이 당겨 크게 펼쳐 보았다. 마치 커다란 영화 스크린에서 장면이 재생되는 것처럼. 나는 한 남자의 뒷모습을 본다. 그가 앉아 있는 의자 앞에는 종이로 가득한 벽이 있다. 그는 어떤 문제를 풀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복잡한 퍼즐을 풀 생각에 지친 그는 머리를 쓸어 넘기고 의자에 기대어 앉는다.


다른 장면이 펼쳐진다. 남자가 종이를 장작불 위에 던지고 있다. 마치 드디어 문제를 해결한 듯, 그는 동료들과 함께 기뻐하며 웃고 있다. 어려움에서 해방된 모습이다.


또 다른 장면에서는, 맑은 하늘 아래 한 남자가 커다란 신전의 기둥에 새겨진 문구를 손가락으로 만지고 있다. 이 남자는 고대 의복을 입고 있으며, 더 나이 들고 엄숙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는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보인다. 기둥에는 ‘너 자신을 알라’라고 새겨져 있다. 갑자기 누군가 그 남자를 뒤에서 부르자 그는 돌아본다.


나와 눈을 마주친 걸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나는 이 장면을 다락방에서 보고 있으니 그가 나를 볼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런데… 이 기분은 뭐지? 마치 우리가 눈을 마주친 것 같았다. 장면이 다시 바뀐다.


이번에는 그 남자가 비행기에 타고 있다. 그는 옆에 앉은 여성을 위협하고 있는 듯하다. 페이지가 빠르게 넘어간다. 예전에 봤던 그 남자다. 이제는 더 나이 들어 얼굴이 여위었고, 입에 시가를 물고 있다. 그는 정장 차림으로 많은 사람들 속에 둘러싸여 있다.


다른 장면이 펼쳐진다. 이번에는 남자가 화려한 목욕탕을 걷고 있다. 카메라는 그의 다리에 초점을 맞춘다. 그는 목욕탕에 들어가, 얼굴과 상체만 드러낸 채, 양팔을 욕조 가장자리에 올리고 무표정하게 있다. 카메라가 뒤로 물러나면서 금빛 장식으로 뒤덮인 목욕탕 전체가 드러난다. 작은 폭포들이 벽을 타고 흘러내리지만, 바닥에 닿기 전에 사라진다.


이제 남자는 고급 소재로 만들어진 검은 로브를 입고 복도를 지나 큰 도서관에 들어간다. 그는 중앙의 책상에 앉아 낡은 타자기로 원고를 쓰기 시작한다. 그와 비슷한 검은 로브를 입은 누군가가 조용히 방에 들어온다. 그녀는 책장에서 책을 하나 꺼내 만족스러운 듯 그것을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하지만 남자는 사라졌고, 타자기도 사라졌다. 그녀 역시 사라지고, 책만이 책상 위에 남아 있다.


커튼이 뒤에서 흔들린다.


창문을 통해 밝은 달빛이 비쳐 들어오며 기묘한 빛을 발한다.


달을 계속 바라보고 있을 때, 누군가가 손을 뻗어 달을 잡고 그것을 다이아몬드로 바꾼 것처럼 보인다. 그 다이아몬드는 목걸이가 되어, 얼굴이 가려진 누군가가 착용하고 있다. 그 사람이 방에 들어왔다가 이내 사라진 여자임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녀만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존재임을 알았다.


페이지가 다시 넘겨지고, 이번에는 아름다운 정원에서 한 남자가 사과나무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그 장면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마치 달을 따서 보석으로 바꿔 목에 걸던 그 여자처럼, 사과를 따기 위해 손을 뻗는다. 놀랍게도 사과가 떨어지면서 남자의 시선을 끌었다. 시간이 흘러, 이제 휠체어를 탄 소년이 같은 정원에 있다. 그러나 그곳은 마치 영화 세트장 같다. 안경을 쓴 그 남자의 눈빛이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그가 어떤 영화에서 영국 마법사를 연기했던 것을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그 영화를 어디에서 봤던가?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페이지는 내 생각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넘겨졌다.


빨간 망토를 입은 어린아이가 나타났다. 릴리처럼 보인다. 그녀는 내가 페이지를 보는 것처럼, 우주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영화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다. 그 스크린은 마치 인생이 눈앞에서 빠르게 지나가는 듯한 모습으로 깜빡거리고 있다. 망토 속의 그녀의 얼굴은 가려져 있고, 망토 속 그림자만이 스크린의 장면들을 비추고 있었다. 이것은 내가 한때 보았던 투명한 책장의 기록을 떠올리게 한다. 아름다운 정원의 사과나무를 바라보던 남자와 안경을 쓴 남자가 계단에서 넘어지던 장면.


빨간 망토를 입은 아이는 이제 커다란 검은 종이비행기를 타고 있다. 그녀가 물처럼 흐르고 깊은 공간을 가지고 있는 종이비행기의 날개에서 책을 꺼내어 무언가를 적고, 어딘가로 날아간다.


이제 주황색 망토를 입은 소녀가 기둥 옆에 서서 무언가를 쓰고 있다. 그녀의 뒤에는 빛나는 해변과 호박 모양의 배가 정박해 있다. 예전에 나이 든 남자가 보았던, 기둥에 새겨진 문구는 이 소녀가 적은 것일까?


뭔가 이상하다.


소녀는 무언가를 쓰고 있는데, 나는 글자가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잉크가 다 떨어진 걸까?


그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모든 것이 어두워졌다.


다시 장면이 밝아졌을 때, 노란 망토를 입은 아이가 커다란 검은 구체 옆에 서 있다. 그녀는 누군가와 대화하고 있는데, 마치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손을 뻗어 노란 열기구에 매달린 등불에 검은 불꽃을 밝혔고, 열기구는 검은 구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강한 바람이 장면을 휘저으며, 초록색 망토를 입은 아이가 커다란 잎을 타고 나타났다. 그녀는 자기보다 큰 펜을 들고 있었고, 그 펜에는 세 개의 작은 시계가 박혀 있었다. 시계마다 빛나는 글자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녀가 펜을 움직일 때마다 초록색 잉크가 하늘에 무언가를 쓰며 흘러나왔다.


한참을 지켜보다가, 장면이 다시 바뀌었다. 이번에는 파란 망토를 입은 아이가 투명한 거품 속에서 지구를 바라보고 있다. 그녀는 아래에서 뱀처럼 구불구불 흐르는 강을 보며 생각에 잠긴 듯 보인다. 그러다 결심한 듯, 얇은 종이 같은 화면을 꺼내어, 내가 들고 있는 페이지와 비슷한 것을 꺼내어 무언가를 적고 사라졌다.


나는 펜을 찾았지만, 다락방에는 펜이 없었다. 릴리가 사라졌을 때 그녀의 펜도 사라졌다. 그것이 그녀에게 소중했을 것이다. 그녀가 가지고 갔으니.


그러던 중 책이 떨어지는 소리에 페이지에서 시선을 돌렸다. 책장이 흔들리면서 몇 권의 책이 바닥에 떨어졌다. 제목은 ‘벨라의 할로윈 레드’, ‘벨라의 할로윈 오렌지’, ‘벨라의 할로윈 옐로우’, ‘벨라의 할로윈 그린’, 그리고 ‘벨라의 할로윈 블루’였다. 나는 그 책들을 빠르게 읽었고, 더 많은 할로윈 책들이 있을 것이라고 느꼈다.


그러나 투명한 책장은 내게 친절하지 않았다. 더 이상의 페이지를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더 읽고 싶었지만, 릴리의 행방을 담은 종이비행기를 펼치는 대신, 책장을 무작정 뒤적이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책이 떨어진 구석에서 큰 검은 깃펜을 발견했다. 나는 그것을 집어 들어, 남은 할로윈 책을 내가 직접 쓰기로 결심했다. 제목은 이전 시리즈를 따랐다. ‘벨라의 할로윈 네이비’, ‘벨라의 할로윈 퍼플’, ‘벨라의 할로윈 그레이’, 그리고 ‘벨라의 할로윈 블랙’.


나는 제목을 쓰자 펜이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목에 맞춘 이야기를 매끄럽게 써 내려갔다. 모든 것이 수월하게 진행되었고, 나는 책을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릴리의 감정이 투명한 책장에 기록되었던 것처럼, 이제는 나의 감정도 기록되는 듯했다.


이상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 순간 갑자기 종이비행기 하나가 날아들었고,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망토를 입은 소녀가 철로 된 구체 안에 앉아 있다.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그녀는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녀는 구체의 틈새를 들여다보았고, 나를 알아차린 듯 나를 향해 살짝 미소를 지었다.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나를 보고 있는 것일까, 내가 그녀를 보고 있는 것처럼?


라색 망토를 입은 소녀가 그다음에 나타났다. 그녀는 솜사탕 구름 위에 떠 있었고, 긴 검은 머리를 묶고 있었다.


그녀가 지나가는 곳마다 우주의 어두운 공간이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다음으로 회색 망토를 입은 소녀가 나타났다. 그녀는 빛나는 투명한 나비 브로치를 달고 있었고, 자신보다 큰 낫을 들고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그것은 사실 펜이었다. 나는 그 세부 사항을 생각하지 않았는데, 펜이 내가 쓰는 대로 빈틈을 채우고 있는 것 같았다.


정색 망토를 입은 아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종이비행기의 장면이 끝나기 전에 사라졌기 때문이다.


물론이다.


왜냐하면 내가 검정색 망토를 입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투명한 책장 속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릴리가 사라졌던 것처럼, 펜이 이끄는 대로 나도 따라가기로 했다. 나는 파란색 망토를 입은 아이가 내가 들고 있는 페이지와 비슷한 페이지들을 가지고 있던 것을 기억했고, 내가 그것을 복사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나는 그려진 페이지들과 내 검은색 망토를 손에 들고,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로 들어갈 준비를 했다.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다락방에 메모를 남기고 책장 속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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