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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리멀리 Sep 21. 2020

사뮈엘 베케트 <해피 데이스> 문학동네, 2020

[죽음을 향해서 수동적일 것]

 거장의 작품이 그렇게 불리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이유를 쉬이 파악하지 못할 때가 잦다. 이 처절하고 잔인한 작품에는 해설을 읽어도 연결이 맺어지지 않는 구석이 여럿 있다. 그리고 내가 이해하는 위니, 꼭 나와 닮은 위니의 모습도 여럿 있다.


 위니는 오십 대 여성이다. 그의 몸은 점점 땅에 잠기고 있다. 그리고 땅 위에 놓인 낡은 가방에 든 낡은 물건들을 손으로 잡을 수 있다. 그의 세계는 낮과 밤이 나뉘지 않은 채 태양이 내리쬔다. 땅에는 개미들이 기어 다닌다. 종이 울리면 잠에서 깨어나야만 한다. 윌리는 위니의 배우자이고 육십 대 남성이다. 그는 자고 싶을 때 잘 수 있다. 땅을 기어 다닐 수도 있다. 위니의 간절한 청에 가끔씩 대답하지만 그것은 위니의 언어를 반복하는 것뿐이다.


 위니는 기도를 하고 행복한 날이 될 거라며 미소를 짓다가 애타게 윌리를 찾는다. 계속해서 미신 같은 기억에 의존해 과거를 떠올리고 또 떠올린다. 말하고 또 말한다. 위니의 말은 공허하게 퍼지고 제발 윌리가 듣고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목소리를 작게 내기도 하고 크게 내기도 하면서 들리는 게 맞냐고 피곤하게 묻는 위니의 물음은 나와 닮았다. 돌아오는 대답에 순간마다 행복해하지만 그것은 사실 허구이다. 위니의 세계 속에서 그는 소통을 간절히 바라지만 사실은 단절되어 있고 간간히 낚아채는 소통은 허구이다. 나는 때로 그저 타인의 존재를 확인하기만을 바랄 때가 있다. 아무리 의미 없는 말이라도 듣고 싶을 때가 있다. 그것은 나에게만 의미 있는 말이다. 상대가 나를 떠날 것만 같고 나는 버려질 것만 같을 때 그러한 대답은 실낱 같은 희망이다. 의미 없는 낱말이어도 그것은 대답이 된다. 혼자 남지 않기를 몸서리치게 원할 때 나는 그렇다. 윌리의 존재를 확인하는 위니의 처절함은 어쩔 때의 나처럼 보였다.


 손을 바쁘게 움직이면서 가방에 있는 물건들을 만지작 대고 글씨를 읽는다. 브라우니라고 이름 붙인 권총은 끝내 쏘지도 못하고 삶을 지속한다. 위니는 삶을 선택한 것일까. 2막에서 목까지 땅에 잠겨 자기의 뺨을 보기 위해 볼에 바람을 잔뜩 넣으며 애쓸 때, 더 이상 윌리를 향해 고개를 돌릴 수 없을 때, 네 발로 기어 자기 시야에 들어온 윌리를 응원할 때, 그는 권총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1막에서 들고 있던 양산에 불이 붙었을 때 위니는 자신도 서서히 타다가 잿더미로 변하는 것을 생각한다. 능동적으로 죽음을 향해 갈 수 있었지만 위니는 수동적인 걸음을 택한다. 나는 땅에 잠기는 일은 자기가 진행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그가 수동적으로 죽음을 향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위대한 자비’라고 반복해 되뇌고 행복한 날을 기대하는 일에 중독된 양 보인다. “결국에는, 또 행복한 날”이라고도 자주 말하는데 그 말은 꼭 염원 같다. 어떤 사람은 위니의 세계를 디스토피아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포스트 아포칼립스적 세계라고도 하는데 무엇이 되었든 거기서 벗어나려고 능동적으로 몸부림치지는 않지만 부디 자신이 끝내에는 행복하기를 비는 듯 보인다. 비명을 지르며 어떤 트라우마를 연상시키다가도 행복을 말한다. 위니는 인간이다. 인간은 처절하게 행복을 바라고 기대하지만 비명을 지르는 날이 잦다.


  위니의 시간은 흐르지만 흐르지 않는다. 행복한 날을 바라고 기대하고 지금까지는 행복했다고 말하지만 현재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그는 어디에 멈추어 있는 것일까. 현재를 사는 우리는 현재를 그것으로 인식하고 사는 것일까. 나는 과거와 미래를 자주 말하지만 현재를 현재로서 설명할 때는 별로 없다. 현재는 빠르게 지나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도 멈추어 있는 것일까.


 어떤 손도 쓸 수 없고 나를 마주할 수도 없고 할 수 있는 것은 상대의 존재를 확인하려고 끊임없이 말을 하면서 하루가 가기를 기다리는 일뿐인 생활을 상상한다. 사실 그런 날은 꼭 땅에 박히지 않아도 겪을 수 있다. 불안과 단절을 벗어날 수 없을 때가 있다. 위니는 그러한 세계에 살면서 노래를 부른다. 나는 그러한 세계에서 노래는 안 부른다. 위니는 고도를 기다리지 않는다. 남은 생이 땅에 잠기는 일과 공허한 말소리로 채워지더라도 그는 고도 같은 것은 안 기다리고 노래를 부른다. 나라면 권총을 들었을 텐데, 그는 현재를 말하지 않으면서 현재를 산다. 수동적인 죽음으로의 걸음은 사실은 삶을 영위하는 일이 아닐까. 어쩌면 그것은 몹시 능동적인 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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