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지만 참 고맙다

2024년 12월 22일

by 리르리안

좋은 저녁입니다. 아침에 출근을 하다가 그 짧은 5분의 거리를 걸으며 콧물과 재채기로 뒤범벅이 된 마스크 뒤를 생각하면 과연 좋은 날인가 싶지만,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는 게 느껴지긴 하니 좋은 날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저희 동네에는 몇 달 전부터 전기버스가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한 노선은 아예 모든 버스가 전기버스가 되었고, 그 외 노선도 하나 둘 전기버스가 다니는 걸 보며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록 경기도권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시골이라고 생각하는 이곳에도 저렇게 전기 버스가 다니는 걸 보며 새삼스럽게 신기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전기버스를 타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니, 싫어합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멀미가 나기 때문입니다. 20대 중반, 그러니까 군대를 갔다 온 이후로는 3시간 이상 고속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핸드폰으로 유튜브를 보고 있어도 멀미 기운이 전혀 없는데, 전기버스를 타고 10분 이상 앉아 있으면 저도 모르게 멀미가 납니다. 처음에는 빈 속에 장거리 — 어디를 가려고 하면 최소 시내버스를 40~50분은 타야 하다 보니 그런 거일 수도 있다고, 아니면 술을 마셔서 속이 울렁거리는 데 유튜브를 뚫어져라 보고 있으니 그랬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최근에 점점 그 빈도가 높아지는 것 같아 생각을 더듬으니 모든 그 상황에 공통적으로 있던 것이 전기버스였습니다.


처음에는 나만 그런가 싶어서 어디 말도 못 했는데, 혹시나 해서 구글에 전기버스를 검색하려 하니 연관검색어로 멀미가 뜨는 걸 보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만 그런 건 아니었구나. 조금 더 찾아보니, 전기모터의 특성상 가속 및 감속이 내연 기관보다 압도적으로 빨라 운전자의 습관에 따라 급가속과 급정지를 자주 하면 멀미가 나기 쉽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전기 버스가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 남아있는 기사님들의 운전 습관이 장거리 운행과 맞물려 더 쉽게 멀미가 나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멀미가 나면 잠시 보던 유튜브를 끄고 창문 밖을 바라봅니다. 별로 보고 싶지 않은데 멀미를 덜 하고 싶어서 제 몸 상태에 집중을 하느라 힘든 시간을 보내면, 이게 뭐 하고 있는 건지 싶습니다. 차라리 서서 갈까 싶으면 앞으로 가야 할 길이 30분이 넘는데 서서 가는 건 다리가 아프고, 중간에 내려서 좀 숨을 고르고 다시 타거나 아예 다른 노선을 탈까 생각해 보면 꼭 그럴 때는 막차를 탔거나 약속을 미룰 수 없는 상황입니다. 결국 울렁거리는 속을 부여잡고 억지로 전기버스의 움직임과 바깥 풍경의 움직임을 일치시키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15분 내지 20분을 타고 가면 멀미가 조금은 가라앉는 느낌입니다. 그렇다고 그 상태에서 유튜브를 본다거나 하면 다시 멀미를 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그날은 그냥 주변 풍경을 계속 보기로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몸과 마음의 여유가 생긴 상태로 바깥을 보고 있으면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어느새 모든 초록빛을 벗어던진 산, 시골과 도시를 오가는 풍경 사이에 새로 생긴 베이커리 카페를 발견하고, 얼마 전까지 아무것도 없다고 하던 신도시에는 어느새 아파트와 상가가 줄지어 들어와 있는 모습까지. 주머니 속의 작은 화면에 갇혀 관심을 두지 않던 주변의 변화를 그런 식으로 느끼게 됩니다.


제 인생에서 전기 버스 같은 존재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같은 목표를 향해 나름 원만한 관계를 갖고 있었지만 특정 부분에서 맞지 않아 다툼이 있었고, 그것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저의 새로운 모습을 찾게 되거나 기존의 주변 관계를 다시 돌아보게 해 준 사람이, 잘 생각해 보면 한 명쯤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사람이 지금 저와 멀어진 그 사람인지, 아직 친구로 남아있는 그 사람인지, 아니면 둘 다 그런 사람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 사람들을 통해 제가 새로운 관점을 갖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지금의 관계와 상관없이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싶습니다.




이제 월요일이 되고, 곧 크리스마스고, 곧 새로운 해를 맞이하게 됩니다. 코로나 이후로 멈춰버린 것만 같은 세상이지만 어쨌든 시간은 흐르고 있고, 그 시간을 모두 행복으로 채울 수 있길 기원합니다.


리르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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